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정책이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정부는 ‘벤처·창업 자금생태계 선순환 방안’을 발표했다. 창조경제 실현을 떠받치는 금융 시스템, 즉 ‘창조금융’의 얼개가 드러난 셈이다. 창조경제는 창조금융 없이 불가능하다. 창조경제의 원천을 이루는 창조적 아이디어와 기술을 사업화하려면 금융의 뒷받침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조금융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1. 미국 실리콘밸리는 세계 최고의 창조경제 클러스터로 꼽힌다. 2, 3. 실리콘밸리에는 구글과 인텔 등 글로벌 IT기업 본사가 다수 둥지를 틀고 있다.
1. 미국 실리콘밸리는 세계 최고의 창조경제 클러스터로 꼽힌다. 2, 3. 실리콘밸리에는 구글과 인텔 등 글로벌 IT기업 본사가 다수 둥지를 틀고 있다.

세계 최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은 2003년 하버드대에 다니던 스무 살 대학생 마크 주커버그가 재미 삼아 만든 페이스매시(Facemash)라는 교내 SNS가 출발점이다. 어찌 보면 머리가 비상하고 재기 발랄한 청년의 장난기가 세상을 뒤바꿔놓은 셈이다.

페이스북도 창업 초기에는 난관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용자가 급증하면서 시스템 개발과 서버 운영에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다. 하지만 마크 주커버그 주변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엔젤투자자와 벤처캐피털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일궈놓은 게 없는 스타트업(신생기업) 페이스북의 가치와 잠재력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투자했다. 만약 창업 초기에 종잣돈을 대준 투자자들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페이스북이 있었을까. 아마도 그 가능성은 극히 낮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벤처 생태계라고 불리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투자문화 덕분에 페이스북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어떨까. 우리나라도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의 벤처 육성 정책에 힘입어 벤처 열풍이 뜨겁게 불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정부의 정책자금과 민간의 투자자금이 벤처업계로 쏟아졌다. 벤처기업이 몰려 있던 코스닥 시장은 초활황을 이뤘다. 하지만 불과 수 년 만에 거품 붕괴와 함께 벤처투자 시장도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2011년 기준 국내 엔젤투자 규모는 2000년에 비해 금액 기준으로 94.6%나 감소했다. 2000년 당시 5493억원에서 2011년에는 296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엔젤투자자 수도 같은 기간 2만8875명에서 619명으로 대폭 줄어들어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신생기업과 창업 초기 기업에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엔젤투자의 씨가 말라가는 형국인 셈이다.

미국 경제의 숨은 원동력은 ‘엔젤투자’
엔젤투자는 창업 초기 벤처기업들에게 자금을 공급하고 경영, 기술, 마케팅 등에 대한 멘토링을 통해 성장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아울러 창업을 활성화함으로써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 잠재력을 확보하는 데도 큰 보탬이 된다.

미국은 2011년 225억달러 규모의 엔젤투자가 이뤄져 16만5000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특히 전체 벤처투자에서 엔젤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43.6%에 달했다. 엔젤투자자 수도 총 31만8480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이 6만6230개 기업에 투자를 했다. 미국에 비하면 한국의 엔젤투자 현주소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셈이다.

올해 창업 3년차를 맞은 한 스마트TV 셋톱박스 제조업체 대표는 “벤처기업은 창업 후 1~2년이 가장 중요한 고비지만 그 기간에 자금을 조달하기가 너무 어렵다”며 “직접 자금문제로 큰 고충을 겪어봤기 때문에 사업이 성공하면 반드시 창업 2년 이하의 신생 벤처기업을 위해 투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벤처캐피털 쪽도 형편이 썩 좋지 않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벤처캐피털은 창업 초기 단계의 벤처기업에 투자하기를 꺼린다. 그나마도 모태펀드, 정책금융공사 등의 정책자금이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떠받치고 있는 형편이다.

2012년 말 기준 국내 벤처캐피털의 전체 투자잔액에서 초기 단계(업력 3년 이내) 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은 30%에 그치고 있다. 이 비중이 2000년에는 70%를 웃돌았다. 반면 후기 단계(업력 7년 초과) 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은 44.6%에 달한다. 어느 정도 사업기반과 수익성을 확보한 기업을 선호하는 보수적 투자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아시아금융학회장)는 “엔젤투자자나 벤처캐피털의 투자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유일한 중간회수시장인 코스닥시장이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침체를 지속하면서 엔젤투자와 벤처투자가 급속히 위축됐다”고 진단했다.

정부는 지난 5월15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이른바 ‘벤처·창업 자금생태계 선순환 방안(이하 벤처 선순환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은 ‘창업→성장→회수→재투자/재도전’의 과정이 물 흐르듯 순환하는 벤처 생태계를 구축하자는 취지다. 그동안 국내 벤처 생태계의 고질적 문제였던 엔젤투자, 회수 및 재투자, 재도전의 병목현상을 해소하는 데 중점을 뒀다는 설명이다.

특히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벤처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다짐이 주목된다. 정부는 “창조경제 실현 과제들의 성공적 이행을 뒷받침할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기 위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4월30일 국회 경제정책포럼이 주최한 ‘창조경제 구현을 위한 경제정책 방향’ 간담회.
지난 4월30일 국회 경제정책포럼이 주최한 ‘창조경제 구현을 위한 경제정책 방향’ 간담회.

정부, ‘한국형 실리콘밸리’ 구축 나서
전문가들은 창조경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실리콘밸리를 첫손가락에 꼽는다. 실리콘밸리는 뛰어난 인재 풀, 대학과 기업의 긴밀한 협력, 창업을 독려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분위기, 넘치는 엔젤투자자와 벤처투자자들이 상호 시너지를 일으키며 뛰어난 기업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하는 세계 최대의 벤처 요람이다.

오정근 교수는 “실리콘밸리는 구글, 애플, 시스코, 페이스북 등 정보통신 분야 대기업들이 유망한 벤처기업을 거액에 사들이는 인수·합병(M&A) 시장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덕분에 큰돈을 벌려는 야심차고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정보통신 대기업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기업과 벤처기업이 공존하는 실리콘밸리를 창조경제의 벤치마킹 모델로 삼는 게 적합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벤처 선순환 방안을 통해 다양한 창조금융 대책을 내놓았다. 특히 정책금융을 동원한 수단들이 눈에 띈다. ‘미래창조펀드’와 ‘성장사다리펀드’가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미래창조펀드는 민간 투자를 견인하기 위해 기존 펀드와 달리 창업 초기 투자에 대해 공공자금과 민간자금 간 이익·손실 배분을 차등화한 펀드다. 요컨대 민간 투자자에게 수익을 먼저 배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한편 손실에 대해서는 공공자금으로 우선 충당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미래창조펀드는 총 5000억원 규모로 조성되며, 성장성이 높은 벤처·창업기업에 집중 투자된다. 특히 초기 단계 투자에 2000억원이 배정될 예정이다. 나머지 3000억원은 후속·성장 단계 투자에 활용된다.

성장사다리펀드는 정책자금 6000억원과 민간자금 1조4000억원을 합쳐 2조원 규모로 조성된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평가모델 및 기업은행의 기업정보 등을 활용해 주식, 메자닌(Mezzanine: 신주인수권부사채, 전환사채 등에 투자하는 금융기법 혹은 펀드), 유동화증권, 융자 등의 다양한 형태로 사용될 예정이다. 특히 지식재산 금융, M&A, 기업공개 등 성장·회수 단계의 중소·중견기업에 필요한 다양한 자금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4월 금융위원회는 정책금융의 역할을 기존의 양적·보편적 지원 방식에서 선별적·선도적 지원 방식으로 재정립한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창업 기업과 기술혁신형 기업에 대한 보증지원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안유화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막 창업한 기업이나 창업 초기 기업은 종잣돈이 부족해 이른바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의 정책금융은 창업을 유도하는 한편 창업 초기 기업들의 투자 위험을 부담·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창조경제 구현을 위해 정책금융 수단을 활용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 주도의 벤처기업 지원은 자원 배분의 비효율과 도덕적 해이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과거 국민의 정부 시절 벤처 육성 정책이 결국 거품을 키우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구로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일명 G밸리로 불리는 이 단지는 1만개가 넘는 IT 벤처기업들의 요람이 되고 있다.
서울 구로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일명 G밸리로 불리는 이 단지는 1만개가 넘는 IT 벤처기업들의 요람이 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벤처거품 붕괴 교훈 삼아야
오정근 교수는 “정부의 과도한 지원은 오히려 벤처 생태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2000년대 초반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라며 “정책자금 지원에만 의존하는 ‘무늬만 벤처기업’을 어떻게 걸러내느냐가 성패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93년 첨단기술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요즈마펀드’를 조성했다. 정부와 민간이 각각 40%와 60%의 자금을 투입한 민관 매칭펀드다. 주목할 것은 정부가 펀드 조성만 주도했을 뿐 민간이 펀드 운영을 전적으로 맡았다는 점이다. 정부 개입의 비효율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요즈마펀드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창업국가’로 거듭나게 되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창조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IP)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사실 창조경제의 핵심이자 원천은 지식재산이다. 창조적 아이디어와 독창적 기술 자체가 지식재산이기 때문이다.

지식재산은 기술 특허뿐 아니라 콘텐츠, 저작권, 디자인, 상표, 신지식 등 창조적 아이디어의 산출물 전체를 일컫는다. 문제는 지식재산이 무형의 자산이라는 특성 탓에 정확한 가치를 산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창조금융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지식재산 평가 시스템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래야만 지식재산이 공정하고 원활하게 거래되는 창조금융 시장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유화 연구위원은 “창조경제는 창조적 기업이 창업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자본을 투입하는 창조금융 시장이 있어야 가능하다”며 “그러려면 자본시장이 창조금융의 핵심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 특히 아이디어와 기술을 평가하고 투자하는 창의자본(Invention Capital)을 육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Tip

‘벤처·창업 자금생태계 선순환 방안’ 주요 내용

정부가 지난 5월15일 발표한 ‘벤처·창업 자금생태계 선순환 방안’에는 벤처 생태계에 자금 물꼬를 트기 위한 방안들이 다채롭게 담겨 있다. 정책금융 수단 외에도 민간자금을 효과적으로 벤처·창업 투자에 유인하기 위한 대책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새로운 제도 도입과 규제 완화 등의 방안도 눈길을 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

성공한 벤처기업가를 벤처투자 주역으로 : 성공한 벤처 1세대가 회수자금을 벤처·창업 재투자에 사용하면 세제 혜택 등 충분한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 또 선배 벤처인들이 후배 창업자에게 경영 노하우를 전수하고 투자할 수 있는 ‘청년창업 멘토링 서포터즈’도 구성할 예정이다.
일반 개인이 십시일반 투자할 수 있는 제도 마련 : 자금이 많지 않은 일반 국민들도 자신이 희망하는 창업기업에 소액 투자할 수 있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 제도를 올해 안에 도입한다.
기업 인수·합병(M&A) 시장 대폭 활성화 : 벤처기업이 기업공개를 하기 전에 투자자금을 중간에 회수할 수 있는 길을 넓히기 위해 M&A 시장을 활성화한다. 세제 혜택을 주거나 규제 부담을 완화할 예정이다.
혁신형 중소기업 위한 제3의 주식시장 개설 : 자본시장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창업 초기의 혁신형 중소기업들이 상장할 수 있는 ‘코넥스(KONEX)’ 시장을 신설한다. 코넥스 시장은 상장요건을 최소화하고 공시사항도 대폭 축소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