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상구 삼락동은 낙동강에 접해 있는 지역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삼락동 일대는 공업단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한때 부산 경제의 주축을 이뤘던 신발업체들이 다수 포진해 있기도 했다. 지금은 과거 영화를 누렸던 신발업체 대부분이 해외 등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갔지만 삼락동 일대는 여전히 부산지역 주요 공업단지로 기능하고 있다. 바로 이 지역에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인 조광페인트 본사가 자리 잡고 있다. 1947년 창립한 조광페인트는 국내 페인트산업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1. 조광페인트가 생산하는분체도료 ‘파우락’2, 3, 4. 조광페인트 도료제품의 색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컬러북
1. 조광페인트가 생산하는분체도료 ‘파우락’
2, 3, 4. 조광페인트 도료제품의 색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컬러북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이전까지 미군 당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른바 미 군정 체제였다. 당시 미군이 한국에 진주하면서 많은 군수물품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관문 역할을 부산항이 맡았다. 그러다 보니 당시 부산에서는 다양한 품목의 미 군수물품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고 양복윤 조광페인트 창업주는 그 무렵 부산 영도구 대평동에서 미 군수물품을 받아 유통하는 사업에 나섰다. 그때 눈여겨본 물품이 바로 페인트였다. 국가 경제가 성장하면 더불어 시장이 커질 수 있는 품목이 페인트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양복윤 창업주는 곧장 페인트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제조기술이 없다 보니 미 군수물품을 받아 이것저것 섞어 반(半)가공제품을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온갖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독자적으로 페인트 제조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부산은 우리나라 페인트산업의 모태 구실을 했다. 현재 페인트업계 상위권을 이루고 있는 조광페인트, 삼화페인트, 노루페인트, 건설화학이 모두 부산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1960~70년대 페인트산업이 번창하면서 삼화페인트, 노루페인트, 건설화학은 모두 서울로 본사를 옮겨갔다. 조광페인트만 꿋꿋이 둥지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서순석 조광페인트 기획조정실장은 “예전에 임직원들이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자고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양복윤 창업주께서는 우리가 부산에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이제 와서 서울로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그때마다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광페인트는 점차 사업이 커지면서 1967년 법인으로 전환했고, 1970년대 들어 고속성장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초부터 정부 주도의 범 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인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조광페인트는 날개를 달았다. 농촌지역의 낙후된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지면서 주택개량에 필요한 각종 도료(페인트)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 것이다. 당시 조광페인트는 ‘스레졸(슬레이트 및 기와용 페인트)’, ‘319빠대(퍼티: 건축자재 빈틈을 메우는 도료)’, ‘락카(래커: 셀룰로오스를 주성분으로 하는 도료)’ 등의 제품을 출시하며 큰 히트를 쳤다.

1. 조광페인트 연구원이 실험을 하고 있다.
1. 조광페인트 연구원이 실험을 하고 있다.
2. 조광페인트 공장에서 제품이 생산되는 모습.
2. 조광페인트 공장에서 제품이 생산되는 모습.
3. 조광페인트의 베트남 현지법인 조광비나 전경.
3. 조광페인트의 베트남 현지법인 조광비나 전경.

국내 페인트산업의 모태는 부산
70년대 목재·가구산업의 급성장도 조광페인트의 사업확대에 큰 발판이 됐다. 목재 및 가구 도장용 도료제품 수요가 그야말로 폭증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광페인트는 가장 앞선 목공용 도료를 개발·출시하면서 업계를 주도했다. 지금도 목공용 도료 시장에서 넘버원 자리는 조광페인트가 차지하고 있다.

서순석 실장은 “목공용 도료는 조광페인트가 훌쩍 성장하는 기반이 됐다. 특히 1970년대 가구산업이 커지면서 조광페인트도 비약적인 성장기를 구가했다. 공급량이 수요량을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페인트 대리점 사장들이 줄을 서서 제품을 받아가는 일이 허다했다. 오죽했으면 영업사원들이 오히려 도망을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페인트는 일반 소비자들이 직접 구입해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기업 고객에게 공급되는 형식으로 판매된다. 이른바 B2B 제품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페인트산업은 연관산업의 흥망성쇠와 궤를 함께하는 게 특징이다. 예컨대 한국 산업 발전사에 대입해본다면 1970년대에는 가구산업, 1980년대에는 건설산업, 1990년대에는 자동차산업, 2000년대에는 전기·전자산업이 각각 번창하면서 페인트산업도 해당 산업에 많이 사용되는 연관제품 공급으로 성장세를 이어왔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 페인트업계의 3대 수요산업으로는 건설, 자동차, 조선산업이 꼽힌다. 풍력산업, 플랜트산업, 전기·전자산업도 만만치 않은 페인트 수요가 있다. 다만 최대 수요산업인 건설산업이 침체기를 겪으면서 페인트업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광페인트는 종합도료업체다. 목공용 도료, 건축용 도료, 공업용 도료, 자동차 보수용 도료 등 거의 모든 종류의 페인트 제품을 다 만들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덕분에 각각의 수요산업이 부침을 겪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수익균형을 이룰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갖춘 셈이다.

모든 페인트 제품 만드는 종합도료업체
물론 여느 기업처럼 조광페인트도 몇 차례 경영상의 중대 고비를 겪었다. 특히 외환위기 때는 창사 이래 가장 큰 난관에 봉착했었다. 당시 환율 급등으로 원자재 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수익성이 급전직하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품을 납품받은 고객사들이 잇달아 부도를 내면서 대금을 못 받는 경우도 속출했다.

국내 페인트산업은 석유추출물로 만들어진 원재료를 대부분 수입해 쓴다. 더욱이 제품 원가에서 원재료 구입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70%나 된다. 그 때문에 환율과 유가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한다.

IMF의 직격탄을 맞은 조광페인트는 1998년 창립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자산 매각, 매출채권 할인 등으로 자구노력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전체 직원의 3분의 1 가량을 줄이는 인력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창사 이래 가장 힘들고 가슴 아픈 시기였다. 하지만 비상경영을 펼친 데다 환율도 다소 안정되면서 이듬해 조광페인트는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조광페인트는 지난 2000년 당시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가 선정한 ‘품질경쟁력 우수 50대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그만큼 조광페인트 제품의 품질력은 정평이 나 있다. ‘환경표지인증(제품의 환경 관련 정보를 인증기관으로부터 공인받는 환경등급제도)’ 제품도 20종에 달할 만큼 친환경기업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조광페인트의 3대 경영이념 중 하나가 ‘환경과 인간을 생각하는 기업’이다. 서순석 실장은 “페인트 제품은 모든 인간생활에 밀착해 있는 데다 환경문제와도 직접적으로 결부돼 있어 자연스레 환경중시 경영이념이 정착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조광페인트는 국내 목공용 도료와 UV(Ultra Violet)도료 시장에서 1등을 차지하고 있다. UV도료는 자외선을 쬐면 1~2초 만에 경화(硬化)가 이뤄지는 도료제품을 말한다. 또 매끄럽고 강도가 센 데다, 오염이 안 되고 접착력이 아주 강한 특징을 지닌다. UV도료는 PVC제품, 마루판, 휴대폰 외장용 도료 등으로 많이 쓰인다. 특히 정보기술(IT) 산업의 지속적 성장과 맞물려 각종 전기·전자제품 도료용으로 급성장이 기대되는 품목이다.

환경과 인간을 생각하는 경영이념
현재 세계 페인트산업의 화두는 첨단 친환경제품 기술력 확보다. 페인트업체의 경쟁력 역시 친환경 기술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페인트 제품에 유기용제를 아예 쓰지 않거나 극소화하는 기술이 미래 트렌드를 좌우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통상 페인트가 마르는 과정에서 유기용제가 기화(氣化)하면서 대기환경 오염을 유발하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목받는 제품이 분체(粉體:분말)도료다. 분체도료는 말 그대로 분말 상태로 도장하는 특수도료다. 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분말 상태의 도료를 물체에 바를 수 있는 것일까. 해답은 전기를 이용한 정전도장(靜電塗裝·Electrostatic Painting) 기술에 있다.

정전도장은 정전기를 이용해 모양이 복잡하거나 면적이 넓은 피(被)도장물에 도료를 칠하는 방법이다. 피도장물에는 양극을 걸고 도료의 분무장치에는 음극을 걸어 전기적으로 피도장물과 도료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인 스프레이 방법보다 도장 효율이 높을 뿐 아니라 내구성도 뛰어나다.

분체도료는 가전, 자동차, 산업용 부품 및 설비, 가스관, 송유관 등 다양한 철재 제품의 도장용으로 쓰이고 있다. 전체 도료 품목 중에서 가장 성장성이 큰 제품이 분체도료라는 설명이다. 현재 조광페인트는 ‘파우락(POWLAC)’이라는 브랜드로 분체도료 제품을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조광페인트는 전체 구성원의 35%가 연구개발 인력일 만큼 신기술, 신제품 개발을 중시하는 기업이다. 임직원들은 조광페인트의 최대 강점으로 서슴없이 ‘기술력’을 꼽는다. 1980년대 초부터 일찌감치 세계 유수 도료업체들과의 제휴를 통해 선진기술 확보에 주력해온 경영전략과도 연관이 깊다.

특히 조광페인트는 1992년 노르웨이의 세계적인 도료업체 요턴(Jotun)과 손잡고 합작법인 조광요턴을 설립해 중방식(重防蝕)도료 분야의 주요 업체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중방식도료는 교량, 해상구조물, 발전설비 등 주로 해상이나 수중, 해안 등에 설치되는 중후장대 시설물의 부식을 방지하는 고내구성 도료를 말한다.

조광페인트는 고유의 기술력을 앞세워 미래 성장동력 제품 개발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첨단 친환경 도료를 비롯해 전기·전자 부품 및 소재에 사용되는 접착제, 고기능성 특수 코팅제 등이 그런 예다. 그 중에서도 일본 강소기업들이 주름잡고 있는 전기·전자산업용 접착제 분야에 투자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대은 조광페인트 사장
이대은 조광페인트 사장

첨단 도료제품 개발로 신성장동력 확충
서순석 실장은 “전기·전자용 도료 제품은 기본적인 코팅 기능에 접착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다른 수요산업에 비해 물량은 적지만 부가가치가 아주 높다는 장점이 있다. 이 분야에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려 신성장동력으로 키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광페인트는 기본적으로 도료산업 내에서 외형이나 규모가 아닌 성장성이 가장 좋은 기업이 되는 것에 경영전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밝혔다.

조광페인트는 글로벌 기업 도약을 목표로 해외시장 진출에도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2008년 베트남 현지법인 조광비나를 설립하고 동남아시아 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또 2011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와 손잡고 합작법인 마니파(Manifa Powder Coatings)를 설립했다. 마니파는 가스관 도장용 분체도료 전문업체다. 나아가 조광페인트는 2020년까지 동유럽, 중국, 아프리카 등 신흥시장 지역에 해외공장을 추가로 설립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도료업체에서 글로벌 도료업체로 뻗어나가는 조광페인트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Tip  |  중소기업 교육기관 선정된 조광페인트

직원교육 인프라 없는
중소기업 도우미 자청

조광페인트는 지난해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주관하는 ‘국가인적자원개발 컨소시엄 사업’의 신규 운영기관으로 선정됐다. 도료업계에서는 조광페인트가 유일하게 지정됐다. ‘국가인적자원개발 컨소시엄 사업’은 직원교육 인프라가 없어 자체적으로 교육을 실시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직업능력 개발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조광페인트는 국내 최고의 도료기술센터를 신축하는 한편 최신 훈련시설과 장비를 활용해 차별화된 도료·도장 훈련과정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우수한 기술 노하우를 중소기업에 전수해 국내 도료산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표다.

Tip  |  조광페인트의 ‘빛나는’ 사회공헌활동

낙후마을에 생동감 불어넣는 벽화봉사 눈길

조광페인트 빛그림 봉사단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조광페인트 빛그림 봉사단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조광페인트는 ‘빛그림 봉사단’이라는 이름의 사내모임을 조직해 낙후된 지역의 낡은 담장에 벽화를 그리는 이색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빛그림 봉사단원들의 정성스런 손길을 받은 마을들은 마치 새 옷으로 갈아 입은 듯 금세 환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로 바뀐다. 주민들도 빛그림 봉사단의 벽화봉사를 크게 반긴다.
2010년 출범한 빛그림 봉사단은 부산 사상구청과 협약을 맺고 주로 환경개선이 필요한 사회복지시설이나 낙후마을을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앞으로 조광페인트를 대표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으로 키워나간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조광페인트는 지난 2000년부터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집짓기 봉사활동을 펼치는 한국해비타트에 페인트 소요량 전량을 지원해오고 있다. 향후 페인트 지원을 넘어 직접 집짓기 봉사에 적극 참여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알림

한국 경제는 서울·수도권 집중도와 대기업 의존도가 지나칩니다. 그런 가운데 각 지역에 거점을 둔 향토기업들의 활약은 지역경제뿐 아니라 국가경제 균형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수 향토기업들은 사업의 터전인 고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이코노미조선>은 전국 광역시도 지역경제를 대표할 만한 향토기업을 찾아 그들의 빛나는 활동상을 살펴보는 연중 기획물 ‘향토기업 오디세이’를 마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