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은 그동안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산업으로 인식돼 왔다. 농작업 환경은 열악하고, 농사일을 하다 다쳐도 제대로 보상받기 어렵다. 농업이 타 산업과 달리 산업재해 예방·보상 정책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농업에 ‘행복한 훈풍’이 불고 있다.

경기 광주 초월읍 서하리에서 토마토 시설재배를 하는 김광기씨(56).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농사를 천직으로 여겨 온 김씨가 ‘농사’에 자부심을 느낀 것은 요즘 들어서다.

“예전에는 농사일 자체가 고역이었죠.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이 많아 무릎이나 허리가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죠. 지금 농사일은 훨씬 수월해졌어요. 일을 편하고 쉽게 할 수 있는 편이장비 때문이죠.”

김씨뿐만 아니라 이 마을 주민들의 표정은 3년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서하리의 농작업 환경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농작업 안전모델 시범사업’에 선정된 지난 2010년부터다. 이 사업은 농촌진흥청, 도농업기술원, 시·군농업기술센터의 지원으로 농작업 관련 재해발생을 줄이고, 안전하고 능률적인 농작업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지난 2006년부터 추진됐다. 지금까지 88개 마을에 150여억원이 투입됐다. 농진청은 이를 2018년까지 330개 마을로 확대할 예정이다.

경기 광주 서하리 주민들은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교류하면서 능동적으로 농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해결책을 찾았다(왼쪽 사진). 박수복 광주시농업기술센터 생활자원팀장(맨 왼쪽)이 김광기씨 부부와 함께 농약 보관함을 살펴보고 있다.
경기 광주 서하리 주민들은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교류하면서 능동적으로 농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해결책을 찾았다(왼쪽 사진). 박수복 광주시농업기술센터 생활자원팀장(맨 왼쪽)이 김광기씨 부부와 함께 농약 보관함을 살펴보고 있다.

농작업 재해 전체 산업의 2배 수준

농업은 광업·건설업과 함께 3대 위험산업으로 분류된다. 농작업 재해율은 전체 산업의 2.2배, 농업인의 근골격계 질환은 비농업인의 2.4배에 달한다.

농부증(농민에게 많이 나타나는 정신·신체적 장애 증상군)을 호소하는 농업인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구부리거나 쪼그려 일하면서 생기는 요통·관절염, 농약중독, 축산농가의 호흡기질환, 화훼농가의 알레르기 등에 집중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농업인의 업무상 질병 중에는 근골격계 질환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대다수 농민들은 아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큰 병으로 키우는 경우가 많다. 수확기에는 병원을 찾을 시간도 없다. 김씨 역시 5~6년간 무릎 통증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치료를 미루다 결국 2010년 무릎연골수술을 받았다.

가장 많이 발생하는 손상유형은 농작업 중에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는 사고다. 시설재배지에서는 농약 중독이 가장 많다. 전체 손상 발생의 절반 이상은 영농 활동이 가장 활발한 5~8월에 집중됐다. 농작업 중 손상으로 인해 2주 이상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절반 이상으로 농번기에 사고가 발생하면 한철 농사를 망치게 된다.

농사일을 하다 다치거나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농기계 사고 등으로 한 달에 숨지는 농업인은 20여명에 달한다. 장비 점검 소홀이나 일손 부족, 농사일에 익숙함으로 인한 안전 불감증 때문이다. 이는 안전교육을 받는 경우가 드물고, 농약 사용 같은 경우에는 주의사항을 알고 있더라도 보호구 착용률이 30% 수준으로 낮게 나타나는 등 전반적으로 농업 안전보건관리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문제인 소득을 우선시하고, 근로자로서의 직업적 재해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다보니 이에 대한 국가관리시스템은 미비하다. 대다수의 자영농업인은 산재보험에서 소외돼 있으며, 농업인에 대한 복지지원 정책이 저소득 및 노령화 지원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농진청이 농작업 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보건 정책을 펼치는 것은 최근 바뀌고 있는 농업정책을 대변한다. 농진청은 그동안 농업기술 개발을 통한 생산력 향상과 다양한 소득원을 발굴해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한 지원을 해왔다. 하지만 아직 100만이 넘는 농가는 대부분 1ha 미만의 소규모 자영농으로 농업 소득만으로는 삶의 질을 유지하기 어렵다. 복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농정이 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경숙 농진청 재해예방공학과 박사는 “농작업재해 예방관리를 위한 종합적인 체계를 구축해 농업의 경쟁력 제고뿐 아니라 농업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속가능한 농업과 농촌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 이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밝혔다.

경기 광주 서하리 주민들이 근골격계 질환 예방 체조를 하고 있다.
경기 광주 서하리 주민들이 근골격계 질환 예방 체조를 하고 있다.
김광기씨가 전동운반차를 이용해 포장 박스를 옮기고 있다.
김광기씨가 전동운반차를 이용해 포장 박스를 옮기고 있다.

작업환경 평가해 맞춤형 개선

사업 초기, 광주시기술센터는 농작업 안전 실태를 조사하고, 주민들의 건강검진과 작업 환경 평가 등을 바탕으로 농작업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김씨는 “건강이나 안전관리, 재해예방 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은 절감하고 있었지만 새벽부터 비닐하우스 등지에서 일하다 밤에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귀찮아 하는 농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장은 금세 꽉 찼다. 안전교육이 재미있고, 유용하다는 것이 입소문이 나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온 것이다. 저녁밥을 먹지 않고 교육에 참석한 농민도 있었다고 한다. 근골격계 질환 예방 체조를 비롯해 수지침과 건강 마사지를 배우는 건강증진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PAOT(참여형 농작업 환경 개선활동)를 통해 장기적으로 농업인들 스스로가 농작업 안전의 주체가 돼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개선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박수복 광주시기술센터 생활자원팀장은 “주입식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유해요인을 진단하고, 모범 사례의 공유를 통해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식으로 진행한 교육방식이 오히려 농민들에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김씨를 포함해 서하리 주민들의 농작업 환경은 3년 전보다 엄청나게 개선됐다. 이동식 의자를 활용하면서 쪼그리고 앉아 작업할 일은 없어졌다. 무거운 짐을 나르던 운반차에는 전동기를 달았고, 수차례의 개선작업을 통해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파종기는 작업시간을 3분의 1로 단축시켰다. 농기구 정리대와 농약 보관함이 만들어졌고, 마을 공동 농기구는 따로 창고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농장 내 간이 휴게실이나 샤워시설을 갖추거나 운동기구를 설치한 농가도 있다. 김씨는 최근 농장에 이동식 황토 찜질방을 설치했다. 이미 몇 차례 가족들과 마을 주민을 초청해 찜질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김씨는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들 태현씨(32)의 귀농을 뿌듯해 했다. 3년 전 귀농한 태현씨는 월급쟁이 농사꾼이다. 그의 월 급여는 300만원. 언젠가는 김씨의 대를 이을 것이다. “아들에게만큼은 농사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소득도 상당하고, 농사일을 하면서도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Mini Interview  |  이경숙 농촌진흥청 재해예방공학과 박사

“산재보험 수준의 농업인 재해 보장제도 도입해야”

“농업인은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요. 농업이 매우 높은 업무상 재해에 노출돼 있고, 고령화된 농업인들이 재해에 더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에 대한 대책이 시급합니다.”

이경숙 농촌진흥청 재해예방공학과 박사는 “농업인의 직업적 재해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가 향후 농업인의 안정적인 소득을 보전할 뿐 아니라 한국 농업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농업인 재해 관련 전문가로는 유일하다. 그는 1990년대 초 농사일을 좀더 편하게 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해 생활개선 시범사업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당시에도 농기계, 농약 등 농자재의 발전과 농업 노동력의 여성화·고령화 등으로 인한 인적 재해가 많았지만 안전·보건 등과 관련된 교육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현장 농업인의 건강과 안전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단순히 시범적으로 몇 개 마을이나 농가를 대상으로 작업개선지도를 해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농업인이 일반 근로자에 준하는 작업안전관리와 환경개선, 건강관리, 재해 보상관리 등을 지원할 수 있는 연구를 시작하게 됐죠.”

처음에는 현황조차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표본조사가 필요했지만 현장조사가 쉽지 않았다. 낮에는 모두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작업 재해 규모나 영향요인을 알아야 이를 줄이기 위한 예방사업이나 적절한 보상정책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농업인의 업무상 질병 및 손상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통계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통해 2009년에 처음으로 통계청으로부터 국가통계로 승인받았다.

농작업 재해에 대한 예방관리체계 구축도 서서히 성과를 거두고 있다. 현재 농식품부에서는 산재보험 수준의 보장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농진청에서는 농작업 재해 예방을 위한 연구와 지도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현재 농부증과 같은 농업인의 업무상 질병과 손상을 예방하고 관리할 농업안전보건센터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장기적으로는 사회보장의 확대, 복지강화 차원에서 농업인에게도 업무상 재해 예방과 보장이 이뤄지도록 법적·행정적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들이 농업 활성화와 함께 복지확대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