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음악 수준을 통해 그 나라의 전체 수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나라의 음악 수준은 그 뒤를 받쳐주는 음악 산업이나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 코스모스악기는 1972년 창립 이래 국내 음악 산업의 인프라 역할을 해오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악기점이다. 코스모스악기의 수장인 민명술 회장(70)은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오로지 열정과 투지, 정직과 신뢰의 철학으로 지금의 기업을 일궈냈다. 그와 코스모스악기가 함께한 40년 여정을 들어봤다.

코스모스악기의 역사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1월, 코스모스악기는 서울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4평짜리 공간에서 시작됐다.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통기타와 레코드, 현악기 부속품 등을 팔았다. 갓 문을 연 풋내기 점포치고는 제법 장사가 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 재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백화점 고객이 점점 줄며 악기점에도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민 회장은 영업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이전 수도피아노사에서 다년간 익힌 노하우와 인맥으로 다시금 좋은 기운이 돌았다. 무엇보다 결정적 성공 요인은 ‘통기타’였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곤궁했다. 지금처럼 시설 좋은 공연장도, 고화질 TV도 없었지만 통기타와 LP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을 논했던 시절이다. 청바지에 통기타를 든 청년들은 불안하고 우울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했다. 이런 흐름에 통기타를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 더 큰 점포와 다양한 기타가 필요했다. 민 회장은 1977년 6월 낙원상가 2층에 통기타 전문 매장을 열었다.



“지금 낙원상가는 세계적인 악기 소매상가가 됐지만, 내가 입점할 때만 해도 썰렁했어요. 한 층에 점포가 겨우 세 개밖에 없었지요. 지금도 ‘코스모스’ 하면 낙원상가의 터줏대감으로 통해요.” 



이 낙원상가 상점은 1997년 서초동으로 사옥을 옮긴 후에도 현재까지 코스모스악기 지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악기 수입 자유화’ 도약의 발판

장사도 잘 되고, 먹고 살기도 편안했지만 민 회장은 고민이 많았다. 악기 판매만으로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서였다. 그러던 1978년 6월1일, 악기수입자유화 단행 소식을 접했다. 민 회장은 무릎을 쳤다. 코스모스악기의 획기적인 도약의 기회라고 믿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국산 악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더구나 전문가용이나 특수 악기는 사기는커녕 구경하기도 어려웠고요. 그럼 나머지는 수입해 와야 하는데 그때 대량 반입이 금지돼 있어서 소비자나 판매상 모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수입자유화 조치가 이뤄진 거죠.”



민 회장은 경제 성장이 지속되는 한 전문악기의 수요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주저없이 해외 악기 수입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코스모스악기는 ‘악기 수입·유통’이라는 국내에서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간 세계적인 악기업체로 성장했다.



이후에는 사회 분위기가 민 회장을 도왔다. 1980년대 초부터 초등학교에서는 1인당 1악기를 장려하는 정책이 시행됐다. 그러자 미취학 자녀를 둔 부모들 사이에서 음악 교육 붐이 일어났다. 많은 어머니들이 쌈짓돈을 모아 자식들에게 서양 악기를 가르치기 위해 집안에 피아노를 사들이기 시작했던 것도 이때쯤부터다. 음악을 전공하거나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 수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해외 시장에서도 한국 시장의 잠재력을 높이 샀다. 외국 유명 악기상들이 그의 상담 요청에 호의적으로 응했다. 국내에서는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이었던지라 어려움도 많았지만 반대로 좋은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는 없는 훌륭한 악기들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세계 시장을 누볐다. 민 회장은 악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떠났다. ‘소비자에게 좋은 악기를 공급하는 것, 친절하고 정직하게 바이어, 고객 모두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일에 매진했다.



“악기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입니다. 악기를 사러온 사람들이 악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야말로 판매자의 양심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사업을 한다면 정말 오래 남을 수 없어요.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신용과 정직은 악기업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만 마일 이상의 비행 기록을 세울 만큼 세계 악기 시장을 두루 다니면서 기술력과 시장 분석을 하며 감각을 익혔다. 1982년에는 일본 롤랜드와 야마하의 한국 독점 공급권을 따내며 코스모스악기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노래방 기기에 쓰이는 표준음원을 제작하는 롤랜드는 선금을 받고 물건을 나눠줘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90년에는 주식회사 코스모스악기로 법인전환을 했다. 그러나 회사 규모는 여전히 오퍼상(무역대리업) 수준이었다. 코스모스악기를 명실상부한 악기 유통 전문회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고객들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애프터서비스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자연히 소비자들은 불만에 차 있었고, 판매상들에 대한 신뢰도도 떨어진 상태였죠.”



민 회장은 이미 전문교육을 받은 직원이라 할지라도 모두 해외연수를 보내 더 수준 높은 기술을 습득하도록 지시했다. 그래도 못 고치는 것이 생길 때는 산지로 보냈다. 그래도 안 되면 외국 기술자를 초빙해서 완벽하게 마무리 했다. 지금까지 코스모스악기가 ‘철저한 사후관리’로 정평이 난 이유다. 현재 서초동 사옥 뒤편에 애프터서비스 센터 건물을 별도로 두고 20명의 전문 직원이 체계적인 운영 시스템을 갖추고 움직이고 있다.  

- 민명술 회장은 코스모스악기가 철저한 사후관리로 정평이 난 이유에 대해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애프터서비스 때문”이라고 말했다.
- 민명술 회장은 코스모스악기가 철저한 사후관리로 정평이 난 이유에 대해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애프터서비스 때문”이라고 말했다.

야마하 배신으로 매출 반토막… “끝이라 생각 안했다”

코스모스악기는 바이어와 소비자 모두에게 믿을 만하다는 입소문이 퍼져나갔다. 자연히 매출액은 급속히 올라갔다. 외국 유명 악기회사의 직거래를 통해 중간마진을 없앤 덕분에 코스모스악기와 거래하려는 대리점 수 또한 나날이 늘어갔다. 특히 파이프오르간이나 전자오르간 종류인 신시사이저 등의 고가 제품과 전문가용 악기 시장은 코스모스악기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무섭게 성장하던 코스모스악기에 급제동이 걸렸다. 2000년, 코스모스가 20년간 독점 공급하던 야마하가 갑자기 국내 직접 판매에 나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야마하 플루트나 다른 관악기를 연간 3만대씩 팔았어요. 국내에 야마하라는 브랜드 이미지나 명성을 심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우리로서는 참…. 사실 코스모스악기 매출 반 이상이 야마하였는데 반토막도 안 됐어요. 연간 350억원 정도 하던 때였는데. 남들이 코스모스는 다 끝났다고 했어요. 실제 해외 바이어에게까지 소문이 돌아 물건을 공급받는 데 더욱 힘들었죠. 하지만 저는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난 이상 그를 능가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게 시급했죠. 또 야마하가 한국시장에 직접 들어와 타격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동안 몰랐던 좋은 분야를 개척해 더 크게 신장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후 코스모스악기는 2002년 1월, 일본 명품 피아노 브랜드인 가와이와 한국대리점 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 세계적인 악기업계 전문지 <Music Trade>가 선정한 200대 세계 유명악기 제조 판매사 40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다시 2007년 7월, 세계 최고의 미국 핸드메이드 피아노 브랜드인 스타인웨이와 한국대리점을 계약했다. 이외 바흐, 야나기사와, 롤랜드 등 100여개 유명 악기 제조업체의 한국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1만2000여종의 악기 및 부품을 수입·공급한다. 시장 점유율은 국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제외하고 모든 악기의 30~40%. 지난해 매출액은 455억원으로 코스모스악기는 어려웠던 시절을 차차 극복해냈다.

-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하프 옆에 선 민명술 회장. 코스모스악기사는 국내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 악기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하프 옆에 선 민명술 회장. 코스모스악기사는 국내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 악기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악기 3000대 파손하며 연구 끝에 자체 브랜드 론칭

요즘은 주변에서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민 회장은 그 속에서도 트렌드를 찾는다. 



“요즘은 아코디언이 인기예요. 어느 문화강좌에도 아코디언 교실이 빠지질 않죠. 유럽에서는 아코디언이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데 직접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유명한 아코디언 연주자를 초청해 연주회도 열고 있고요.”



이처럼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악기를 들여오는 게 관건이다. 이는 라이프스타일, 체형, 음악, 부품 하나까지도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다.   



“오보에 등 수요가 적은 악기는 기본적으로 주문생산 체제이므로 회사에 한국인의 체격과 취향에 맞도록 제작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좀더 대중적인 악기들은 그러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우리처럼 대량 구입하는 회사는 외국사에 한국인에 맞게 만들어 달라고 당당히 주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은 가와이 피아노라도 일본에서 팔리는 것과 우리나라 판매용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악기 시장이 쇠퇴하고 있어 민 회장의 한숨이 깊다. 한국 역시 1970년대에는 50군데가 넘는 악기 공장이 있었고, 수출도 세계 2위였다. 기타 수출은 1위를 할 만큼 잘 나갔지만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최근 코스모스악기는 경기침체를 탈피할 돌파구로 ‘킹스톤(Kingstone)’이라는 자체 브랜드를 론칭했다. 킹스톤은 플루트·피콜로·클라리넷·색소폰·트럼펫·트롬본·혼·튜바 등 관악기 전제품을 비롯해 기타와 아코디언 등 거의 모든 악기를 망라한 종합악기브랜드다. 코스모스악기가 지난 2006년 공개해 좋은 반응을 얻었던 또 다른 자사 브랜드 ‘C.Steinbach’와 같이 품질 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시중에 공급된다는 소문에 출시 전부터 화제가 되기도 했다.



“40년간 이 분야에 몸담으며 언제나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10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각고의 노력을 거쳐 비로소 킹스톤이 태어났습니다.”



킹스톤 전제품의 설계는 외국전문 기술진의 자문과 감수를 거쳤다. 세계 유명 브랜드 악기와 동일한 패드 및 부품들을 사용했다. 품질관리는 40년 역사를 가진 코스모스가 책임진다.



“킹스톤을 만들어내기까지 3000대가 넘는 악기를 파손해야 했습니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가격 대비 최고의 품질이라 자부합니다. 킹스톤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나갈 겁니다.”

- 민명술 회장이 코스모스악기 창립 4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킹스톤’ 색소폰을 들고 있다. ‘대장간에 식칼이 녹슨다’는 말처럼 민 회장이 직접 연주하는 악기는 없다.
- 민명술 회장이 코스모스악기 창립 4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킹스톤’ 색소폰을 들고 있다. ‘대장간에 식칼이 녹슨다’는 말처럼 민 회장이 직접 연주하는 악기는 없다.

▒ 민명술 회장은…

1940년 전남 해남 출생. 1958년 수도피아노 영업부에 근무하면서 목포지점 판매과장, 목포지점장, 부산지점장을 거쳐 본사에서 근무했다. 1972년 코스모스악기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