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쿠하세요~, 쿠쿠!’라는 광고 카피는 수많은 광고의 범람 속에서도 우리 국민 뇌리 깊숙이 각인됐다. 독특한 어휘와 정겨운 음률의 CM송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우리나라의 웬만한 가정에서는 모두 그 제품을 써봤기 때문일 것이다. 쿠쿠는 국내 전기밥솥 시장점유율 1위의 절대강자다. 그런데 쿠쿠를 만드는 쿠쿠전자는 경상남도 양산시의 한적한 외곽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국내 1위 브랜드를 만들어낸 쿠쿠전자는 경남의 자랑스런 향토기업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1998년 4월1일. 국내 전기압력밥솥 시장에 ‘쿠쿠(CUCKOO)’라는 낯선 브랜드가 처음 출현한 날이다. 그 해 11월 쿠쿠는 TV광고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광고는 이례적이고 파격적이었다. 남성모델을 썼기 때문이다. 그 모델은 방송인 이상벽씨. 당시 여러 TV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약하던 이씨는 친숙도와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신뢰감을 주는 것도 남다른 장점이었다.

과거 밥솥 광고는 거의 100% 여성모델의 몫이었다. 하지만 쿠쿠는 관행과 통념을 뒤집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기존 시장을 뒤흔들겠다는 당찬 도전정신과 품질 및 가격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이 바탕이었다. 쿠쿠의 광고전략은 적중했다. 광고를 접한 주부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의 어두운 터널 깊숙이 들어가 있던 시기다. 소비자들은 합리적인 가격과 뛰어난 품질의 쿠쿠 밥솥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쿠쿠는 1999년 7월 국내 전기밥솥 시장 1위에 올랐다. 출시된 지 불과 1년3개월 만의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쟁쟁한 가전 대기업들을 단숨에 제치고 정상을 밟았다는 사실이다. 이 무서운 ‘루키(Rookie)’의 대도약을 지켜보던 기존 가전업체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구본학 쿠쿠전자 대표, 쿠쿠전자 매장 내부 전경(오른쪽)
구본학 쿠쿠전자 대표, 쿠쿠전자 매장 내부 전경(오른쪽)

독자 브랜드 출시 1년여 만에 시장 1위
쿠쿠전자는 1978년 설립됐다. 새해 창사 35주년을 맞는다. 반세기 기업의 7부 능선에 도달한 셈이다. 창립 당시 회사명은 성광전자였다. 성광전자의 첫 걸음은 가전 대기업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제품을 공급하는 사업이었다.

우리나라에 전기밥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하지만 밥을 따뜻하게 보관하는 보온밥통 기능밖에 없었다. 밥을 짓는 기능이 장착된 실질적 전기밥솥이 출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전기밥솥의 편리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시장도 급격하게 커졌다. 그러자 대기업들을 비롯해 20여개의 중견, 중소업체가 잇달아 출사표를 던지면서 전기밥솥 시장은 뜨거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요즘 말로 ‘레드오션’이 펼쳐진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레드오션이라도 고유의 필살기만 갖추고 있으면 충분히 제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법이다. 당시 막 창업에 나선 서른일곱 살의 구자신 사장(현 회장)은 공장 한쪽 벽면에 ‘최고의 품질로 사회에 봉사한다’는 글귀를 내걸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후 그 글귀는 구자신 창업주의 경영이념이자 쿠쿠전자의 사시(社是)로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성광전자는 구자신 사장의 진두지휘 아래 1980~1990년대 급성장을 거듭했다. 국내 대기업은 물론 글로벌 가전업체에도 제품을 공급했다. 물론 뛰어난 품질 및 가격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정현교 쿠쿠전자 마케팅팀 수석부장은 “1980년대 성광전자 시절에는 거의 매년 2배씩 매출이 증가할 만큼 엄청난 성장세를 기록했다. 그 시기에 오늘날 쿠쿠전자의 토대를 확고하게 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쿠쿠전자가 탄탄대로만을 달려온 것은 물론 아니다. 성광전자 시절이던 1998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창사 이래 가장 힘든 상황에 처한 적도 있다. 주요 고객사들의 밥솥 매출이 급감하면서 주문량도 반토막 났다. 자연히 성광전자의 매출도 동반 추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핵심 고객사가 경기가 어려워 더 이상 납품을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다. 가능하면 자력으로 생산물량을 팔아보라는 조언(?)까지 들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상승일로를 달려왔던 구자신 사장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고통스런 번민의 나날이 이어졌다. ‘돈은 벌 만큼 벌어봤다. 이쯤에서 사업을 접을까…? 아니야! 지금까지 쌓아 올린 기술력과 한 식구 같은 직원들은 어떻게 하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몇몇 임직원이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다들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사장님, 살아도 함께 살고 망해도 함께 망합시다.” “월급을 삭감하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임직원이 고통분담을 하며 IMF 터널을 정면돌파하기로 결의했다. 구자신 사장은 또 다른 중대 결정을 내렸다. 1993년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자체 개발에 성공한 전기압력밥솥을 독자 브랜드로 출시하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대기업을 비롯한 경쟁사들이 외환위기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때 기선제압의 ‘펀치’를 날리면 일거에 시장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쿠쿠’가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울러 구자신 사장의 전략적 판단은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졌다.

쿠쿠 브랜드로 처음 출시됐던 전기압력밥솥 제품
쿠쿠 브랜드로 처음 출시됐던 전기압력밥솥 제품

IMF 외환위기를 욱일승천의 반전 기회로
쿠쿠라는 브랜드는 요리(Cook)와 뻐꾸기(Cuckoo)의 합성어다. 뻐꾸기시계만큼 정확하게 요리해내는 뛰어난 제품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담은 브랜드다. 아울러 전기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을 때 증기가 배출되는 소리와도 비슷하다. 맛있는 밥을 자연스레 연상케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쿠쿠 밥솥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대박을 터뜨리며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쿠쿠라는 브랜드가 국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구자신 사장은 2002년 회사명 자체를 쿠쿠전자로 바꾸기에 이른다.

현재 쿠쿠전자는 국내 밥솥 시장에서 73%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압도적인 1위다. 쿠쿠전자가 시장의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 고객 최우선주의 철학이 가장 큰 밑바탕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창룡 쿠쿠전자 기술연구소장은 “쿠쿠전자는 ‘고객의 소리는 항상 옳다’는 마인드로 일한다. 특히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한 고객 의견을 반영해 실제 제품 개발로 이어진 경우도 많다.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술혁신은 쿠쿠전자가 가장 중요시하는 경영방침”이라고 말했다.

쿠쿠전자는 80여명의 전문인력으로 이뤄진 기술연구소와 최고경영자(CEO) 직속의 품질혁신팀을 운영하는 등 기술 및 품질 중시의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언제나 쿠쿠 브랜드 제품을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이다. 명실상부한 밥솥 업계 1위에 오른 후에도 연구·개발(R&D)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쿠쿠전자는 매출액의 7% 이상은 꾸준히 R&D에 투자한다.

전기압력밥솥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밥맛’이다. 아울러 제품 안정성을 담보하는 기술력도 필수적이다. 쿠쿠 제품은 단 한번의 사고도 없었다. 그런 제품 안정성은 바로 고객 최우선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술혁신의 산물이다.

그러다 보니 쿠쿠전자는 국내 밥솥 업계에서 ‘최초’ 기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뚜껑 전체를 완전히 스테인리스로 만들어 세척·관리가 편하고 처음 밥맛을 오래 유지시켜주는 ‘풀 스텐 분리형 커버’, 밀폐력을 혁신적으로 개선해 좋은 밥맛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이중모션 패킹’, 섬세한 열제어 기술과 압력제어 기술로 최상의 밥맛을 선사하는 ‘스마트 알고리즘’ 등이 쿠쿠전자가 선구적으로 개발·적용한 혁신기술들이다.

또 세계 최초로 음성안내 기능을 채택하는가 하면 증기 배출 소음에 주부들이 놀라는 것을 방지하는 ‘2중 소프트 스팀캡’도 처음 개발해 적용했다. 이런 혁신기술들은 항상 고객의 의견을 제품 및 서비스에 반영하는 쿠쿠전자 고유의 경영철학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이창룡 소장의 말이다.

“사장님(구본학 대표이사)은 ‘우리가 힘들수록 고객은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하세요. 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신 회장님도 늘 회사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고객 의견을 지켜보다가 제품개발이나 서비스에 반영할 것을 지시하세요. 그게 밥솥 업계 1위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는 뜻에서죠.”

쿠쿠전자 서울사무소 사옥(위) 쿠쿠 정수기, 쿠쿠 에어워셔, 쿠쿠 전기그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쿠쿠전자 서울사무소 사옥(위) 쿠쿠 정수기, 쿠쿠 에어워셔, 쿠쿠 전기그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우리가 힘들수록 고객은 행복하다”
쿠쿠전자는 2011년 기준 매출 4100억원을 달성했다. 지난 10년간 연 평균 8%의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기압력밥솥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도 적극 개척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수출 지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영국, 베트남 등 35개국에 걸쳐 있다.

특히 베트남 시장에서는 글로벌 밥솥 명가로 통했던 일본 기업들의 제품보다 더 고급 브랜드로 각인되면서 명품 밥솥 대접을 받고 있다. 또 중국 시장에서도 500여개 매장을 운영하면서 중국인들의 입맛을 점점 사로잡고 있다.

쿠쿠전자는 철저한 현지화 마케팅 전략을 토대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현지인들의 입맛을 제품개발 단계부터 반영하는 것은 기본이다. 가령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안남미(점성이 약해 잘 흩어지는 쌀)를 주로 먹는 지역에서는 밥알이 상대적으로 덜 뭉치게 하는 기능을 적용한다. 또 쌀을 주식으로 하지 않는 유럽 등지에서는 밥솥이 아닌 압력조리기로 시장 포지셔닝을 하면서 호응을 얻고 있다. 정현교 부장의 설명이다.

“현재 쿠쿠전자의 국내 매출과 해외 매출 비중은 약 9대1입니다. 언뜻 해외 매출 비중이 작아 보이지만 최근 연 평균 30%씩 급성장하고 있는 추세예요. 거의 10년 동안 해외시장 공략을 위해 기울인 노력이 이제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이죠. 유럽에서는 쿠쿠 제품이 6개 국어 음성안내 기능을 장착한 ‘만능조리기’로 인기가 높습니다.”

쿠쿠전자는 2010년 정수기 사업에 진출했다. 본격적인 종합생활가전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야심찬 발걸음이다. 정수기 사업 진출은 구본학 대표의 경영철학과 맞닿아 있다. 지난 30여년간 좋은 밥맛으로 고객 건강에 기여한다는 사명을 실천해왔듯이, 이제 건강의 또 다른 필수요소인 물로써 고객 건강증진에 앞장서자는 게 구본학 대표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쿠쿠전자는 정수기 출시 1년 만에 10만대 이상 판매하며 단숨에 업계 2위로 올라서는 성공을 거뒀다. 2012년에는 누적 판매 40만대(추정) 달성에 근접했다. 정수기 시장에서도 쿠쿠 신화를 재현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또 2012년에는 비데 시장에도 출사표를 던졌다. ‘맛있는 밥’과 ‘건강한 물’에 이어 ‘청결한 생활’로 제품 라인업을 확대한 것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강생활가전기업’을 지향한다는 게 쿠쿠전자의 새로운 비전이다. 

Tip | 쿠쿠전자 사회공헌 활동

협력업체 금융지원 ‘상생펀드’ 조성

쿠쿠전자는 2012년 부산은행과 손잡고 100억원 규모의 ‘상생펀드’를 조성했다. 쿠쿠전자 협력업체들에 대한 공동 금융지원을 통한 동반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취지다. 부산·경남권에서 중견 향토기업이 지역은행과 상생펀드를 조성해 협력업체를 지원하는 것은 두 회사의 사례가 처음이다. 상생펀드는 협력업체의 대출 및 이자감면 재원으로 활용되는데, 금리감면 폭은 2%포인트다. 또 쿠쿠전자는 2007년 부산·경남지역 제조업체 중 최초로 기업 부설 사회복지재단인 쿠쿠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구자신 회장이 직접 재단 이사장을 맡아 쿠쿠전자 사회공헌 활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Tip | 구자신 회장의 창업 계기

정치인 꿈꾸다 ‘경제보국’으로 방향 선회

쿠쿠전자 창업주인 구자신 회장은 원래 정치인을 꿈꾸던 청년이었다. 고교 시절 4·19혁명의 소용돌이를 접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면 정치가 바로 서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 꿈을 키워나가던 그는 대학(고려대) 시절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정치의 꿈을 접었다. 우연한 기회에 당시 정계 실력자였던 한 현직 국회의원의 비서로 일하게 되면서 현실정치의 어두운 이면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방향을 선회했다. 정치보다는 경제활동이 나라를 일으키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기업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