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청 경제산업국에 전화를 걸었다. “전라남도에 본사를 둔 기업 중에 역사도 깊고 지역사회 기여도도 높은 대표적인 향토기업을 좀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경제정책 담당 관계자는 망설임 없이 답변했다. “그런 기업이라면 목포에 있는 행남사(행남자기)를 첫 번째로 꼽을 수 있죠.” 행남자기에 대한 취재는 그렇게 시작됐다. 행남자기는 국민 모두에게 친숙한 생활자기 전문업체다. 하지만 행남자기가 전남 목포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물론 목포시민들은 누구나 자랑스러워하는 기업이지만 말이다.
1. 행남자기와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들어진 제품 2. 명품도자기 브랜드 로얄코펜하겐의 수석디자이너를 지낸 한스 한센과 공동작업으로 탄생한 제품 3. 유럽의 명품디자이너 리케 제이콥슨과 디자인 협업을 통해 만든 제품

행남자기는 올해 창사 70주년을 맞았다. 100년 기업으로 가는 7부 능선에 도달한 셈이다. 국내에서 이만한 역사를 갖고 있는 기업들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지방 중소도시에 위치한 기업이 한국 생활자기 산업을 이끌어가는 대표주자로 성장했다는 점도 의미가 남다르다.

현재 행남자기는 한국도자기와 함께 국내 생활자기 산업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두 회사는 전체 생활자기 시장의 약 5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시장점유율에서도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의 시장은 수입품과 군소업체 제품의 몫이다.

1942년 5월16일 전남 목포시 산정동에 위치한 행남사(행남자기의 설립 당시 회사명). 도자기를 굽는 가마에 처음 불이 지펴졌다. 행남자기 70년 역사의 첫 걸음을 뗀 순간이다. 도자기업계에서는 통상적으로 가마에 불을 댕기는 화입식(火入式)을 치른 날을 창립일로 삼는다. 행남사의 법인 설립은 이미 1941년에 이뤄진 터였다.

행남자기가 출범한 194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수탈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국민들이 식기로 사용하는 놋그릇까지 몽땅 군수물자로 공출해갔다. 생활상이 얼마나 피폐해졌을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행남자기 여주공장 전경. 여주 본차이나 공장의 가마에서 도자기가 구워지고 있다(오른쪽).
행남자기 여주공장 전경. 여주 본차이나 공장의 가마에서 도자기가 구워지고 있다(오른쪽).

한국 최초의 현대식 도자기업체

고 김창훈 행남자기 창업주는 당시 남선합동전기회사(오늘날 한국전력에 해당) 목포지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애자(碍子: 전선 등 전기도체의 절연 및 지지를 위해 사용하는 절연체. 경질 자기가 주재료) 구매를 위해 일본에 자주 드나들다 고급 도자기를 접하고는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 ‘우리 민족의 식기는 우리 손으로 만들자’는 결심에 따라 행남사를 설립했다.

고 김창훈 창업주는 당시 경제활동에 일찍 눈을 뜬 장남(고 김준형 행남자기 2대 회장)과 함께 힘을 모아 회사를 일으켰다. 특히 고 김준형 2대 회장은 직접 일본에 건너가 도자기 제조기술을 배워오는 등 열정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부자(父子)가 사실상 공동 창업자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행남자기라는 회사명도 고 김창훈 창업주의 호 행원(杏院)과 고 김준형 2대 회장의 호 남강(南岡)의 앞 글자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행남자기는 명실상부한 한국 도자기산업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로 평가된다. 국내 최초의 현대식 도자기 제조업체가 바로 행남자기다. 그러다 보니 각종 최초 기록도 여럿 보유하고 있다. 1957년 국내 최초 본차이나(Bone china: 골회자기) 제조기술 개발, 1963년 국내 최초 도자기 수출, 1985년 국내 최초 도자기 플랜트 및 기술용역 수출 등이 한국 도자기산업 역사에 행남자기가 남긴 자랑스러운 발자취들이다.

특히 행남자기의 본차이나 제조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선구적이었다. 국내 도자기업체들의 본차이나 제조가 1980년대에 와서야 활발해진 점을 감안하면 행남자기가 얼마나 앞서나갔는지를 쉽사리 알 수 있다.

본차이나는 동물의 뼈를 태워 재로 만든 ‘본애쉬(Bone Ash)’와 도석, 장석, 고령토 등 도자기의 원료물질을 섞어 제조하는 도자기다. 현존하는 식기용 도자기 중에서는 세계 최고급으로 평가된다. 본차이나의 최초 발상지는 영국인데, 유럽의 도자기업체들이 왕실 전용식기로 만들면서 발전해왔다.

김형주 행남자기 전무는 “좋은 품질의 본차이나는 얇고 가벼우면서도 단단하다. 또 우아한 백색의 기품 있는 색상이 특징이다. 빛을 투과시키는 투광성도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본애쉬 함유율이 30% 이상이면 본차이나로 분류하는데, 행남자기는 그 비율이 50%다. 행남자기의 본차이나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행남자기 창업 당시 목포시 산정동에 위치했던 공장 전경. 고 김준형 행남자기 2대 회장이 생전에 직원들과 어울린 모습(아래).
행남자기 창업 당시 목포시 산정동에 위치했던 공장 전경. 고 김준형 행남자기 2대 회장이 생전에 직원들과 어울린 모습(아래).


현재 행남자기는 경기 여주공장에서 본차이나를 생산하고 있다. 여주 본차이나 전용공장은 2002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했다. 월 최대 생산량은 100만피스(Piece)에 달한다. 단일 본차이나 제조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설명이다.

여주공장은 본차이나 제조공정에서 품질관리를 위해 무려 103가지의 체크포인트를 두고 있다. 또 3차례의 전수검사를 통해 불량품을 골라낸다. 또한 불량품은 모두 깨뜨려 아예 사용할 수 없도록 처분한다. 마치 도자기 장인(匠人)들이 본인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제품들을 주저 없이 깨뜨리는 것과 같다. 최신 설비를 갖춘 공장이지만 도자기 제조에 임하는 태도는 말 그대로 ‘장인정신’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행남자기는 창사 이래 ‘협심동력(協心同力)’을 사훈으로 삼아왔다. 특히 고 김준형 2대 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직원들과 똑같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작업도 함께하고 숙식도 함께했다. 또 경영자라는 위치를 떠나 직원들과 호형호제하는 가족적인 회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런 속에서 자연스레 다 함께 잘 살아보자는 협심동력의 기업문화가 우러나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행남자기는 창사 이래 단 한번도 노사분규를 겪은 적이 없다. 노동조합은 회사 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품질 개선, 낭비요소 제거 등 혁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측은 아무리 경영환경이 어려워도 고용유지에 최선을 다한다. 노사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는 전통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생의 노사문화를 높이 평가받아 지난 2010년 노사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더욱이 노동조합 설립을 오너 경영자가 먼저 제안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이례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 김준형 2대 회장은 1962년 목포항만노조 관계자를 회사로 초청해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직원들을 일깨워 노조 설립을 도왔다고 한다.

김형주 전무는 “고 김준형 회장은 직원 복지에 세심한 신경을 썼던 분이다.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을 겪을 때 임금 외에도 쌀을 나눠줬고 정부의 벌목 금지로 연료난이 심각할 때는 도자기 가마 연료인 코크스를 배급하기도 했다. 노조 설립을 독려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다. 회사가 크려면 노사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데, 사측이 잘못을 할 수도 있으니 (견제를 위해) 노조 설립을 권유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행남자기는 현재 3대 경영자인 김용주 회장과 4대 경영자인 김유석 사장이 이끌고 있다. 이들도 선대 경영자들이 뿌리내린 ‘협심동력’의 기업문화를 고스란히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특히 직원들의 고용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특유의 경영철학은 각박한 세태에 더욱 빛을 발한다.

행남자기 서울사무소의 직영 판매점에 들른 고객들이 제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행남자기 서울사무소의 직영 판매점에 들른 고객들이 제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목포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해온 70년

행남자기의 계열사 행남식품이 단적인 사례다. 이 회사는 순전히 직원들의 일자리 제공을 위해 만들어졌다. 행남자기는 2002년 경기 여주에 본차이나 공장을 세우면서 상당 부분의 생산시설과 인력을 이전했다. 그런데 경영자원 재배치 과정에서 60여명의 잉여인력이 발생했다. 이런 경우가 생기면 대부분 기업은 쉽사리 구조조정 카드를 내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용주 회장은 60여명의 직원들에게 일터를 마련해주기 위해 행남식품을 설립하는 특별한 용단을 내렸다.

행남자기와 목포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행남자기는 1980년대 목포 지역에만 5개 공장을 가동하며 2500여명의 일자리를 창출한 적이 있다. 목포시 인구가 적다 보니 10가구 중 1가구 꼴로 가족 중 한 명은 행남자기 직원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게다가 목포시를 대표하는 유력 향토기업 중 거의 유일하게 둥지를 떠나지 않은 기업이 행남자기다.

자연히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도 많이 했다. 특히 고 김준형 2대 회장은 목포항 개항 100주년을 맞아 지역발전을 위해 설립된 민간단체 ‘목포백년회’를 주도했는가 하면, ‘유달산 공원화 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사재출연을 하는 등 유달산을 목포의 명승지로 거듭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최근 행남자기 경영진은 한 가지 중대결단을 내린 바 있다. 본사 및 공장의 여주 이전 검토를 철회하고 목포 잔류를 결정한 것이다. 당초 행남자기는 현재 본사가 위치한 상동 공장 노후화 등으로 경영합리화 차원에서 여주로의 본사 이전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하지만 목포시청의 강력한 잔류 요청을 받아들여 목포시 연산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김형주 전무는 “기업 경영 차원에서 보면 본사가 지방에 있는 건 불편하다. 또 공장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보다 한곳에 모여 있는 게 효율적이다. 하지만 본사를 옮기면 70년간 목포의 대표 향토기업으로 자리매김해온 역사와 전통이 물거품이 된다는 판단 아래 여주 이전 계획을 철회하는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행남자기는 2015년까지 ‘글로벌 톱3 명품도자기 브랜드’로 성장한다는 원대한 비전을 갖고 있다. 지난해 해외 수출용 독자 브랜드 ‘트리니체’를 선보인 것은 세계적인 명품도자기 기업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다. 트리니체는 ‘흙과 불의 예술’인 도자기에 행남자기 고유의 ‘장인정신’을 더해 삼위일체를 이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트리니체는 2011년 브라질 상파울루 소비재 박람회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유럽의 생활용 식기 시장과 북미의 호텔 및 영업용 식기 시장에서 점차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도자기 제조기술과 품질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행남자기가 브랜드파워 면에서도 세계적 명품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Tip | 세계로 뻗어가는 행남자기

50여개국에 연간 약 4000만달러 규모 수출

행남자기는 국내 및 해외에 4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연간 약 4000만달러 규모의 도자기 제품을 5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도자기 기업이다. 독자 브랜드 수출 외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및 제조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세계적인 명품업체의 브랜드를 달고 수출되는 물량도 많다. 영국 로얄알버트, 일본 노리다케, 미국 레녹스, 이탈리아 리처드지노리 등이 그런 브랜드들이다.

행남자기는 창사 이래 70년 동안 도자기라는 한 우물만 파왔다. 1963년 국내 최초의 도자기 수출(홍콩)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는 선진국에서 가정용 식기로 인기가 높았던 ‘스톤웨어’를 앞세워 북미시장에 디너세트를 공급했다.

세계 수준의 품질을 갖추기 위해 기술연구소를 설립, 품질관리와 기술혁신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980년대에는 베네수엘라에 도자기 플랜트 및 기술 수출을 통해 제품뿐만 아니라 도자기 설비와 기계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인도네시아에 합작법인 ‘행남 세자트라 인도네시아’ 공장을 완공했다. 행남 세자트라 공장은 동남아시아와 북미 지역의 중저가 도자기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수출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Tip | 행남자기의 디자인경영 

‘콜라보레이션’ 통해 예술적 감성 담아

행남자기는 국내 및 해외에 4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연간 약 4000만달러 규모의 도자기 제품을 5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도자기 기업이다. 독자 브랜드 수출 외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및 제조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세계적인 명품업체의 브랜드를 달고 수출되는 물량도 많다. 영국 로얄알버트, 일본 노리다케, 미국 레녹스, 이탈리아 리처드지노리 등이 그런 브랜드들이다.

행남자기는 창사 이래 70년 동안 도자기라는 한 우물만 파왔다. 1963년 국내 최초의 도자기 수출(홍콩)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는 선진국에서 가정용 식기로 인기가 높았던 ‘스톤웨어’를 앞세워 북미시장에 디너세트를 공급했다. 세계 수준의 품질을 갖추기 위해 기술연구소를 설립, 품질관리와 기술혁신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980년대에는 베네수엘라에 도자기 플랜트 및 기술 수출을 통해 제품뿐만 아니라 도자기 설비와 기계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인도네시아에 합작법인 ‘행남 세자트라 인도네시아’ 공장을 완공했다. 행남 세자트라 공장은 동남아시아와 북미 지역의 중저가 도자기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수출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