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는 현재 2000만종의 생물이 살고 있지만 생태계 파괴로 매년 3만여종이 멸종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만 매년 200종씩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생물의 종자를 누가 더 많이 확보하고 개발하느냐를 놓고 세계 각국이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농촌유전자원센터는 식물종자 17만여점 등 30만점이 넘는 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연구원들이 중기 저장고에 보관된 종자를 살펴보고 있다.
농촌유전자원센터는 식물종자 17만여점 등 30만점이 넘는 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연구원들이 중기 저장고에 보관된 종자를 살펴보고 있다.

경기 수원시 서둔동에 있는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는 종자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2006년 건립된 농업유전자원센터는 지하 1층·지상 3층, 연면적 9507㎡ 규모로 리히터규모 5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으며, 농업 유전자원 50만점을 보존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유전자원의 입·출고를 로봇이 담당하는 첨단 시설이다. 종자의 안전한 보존을 위한 중·장기 저장고, 종자의 표본을 농업인이나 연구진이 쉽게 살펴볼 수 있는 표본실, 영하 196도로 운영되는 초저온 저장시설과 DNA 조직은행, 동결건조 보존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센터는 현재 식물종자 1777종 17만3217점과 뿌리로 번식하는 식물 영양체 996종 2만8027점, 미생물 4858종 2만554점 등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다 동물의 생식세포 35종 8만5800여점과 곤충 14종 361점 등 모두 7680종 30만7973점의 유전자원이 저장돼 있다. ‘종자전쟁의 군수기지’, ‘종자계의 한국은행’,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전자원 보유 규모로 보면 미국·중국·인도·러시아·일본에 이어 세계 6위 수준이다.

박홍재 농업유전자원센터 박사는 “국내외 농업 유전자원을 수집·증식·보존하고,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수 있도록 씨앗을 분양하는 것이 센터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외 종자 수집과 함께 해외로 유출된 우리 토종 종자를 찾는 작업도 센터의 중요한 일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국외로 유출된 우리 토종자원은 1만점이 넘는다. 이러한 토종자원의 반환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서다.

미국 농무부 농업연구청이 보유하고 있던 한반도 원산의 농업 유전자원 6000여점 중 콩과 마늘, 양파 등 34종 1679점이 반환된 것은 2007년이다. 이후 일본, 러시아, 독일과도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밀·보리·콩 등 196종 2743점의 종자를 돌려받았다. 되찾은 유전자원은 우리 환경에 잘 적응하는 신품종 육성 등의 소중한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센터는 종자를 확보하기 위해 우수한 해외 유전자원도 도입하고 있다. 우수한 식물 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종자 보존이나 연구 능력이 부족한 국가와의 협력 사업을 통해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아열대나 열대작물과 함께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바이오 에너지 작물 등이 주요 수집 대상이다.

박홍재 박사는 “고려시대의 문익점처럼 몰래 종자를 가져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하다”며 “개도국 등과의 다양한 협력사업 등을 통해 미래 유전자원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외에서 수집된 유전자원을 후손에게 안전하게 전달하는 것이 센터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새로 수집됐거나 증식된 종자는 보존을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친다. 먼저 자원준비실을 통해 해당 종자의 정보가 전산화된다. 종자의 형태와 색 등 기본 형질 분석 등을 기반으로 사람의 주민등록과 같은 고유 번호가 부여된다.

정보처리가 완료된 종자는 4〜6주 동안 중·장기 보존에 적합하도록 건조된다. 일반 종자는 5〜7%, 기름기가 많은 유지종자는 3〜5% 정도의 수분을 지니게 된다.

신품종 개발을 위해 활용 빈도가 많은 종자는 중기 저장고에 보존된다. 이곳은 종자의 유전적 변이를 막고 기본적인 활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항상 영상 4도에 40%의 습도를 유지한다. 30년 정도는 문제없이 종자를 보존할 수 있다.

화훼품종의 육종을 연구 중인 농촌진흥청 연구원들.
화훼품종의 육종을 연구 중인 농촌진흥청 연구원들.

로열티 유출 막아야
영하 18도의 온도를 유지하는 장기 저장고에는 각종 천재지변에 대비하기 위해 중기 저장고와 똑같은 종자가 중복 보존된다. 100년간 보존이 가능하다. 장기 저장고에 보관하는 씨앗은 5년마다 발아시험을 거친다. 한 번 소멸되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센터는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원을 농진청 산하 국립농업과학원이나 식량과학원, 원예특작과학원은 물론 전국의 대학과 연구소, 민간기업 등에 분양한다. 매년 3000점 이상의 종자가 연구용으로 분양되고 있다. 이렇게 분양된 유전자원은 새로운 품종으로 변신하게 된다.

박홍재 박사는 “다양한 농업 유전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경쟁은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며 “센터는 안전한 농업자원 보존과 활용을 통해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종자시장은 430억달러 규모다. 이 시장을 몬산토(미국), 신젠타(스위스), 리마크레인(프랑스), 사카다(일본) 등 10대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74%에 달한다.

세계 최대 종자기업인 몬산토가 한 해 종자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5조원에 이른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팔아 거두는 이익(4조원대)을 넘어서는 수치다. 종자산업이 농업의 반도체로 불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만큼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얘기다.

국내 시장 규모는 전 세계 시장의 1.9%인 8억달러로, 세계 8위 수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종자 수출액은 3000만달러로 세계 33위다. 최대 종자 수출국은 네덜란드로 연간 수출액이 13억달러에 달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외국 기업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절반에 가깝다는 점이다. 청양고추, 금싸라기참외 등의 종자 소유권은 외국 기업이 가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흥농종묘 등 국내 종자업체들이 외국종자회사에 넘어가면서 종자주권도 무너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양파나 당근, 토마토는 80% 이상, 무·배추·고추 종자에 대한 소유권의 50% 정도를 외국기업이 가지고 있다. 과일과 화훼분야에서 외래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달한다. 국내 농산물 대부분이 외국 종자에 종속돼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우리 농가가 외국 기업에 내야 하는 로열티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화훼류, 채소, 과수, 특용작물의 로열티 지급액은 2001년 5억5000만원에서 2005년 120억원, 2009년 150억원을 돌파했으며, 2011년에는 172억원에 달했다. 10년 사이에 로열티 지급액이 30배 이상 뛴 것이다.

종자는 식량안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토종종자가 없으면 수입해야 하고, 수입 종자를 쓰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 만약 농업생산에 필요한 종자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기업이 종자 판매를 중단할 경우 식량 위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컬러 파프리카의 씨앗은 금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정부는 금보다 비싼 종자를 개발하는 ‘골든 시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컬러 파프리카의 씨앗은 금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정부는 금보다 비싼 종자를 개발하는 ‘골든 시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금보다 비싼 종자 개발에 총력
이 때문에 미국, 유럽 등 종자기술 선진국은 일찌감치 종자 수집과 신품종 개발에 주력해 왔다. 최근에는 첨단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해 활용영역을 다른 분야로까지 넓히고 있다.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우리나라도 뒤늦게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벼 등 식량작물 개발에만 주력했던 우리나라가 과수·화훼·특용작물 등 부가가치가 큰 비식량작물 개발에 나선 것은 불과 10여년 전부터다. 원예작물의 경우 2000년 이후부터 92.8%의 신품종이 집중적으로 육성됐으며, 특히 화훼류에서 개발된 품종이 많다.

농진청은 2006년 로열티 대응사업단을 설립해 딸기·장미를 시작으로 국화, 난, 참다래, 버섯 등의 국산품종 개발에 주력했다. 이를 통해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이들 6개 품목에서 352종의 신품종을 개발했으며, 163억원의 로열티를 절감한 것으로 추산된다. 로열티 지급 예상규모가 가장 컸던 딸기의 경우 2005년 10% 미만이었던 국산품종의 보급률이 지난해 75%까지 높아져 로열티 지급 문제를 거의 해소했다.

농진청은 국내 육성 품종의 확대를 위해 신품종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전해 왔다. 지난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533개 품종의 838건의 기술이 256개 업체에 이전됐다. 같은 기간 동안 89개 품종이 해외에 출원됐으며, 이 중 23개가 신품종으로 등록됐다. 

최근 종자주권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정부도 종자산업 육성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대표적인 사업으로 ‘골든 시드 프로젝트(Golden Seed project)’를 꼽을 수 있다. ‘금보다 비싼 종자’를 20개 이상 개발해 2020년 종자수출 2억달러를 달성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정부는 이를 위해 2021년까지 종자개발에 4911억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실제 컬러 파프리카 씨앗은 1g당 13만원 정도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파프리카 종자 1알에 700원 꼴이다.
장대수 농진청 농자재산업과장은 “종자산업은 자본과 시간 싸움이다. 한 개의 신품종을 개발하는 데는 10년이 넘는 연구기간과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종자산업의 경쟁력 없이는 농업의 경쟁력 향상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전문인력 양성과 연구 인프라 구축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