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5일 열린 아메리칸 프로풋볼 결승전인 슈퍼볼의 경기 중간에 방영된 미국 크라이슬러의 자동차 광고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광고에 등장한 81세의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은 다시 일어선다. 세계가 우리 엔진의 굉음을 듣게 될 것이다”고 말한다. 크라이슬러의 새로운 도약을 암시하는 메시지다. 크라이슬러가 부활의 시동을 걸고 있다. 2010년 6억5200만달러의 적자를 낸 크라이슬러는 지난해 1억83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는 15억달러 흑자를 낼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생산 목표량은 28만대로 늘려 잡았다. 크라이슬러코리아도 상승세다. 지난해 크라이슬러코리아는 전년 대비 25% 이상 성장했다. 이러한 실적 개선을 이끈 주인공이 지난해 6월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한 그렉 필립스 사장이다.

주한 미군 출신 ‘한국통’ CEO…

암 이겨내고 부활 시동 걸다

그렉 필립스 크라이슬러코리아 사장은 수입차 업체 CEO 중 대표적인 ‘한국통’으로 꼽힌다. 서울 역삼동 강남파이낸스센터 14층에 있는 33㎡(10평) 남짓의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누구도 그 말이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쪽 벽에는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신중현의 친필 사인이 적힌 사진이 걸려 있다. 1970년대 서울 용산 미 8군 클럽에서 신들린 듯 기타 치는 모습을 본 이후 그는 신중현의 열광적인 팬이 됐다. 그는 신중현을 한국 최고의 음악가라고 했다.

백선엽 장군과 맥아더 장군이 손을 맞잡은 그림도 있었다. 그는 백 장군을 ‘나의 영웅’이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으로 김치찌개를 꼽았고, 누구보다 맛있게 끓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는 웬만한 한국말은 알아듣지만 말하는 것은 서툴렀다. 필립스 사장은 자신을 ‘87% 한국인’이라고 부른다. 한국닛산 사장으로 있을 때 직원들이 ‘50% 한국인’이라고 부른 이후 점수가 차곡차곡 쌓여 87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필립스 사장은 군인 출신이다. 1972년 군에 입대, 1997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26년을 군에서 보냈다. 이 중 14년을 한국에서 근무했다. 서울올림픽 때는 경호업무까지 담당하기도 했다. 그가 ‘베스트 프렌드’로 부르는 아내 김민정씨도 주한미군 시절 만났다.

그의 가족사랑은 각별하다. 인터뷰 도중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내와 두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들 자랑을 하는 그를 직원들은 ‘아들바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가끔 닭살이 돋을 정도로 가족들과 각별하다고 자랑했다.

그가 군을 떠난 것은 사실 가족 때문이다. 1997년 미국으로 전출을 가야 하는 상황인데 아내가 대학원에 합격을 했다. 가족을 두고 혼자 가느냐, 아니면 가족과 같이 한국에 남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장군 진급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는 결국 가족을 택했다.

자동차 업계에 뛰어들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친구들과 골프를 치는데, 한 친구가 예편하면 뭘 할 거냐고 묻더군요. 그 친구가 자동차 딜러였는데, 나도 자동차 사업을 하겠다고 농담 삼아 얘기했죠. 제가 전역한 것을 전해들은 그 친구가 자리를 알아봐주더군요.”

‘한·미·일 ’ 자동차 회사에서 두루 경험

그는 1997년 대우자동차 미국법인 동남 8개주 영업 총괄매니저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2002년 혼다 아메리카 딜러 개발을 담당했고, 2003년에는 닛산 북미법인 총괄매니저를 역임했다.

2006년 한국닛산의 대표이사로 부임하며 한국에서 경영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국내 시장에 닛산과 프리미엄 브랜드인 인피니티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마케팅의 달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10년 르노삼성자동차의 영업·마케팅·서비스 총괄 부사장을 맡으며 역대 최대 판매 기록을 견인하는 등 마케팅과 세일즈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2011년은 그에게 가장 특별한 한해였다. 시련이 먼저다. “귀가 이상하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인 친구가 피부암이라고 하더군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 진단에 눈앞이 깜깜했어요. 다행히 정밀검사 후 귀만 수술하면 된다는 얘기를 듣고 안도했죠. 오른쪽 귀의 3분의 1을 떼어냈어요.”

그는 “이 때문에 ‘그렉 반 고흐’라는 별명이 붙었다”며 “지금은 떼어낸 자리에 인공귀를 붙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엿보였다. 그의 경영스타일도 낙천적이다. 서열을 따지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어울린다.

암을 이겨내면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그는 은퇴할까도 생각했지만 가족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가기로 했다. 마침 크라이슬러로부터 한국 시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그의 높은 이해와 한국에서의 오랜 경험을 높이 산 것이다.

다른 자동차업체뿐 아니라 다양한 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그는 크라이슬러 행을 결심했다. 크라이슬러 본사의 셀시오 마르치오네 회장의 열정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마르치오네 회장과 얘기하면서 크라이슬러의 비전에 깊이 공감했어요. 파산 위기에 몰린 크라이슬러를 피아트가 성공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죠. 본사 직원들의 열정도 감동적이었어요. 크라이슬러가 피아트 브랜드 론칭을 계획하는 등 한국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포드, GM과 함께 미국차의 ‘빅3’인 크라이슬러는 2009년 경영 위기로 파산 보호 신청을 냈고, 2009년 6월 이탈리아 피아트 그룹에 인수됐다. 크라이슬러는 피아트와의 관계를 ‘제휴’가 아닌 ‘의형제’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미국과 이탈리아의 우수한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이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긴밀히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다.

필립스 사장은 ‘가능한 한 빨리’ 피아트를 국내에 출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한국에 왔을 때 피아트 차들이 많아 놀랐어요. 당시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가 피아트를 만들어 판매했어요. 그런 점에서 피아트의 진출을 ‘귀향’이라고 봐야겠죠.”

그는 피아트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승인은 받았고, 이제 최고경영진의 결정만 남은 상태”라며 “최근 연비에 대한 관심과 높은 유가를 감안하면 피아트는 크라이슬러에 특별한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5000대 판매 목표

“조만간 국내에 도입되는 피아트는 소형차 시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모델은 피아트500이 될 겁니다. BMW의 미니 쿠퍼와 경쟁구도를 이루게 되는 거죠. 특히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구찌와 함께 제작한 500 구찌 에디션과 같은 다양한 합작품은 새로운 소형차 시장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올 들어 300C와 지프의 그랜드 체로키 오버랜드 등 새로운 모델을 연달아 출시하며 국내 수입차 시장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크라이슬러의 올해 판매 목표는 5000대. 전년 대비 50% 이상 증가한 수치다. 출발은 순조롭다. 지난 1월에만 전년 동월 대비 43% 성장한 368대를 판매했다. 지난 1월 출시된 300C 덕분이다. 300C가 덩치만 크고, 연비는 안 좋다는 미국차의 고정관념을 깨면서 판매증가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한국 수입차 소비자들의 트렌드가 과시형에서 실속형으로 변하면서 시장 구도가 바뀌고 있어요. 한때 일본 브랜드가 파워 트레인과 성능을 인정받아 많은 인기를 얻었다가, 최근에는 유럽 브랜드들이 섬세한 감각과 디자인을 바탕으로 인기를 끌고 있어요. 미국차도 더 이상 미국에서 만들어진 차가 아닙니다. 부품들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된 겁니다. 크라이슬러도 그런 면에서 글로벌 차라고 할 수 있어요. 300C는 동급 세단 가운데 연비가 가장 좋고 퍼포먼스와 편안함도 뛰어납니다. 여기에다 유럽의 유려한 디자인과 감성 품질을 갖추고 있지요.”

300C의 경우 편의성을 강조한 유저 인터페이스가 독특하다. 300C에는 동급의 유럽 세단에서 제공하지 않는 8.4인치 터치스크린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장착돼 있다. 특히 냉·온장 기능을 제공하는 컵 홀더에서는 운전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크라이슬러가 향후 선보이는 차량들이 국내 소비자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가 확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프(Jeep)에 대한 기대도 크다. 최근 다양한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프는 일제강점기 시대 처음 국내에 들어와 한국전쟁을 겪는 등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자동차다. 필립스 사장은 “자유와 모험을 상징하는 지프를 연계해 운전의 재미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국내 소비자들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애프터서비스(A/S)도 강화한다. 지난 1월에는 고객 만족도 향상과 전국 네트워크 강화를 위해 강원도 원주시에 공식 서비스센터를 오픈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 A/S프로세스팀을 만들었다. 부품 조달에서부터 기술자들의 교육에 이르는 A/S의 프로세스와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첫 구매는 전시장에서 이뤄지지만 2·3차 구매는 서비스에서 나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고객 한명 한명에게 신경을 더 많이 써야죠. 단순한 고객만족을 뛰어넘는 게 목표입니다.”

그는 크라이슬러 본사 차원에서 한국 시장의 잠재력과 성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현대기아차는 디자인과 기술 등에서 하나의 혁명을 만들었다고 극찬하고, 최고경영진이 정몽구 회장과 현대기아차를 주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소비자들은 까다롭고 기대치도 높습니다. 쉽게 만족하지 않고 세심한 면까지 신경을 쓰는 점도 특징이고요. 이러한 특징이 자동차 업체들의 품질 기준을 글로벌 수준으로 높였어요. 그 중심에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기아차가 있죠.”

필립스 사장은 “한국 수입차 시장이 강하게 성장하면서 새롭게 변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미국차의 특성에 세련되고 감각적인 디자인과 최첨단 안전·편의장치 등이 탑재된 신차를 지속적으로 출시해 한국 운전자들을 만족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차 가격이 점점 오르고, 수입차 가격이 떨어지면서 수입차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국내차와 수입차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거죠. 크라이슬러는 이러한 시장변화에 발맞춰 제품 라인업을 더욱 다양화해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힐 계획입니다. 독보적인 아메리칸 세단인 300C, 오프로드의 강자 랭글러, 도회적 색채의 그랜드 체로키 등을 통해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를 사로잡아 자동차 업계의 새로운 리더로 발돋움할 겁니다.”

▒ 그렉 필립스 사장은…

1955년 미국 뉴욕 출생. 1972~1997년 미 육군 대령 예편. 1997년 대우차 미국법인 동남8개주 영업 총괄매니저. 2002년 혼다 아메리카 딜러 개발 총괄. 2005년 닛산 북미법인 시카고 지역 총괄매니저. 2006년 한국닛산 대표. 2010년 르노삼성차 영업·마케팅·서비스 총괄 부사장. 2011년~현재 크라이슬러코리아 사장.

장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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