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다국적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자 가장 혁신적인 기업의 대명사로 꼽힌다. 세상 사람들은 GE 하면 흔히 잭 웰치 전 회장(1981~2001 재임)이나 GE의 모태인 에디슨제너럴일렉트릭(에디슨종합전기회사)의 설립자인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을 먼저 떠올린다. 웰치는 GE를 세계 최고 기업의 반열에 올리며 ‘경영의 달인’이라는 칭송을 받은 인물이며, 에디슨은 인류 문명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온 전구를 발명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왕’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업인들과 경영자들에게는 웰치와 에디슨 외에도 GE를 상징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현 CEO컨설팅그룹 회장)이다. 강 회장은 GE 역사상 최장수 CEO로 기록된 잭 웰치 회장과 찰떡 호흡을 과시한 경영 파트너였다. GE코리아 CEO 재임 기간도 잭 웰치 회장의 재임 기간과 거의 100% 겹친다. 강 회장은 웰치가 GE 회장에 취임할 무렵 GE코리아 사장에 임명됐고, 웰치가 퇴임한 이듬해에 GE코리아 회장에서 명예롭게 물러났다. 강 회장과 잭 웰치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또한 많은 영감과 열정을 나눈 ‘소울메이트(Soul Mate: 영혼이 통하는 친구)’다. 강 회장이 CEO로 재임한 기간 동안 GE코리아의 외형은 무려 200배 가까이 성장했다. GE코리아만 훌쩍 큰 것이 아니다. 그가 GE와 한국 경제의 상호협력 관계에 선구적 가교 역할을 하면서 국내 산업계도 고도화, 일류화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강 회장이 기획하고 실천한 GE코리아의 경영 모델은 GE 세계화(Globalization) 전략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잭 웰치는 1990년대 초반 GE의 세계화를 본격 추진할 무렵 “(세계화의) 해법은 더 많은 강석진이 필요하다는 것(The solution is we need more Jean Kang)”이라고 결론을 내리기까지 했다. 강 회장은 ‘화가 경영자’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취미 차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수준이 아니다. 그는 화단에서 ‘강석진 화풍’이라는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 프로화가다. 놀라운 것은 현직 경영자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30여년 전부터 붓을 들었다는 점이다. 경영과 예술, 두 분야에서 모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그는 “경영과 예술은 기본적인 정신과 자세가 똑같다”고 말한다. 열정, 창조, 프로정신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공통분모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코노미플러스>는 ‘강석진 회장의 CEO to CEO’ 코너 1주년을 맞아 강석진 회장 본인을 대담의 주인공으로 초대했다.
- 1985년 GE 경영회의 기간 중에 카리브해에서 동료들과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강석진 회장
- 1985년 GE 경영회의 기간 중에 카리브해에서 동료들과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강석진 회장

강석진 회장이 GE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금성사(현 LG전자)와 함께 국내 전자업계 수위를 다투던 대한전선에서 수출업무를 맡고 있었다. 강 회장은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국내 수출업계에서 젊고 유능한 인재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설경동 대한전선 회장(창업주)은 그런 그를 눈여겨보다가 간곡하게 요청해 수출업무 책임자로 발탁한 터였다.

그는 대한전선 합류 후 해외시장 개척의 선봉에 섰다. 특히 대한전선이 독자 개발한 음향기기 제품을 들고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 수출선을 확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곧이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을 뚫기 위해 GE를 노크했고, 마침내 대한전선의 음향기기 제품을 OEM 방식으로 공급하는 계약을 따냈다. GE 브랜드 제품을 한국 기업이 생산, 납품하는 사상 최초의 계약이었다. 강 회장이 수출업무를 맡은 지 2년 후 대한전선은 국내 전자업계에서 수출 1위를 달성하는 경사를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 회장은 GE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미국에 있는 GE의 생산기지를 아시아와 한국으로 옮기는 일을 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대한전선은 그를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고객사인 GE의 입장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심 끝에 묘안이 나왔다. 대한전선과 GE가 강 회장을 두고 일종의 ‘인재파견 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렇게 강 회장은 대한전선 소속으로 GE의 생산기지 이전 업무를 담당하게 됐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GE에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됐다. 1978년 강 회장은 GE의 아시아지역 전략기획(Strategic Planning) 담당 이사로 공식 입사했고, 1980년 말에는 GE코리아 사장으로 발탁됐다.

- 1988년 한국을 방문한 잭 웰치 GE 회장(맨 왼쪽), 파울로 프레스코 GE 부회장(왼쪽서 두 번째)과 함께 당시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즐거운 환담을 나누는 강석진 회장
- 1988년 한국을 방문한 잭 웰치 GE 회장(맨 왼쪽), 파울로 프레스코 GE 부회장(왼쪽서 두 번째)과 함께 당시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즐거운 환담을 나누는 강석진 회장



최장수 외국계기업 CEO 기록의 보유자

회장님께서는 1981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21년간 GE코리아의 사장 및 회장으로 재임하셨습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기업 CEO 가운데 독보적인 최장수 재임 기록으로 알고 있는데요. 세계 최고 기업에서 오랫동안 CEO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지요.

제가 GE코리아를 맡은 이후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했어요. 물론 모든 일에 열정과 최선을 다했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CEO를 맡을 수가 없었죠. 누구보다 사업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나였으니까요. 또한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열린 조직문화를 바탕으로 GE코리아가 매년 급성장을 이어간 것도 GE 경영진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겠죠. 저는 GE에서 근무하는 동안 얼마나 오래 GE에 있었는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일에 몰입했습니다. 나중에 은퇴할 때 보니까 2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더군요(웃음).

강 회장이 사장으로 취임할 무렵 GE코리아의 매출액은 240억원 가량, 구성원은 10명 남짓했다. 하지만 그가 회장에서 물러난 2002년 GE코리아의 매출액은 무려 4조원, 임직원 수는 1300여명에 이르렀다. 또한 계열사도 17개에 달했다. 웬만한 중견그룹을 웃도는 규모다. 강 회장이 GE코리아의 CEO로서 얼마나 많은 신규사업을 펼쳤고, 또 성공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강 회장이 GE코리아의 덩치 불리기에만 몰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업의 전략과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 자연스레 외형 성장이라는 과실을 안겨줬다. 강 회장은 아시아지역 전략기획 담당 이사 시절부터 GE와 한국의 장기적인 파트너십 구축에 사업 전략의 초점을 맞췄다. 요컨대 GE와 한국 경제가 동반 성장하는 윈윈(Win-Win) 전략이었던 셈이다. 1970~80년대 대다수 다국적기업들이 해외시장을 단순한 상품판매 시장으로만 여겼던 점에 비춰보면 강 회장의 발상은 매우 진취적이었던 셈이다. 그가 GE코리아 최초의 한국인 CEO로 기용된 것도 본인이 수립한 ‘현지화 경영 모델’을 책임지고 실천해보라는 GE 경영진의 결단 덕분이었다.

잭 웰치 전 GE 회장과의 관계가 아주 돈독하시다고 들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경영자라는 찬사를 받았던 잭 웰치와 오랜 기간 함께 일하셨는데, 개인적으로 느낀 그의 캐릭터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벽이나 형식 없이 직설적으로 소통하는 스타일이었죠. 솔직하고 순수한 사람입니다. 직관력과 판단력도 아주 뛰어났죠.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강력한 리더십과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죠. 서로 공존하기 쉽지 않은 ‘오픈 마인드’와 ‘카리스마’를 함께 갖춘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황제적 스타일이나 톱다운(Top-down)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어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부하가 아닌 파트너로 여겼던 거죠. 그러니까 GE 구성원들이 그를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모두가 자연스레 그를 ‘종교 교주’처럼 따랐죠. 수많은 간부들의 이름은 물론 별명까지 몽땅 기억하고 친밀하게 불러주는 걸 보면 머리도 아주 비상했어요. 그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간부들에게 친필로 연하장을 보내곤 했습니다. 제게는 지금까지도 연하장을 보냅니다.

강 회장은 잭 웰치가 CEO 시절 입버릇처럼 말했던 경영철학 한 가지를 지금도 글귀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두뇌와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회사를 만들자”는 게 그것이다. 웰치는 특히 강 회장의 생각과 의견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활용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잭 웰치가 GE 회장 취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GE 경영회의에서였다. 곧 물러날 레지날드 존스 회장(1972~1981 재임)은 직접 강석진 GE코리아 사장을 데리고 잭 웰치에게 갔다. 그리곤 이렇게 소개했다. “잭, 이 친구는 크레이지 코리언 진 캉일세(Jack, let me introduce to you. This is crazy Korean Jean Kang).” 현직 회장이 후임 회장에게 직접 특정 임원을 소개하는 것은 GE 역사상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크레이지 코리언’이라니! 주위에 있던 부회장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강 회장의 말이다.

“존스 회장이 왜 나를 크레이지 코리언으로 불렀는지 그 이유를 1년쯤 지나 깨달았어요. 제가 아시아지역 전략기획 담당 임원 시절 한국 사업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해 GE 경영진에게 처음 제안했을 때는 아무도 수긍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왜 한국에 투자하지? 그런 분위기였죠. 당시만 해도 GE 경영진조차 글로벌화에 대한 개념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포기하지 않고 1년 반 이상 줄기차게 설득한 끝에 한국에 대한 현지화 경영 모델이 받아들여졌어요. 그러니까 존스 회장 입장에서는 참 보기 드물게 끈질기고 고집 센 친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죠. 그래서 저를 크레이지 코리언이라고 지칭했던 겁니다.”

사실 일에 관한 열정이라는 면에서 강석진 회장이 ‘크레이지 코리언’이라면 잭 웰치 역시 ‘크레이지 아메리칸’이었다. 레지날드 존스 회장은 내심 두 사람이 잘 맞는 단짝이 될 것이라는 직감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잭 웰치는 강석진 GE코리아 사장과 악수하자마자 ‘하우 아 유(How are you?)’ 같은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대뜸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는 강석진 사장이 제출한 GE와 삼성의 의료기기합작사업 계획서를 슬쩍 훑어본 후 궁금증을 가진 터였다. 웰치는 왜 삼성과 의료기기합작사업을 하려는지, 삼성은 어떤 회사인지, 돈을 벌 수는 있는지, 첨단기술 보호 문제는 어떻게 할 건지 등등에 대해 연신 ‘따발총’을 쏘아댔다. 강석진 사장 역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또박또박 이유와 근거를 대며 맞받았다. 그 광경을 주위에 있던 GE의 고위 임원들은 흥미롭게 관전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난상토론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침내 잭 웰치가 강석진 사장에게 다시 악수를 청했다. 그러면서 “오케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나는 그 사업을 승인한다. 당장 추진하자”며 흔쾌히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회사가 GE삼성의료기기(현 GE헬스케어코리아)였다. 또한 GE코리아의 젊은 한국인 CEO 강석진과 GE 회장 잭 웰치의 끈끈한 우정과 신나는 동행이 첫 걸음을 뗀 순간이기도 했다.

그날 밤 경영회의가 끝난 후 칵테일파티에서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잭 웰치는 GE 회장 자격으로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강석진은 GE코리아 사장으로서 본사 회장이 직접 관심을 쏟을 만한 중요한 사업을 매년 만들어 놓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웰치는 GE 회장으로 재임한 20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두 사람 모두 끝까지 굳게 약속을 지킨 것이다.

- CEO컨설팅그룹 집무실에서 활짝 웃고 있는 강석진 회장.
- CEO컨설팅그룹 집무실에서 활짝 웃고 있는 강석진 회장.

  Tip. 강석진 회장의 흥미진진 사회 초창기 

‘국제통 경영자’ 징검다리가 된 소중한 인연들

지금의 강석진 회장이 있기까지는 청년기에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 중요한 디딤돌이 돼 주었다. 그는 1964년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할 무렵 현대건설 입사시험에 합격했지만 곧장 부산에 본사를 둔 섬유·의류 제조 및 수출업체 쌍미섬유공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학 시절 알게 된 상공부 간부가 직접 지흥구 쌍미섬유 회장에게 그를 추천했던 것. 쌍미섬유는 당시 수출업계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회사였다. 청년 강석진은 서울 명동 소재 쌍미섬유 무역부에서 바이어 영업, 제품 발주, 원자재 수입, 제품 선적 등 모든 무역업무를 배워나갔고 금세 ‘무역도사’가 됐다. 그 무렵 이용구 호남제분 회장은 수출사업에 진출하면서 평소 막역하게 지내던 지흥구 회장에게 수출업무 전문가 추천을 부탁했다. 지 회장은 과거 사업을 시작할 무렵 이 회장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애지중지하는 인재 강석진을 이 회장에게 보냈다. 강석진은 이 회장에게로 가서도 큰 활약을 했다. 회사(원미섬유) 설립과 무역업 등록, 섬유제조설비 수입, 공장 설립 및 공장장 스카우트 등 그야말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다 서른 살을 앞두고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더 넓은 세계로 진출하고자 하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새로운 인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교포 사업가 스탠리 리 회장이었다. 리 회장은 아시아지역 수출사업을 준비하면서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대학동창에게 수출업무 전문가 추천을 의뢰했고, 그 동창이 젊은 인재 강석진을 천거하자 수소문 끝에 워싱턴 공항에서 그를 맞이한 것이었다. 워싱턴에서 10개월 정도 체류했을 즈음, 어느 날 밤 강석진의 아파트로 전화가 걸려왔다. 뉴욕에서 투자금융회사를 운영하는 유진 스코우런 회장이었다. 그는 1년 전 한국 정부가 외자유치 활동의 일환으로 초대했을 때 처음 방한한 바 있고, 그때 체류 일정을 보좌해준 강석진과 인연을 맺은 터였다. 스코우런 회장은 아시아지역 사업을 펼칠 새로운 사업부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강석진에게 아시아지역 담당 부사장직을 제의했다. 강석진은 솔직하게 통화 내용을 리 회장에게 전달하고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를 상의했다. 리 회장은 강석진과 함께 뉴욕으로 날아가 스코우런 회장과 면담을 나눴다. 그리고 젊은 한국인 인재의 보다 큰 미래를 위해 강석진을 놓아주었다. 이후 강석진은 스코우런 회장과 미국 전자업체 실베니아가 합작 설립한 반도체업체 다트머스일렉트로닉스의 부사장으로 한국 현지법인 설립 업무를 맡아 귀국했고, 나중에 시장상황 악화로 실베니아가 사업 철수를 하면서 평소 알고 지내던 설경동 대한전선 회장의 요청을 받고 자리를 옮기게 됐다.

 

잭 웰치와 20년간 ‘아름다운 동행’

지금도 세계 시장에서 GE의 위상이 대단합니다만 과거 잭 웰치 회장 시절에는 세계 모든 기업들이 GE의 경영방식이나 시스템을 배우려 했죠. GE가 초일류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유의 기업문화와 경영방식 등이 바탕이 됐을 텐데요.

GE는 최고경영자는 물론 모든 임직원이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합니다. 그 점에서는 다른 어떤 기업들보다 훨씬 강할 겁니다. 또 GE의 최고경영자는 ‘핵심역량사업’에만 집중한다는 점도 차별화되는 대목이죠. 잭 웰치 회장 취임 이래 GE는 세계 시장에서 1등 혹은 2등 하는 사업만을 영위하는 구조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많은 사업을 처분하기도 했죠. 또 GE는 의사결정 및 실행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이른바 ‘속도경영’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죠. 특히 GE는 ‘열린 조직문화’가 아주 큰 강점입니다. 상하 간, 부서 간 의사소통이 자유롭고 원활하며 모든 구성원들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존중하죠. 그런 바탕 위에서 창조적으로 일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겁니다. 웰치는 ‘구성원들이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자유(Freedom for people to be creative)’를 무척 중시했습니다. 그런 조직문화가 구축되면 모든 사람이 잠재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성취감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죠.

회장님께서는 초일류 다국적기업의 경영자로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국내 기업들과도 많은 접촉을 하셨죠. 현직에 계시던 시절 한국 기업과 외국 기업의 조직문화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으며,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화가 진전된 요즘에는 그 차이가 어떻게 변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의 조직문화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1980 ~9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 기업들은 굉장히 관료적이었습니다. 의사결정도 톱다운 방식이었고 상하 간, 부서 간 벽도 매우 높았죠. 그러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큰 변화가 오게 됩니다. 재무구조 개선뿐 아니라 조직문화 혁신의 바람이 불게 된 거죠. 그 무렵 국내 기업들은 GE를 조직문화 혁신의 벤치마킹 모델로 삼아 열심히 배우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GE코리아 시절 국내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 참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국내 기업들에도 변화와 혁신, 그리고  ‘열린 조직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어요. 물론 아직도 창업주가 오너인 기업에서는 직언을 잘 못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소통의 문화가 자리잡아가고 있어요. 또한 구성원들의 두뇌를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지식경영 체제로 가려고 많이들 노력하고 있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급속히 향상되면서 한국 기업들에 위협 요인으로 대두되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톱10을 넘어 톱5 수준으로 올라서려면 기업들의 조직문화를 더욱 창조적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창조적 조직문화는 지식생산성을 극대화하게 되고, 지식생산성 극대화는 곧 가치창조 극대화로 이어집니다. 모든 기업의 궁극적 목표는 가치창조 극대화가 아닙니까. 매출과 순이익 증대는 물론 기업가치와 기업이미지의 제고, 나아가 기업시민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게 바로 가치창조 극대화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핵심 원천이 바로 경영자의 리더십이에요.

강석진 회장은 현재 ‘리더십과 지식생산성, 가치창조’라는 주제로 학술연구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일류대로 꼽히는 네덜란드 트웬테(Twente)대학교의 TSM 비즈니스스쿨 이사로 활동하면서 ‘리더십과 지식생산성, 가치창조’라는 주제로 박사논문 집필에 4년째 몰두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한 달에 절반 이상은 네덜란드에서 머물 때가 많다. 그는 틈틈이 트웬테대학교 대학원 학생들이나 최고경영자과정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초일류 글로벌기업 GE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특강도 하고 있다. 박사논문은 조만간 완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리더의 리더십 스타일에 따라 국가, 기업, 조직의 문화가 결정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만 봐도 삼성, 현대차, LG의 문화가 서로 다르잖습니까. 저는 가장 바람직한 리더십이란 사람 중심 경영, 비전 및 가치관 공유, 열린 소통, 사람과 조직의 활력화, 혁신과 변화의 지도자 역할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께서는 현역 경영자 시절 스스로의 어떤 점이 특출하게 좋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울러 성공적인 경영자가 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자질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저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봅니다. 그러면 설령 어려운 위기가 닥쳐도 기회로 바꿀 수 있어요. 또 모든 열정을 쏟아 일하고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섰죠. 모름지기 경영자는 회사의 가치창조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가치창조는 경영자의 지상과제입니다. 그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구성원, 주주, 고객 모두를 실망시키는 부도덕한 경영자가 되고 마는 겁니다.

회장님께서는 GE코리아 회장직에서 물러나신 뒤에도 한국전문경영인학회 이사장과 CEO컨설팅그룹 회장으로서 역동적인 삶을 지속하고 계십니다. 한국전문경영인학회와 CEO컨설팅그룹 일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습니까.

제가 IMF 외환위기 직후 여러 경영자, 교수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전문경영인 모임인 ‘한국CEO포럼’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던 적이 있어요. 또 제가 GE에서의 경험을 통해 전문경영인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지 한국전문경영인학회에서 이사장으로 추대해주시더군요. 그 전에 제가 학회에서 수여하는 경영자대상을 받은 적도 있었거든요. CEO컨설팅그룹 회장을 맡게 된 건 또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GE코리아 회장에서 은퇴할 무렵 한국CEO포럼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때 멤버들은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림만 그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첨단산업의 경험과 경륜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경영지식을 전수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느냐, 그게 당신의 사회적 책임이다”라고 설득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어깨가 무거워지더군요. 잠깐 고민 끝에 멤버들에게 역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국을 대표하는 성공한 경영자들이다. 당신들도 경영지식과 경험, 노하우를 다른 기업들, 특히 중소·벤처기업들과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렇게 해서 18명이 의기투합해 한국CEO포럼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제가 대표 자격으로 회장을 맡게 됐습니다. 사실 발기인 대다수가 현직에 있다 보니 제게 일을 떠맡긴 거죠(웃음).

- GE 재직 시절 어느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강석진 회장
- GE 재직 시절 어느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강석진 회장

  Tip. GE코리아 시절의 한국 사업전략  

GE도 좋고 한국 기업도 좋은 ‘윈윈 모델’

GE의 해외시장 진출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단기적 접근방식에 그쳤다. 다시 말해 제품을 판매하거나 프로젝트를 따내는 식이었다. 강석진 회장은 GE코리아를 맡으면서 과거와는 다른 해외 사업모델을 GE 경영진에게 제시했다. 물론 그 사업모델은 강 회장에 의해 한국에서 실현됐다. 요체는 GE와 진출국 간의 장기적 파트너십 구축이었다. 강 회장의 한국 사업전략은 크게 3가지 모델로 나뉘었다. 첫째는 GE가 직접투자 또는 합작투자를 통해 한국에서 장기적인 사업을 전개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한국 기업과 기술협력을 통한 전략적 제휴를 맺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GE와 한국 파트너 기업이 공동협력을 토대로 GE 제품을 한국서 생산하는 것이었다. 3가지 사업모델은 모두 GE와 한국의 장기적인 동반자 관계 구축을 지향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런 사업전략을 바탕으로 강 회장은 GE와 한국 기업이 서로 ‘윈윈’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다수 성공시켰다. 삼성그룹과는 항공기엔진 제조사업과 첨단의료기기 제조 합작회사에서 많은 성과를 얻었고,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과는 발전설비 제조사업 및 장기공급 프로젝트로 손을 맞잡았다. 또 동양화학(현 OCI)과는 실리콘 제조 합작회사를 세워 한국 최초로 실리콘을 생산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강 회장이 주도한 사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90년대 들어 GE는 세계화(Globalization)를 최우선 경영전략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때 잭 웰치 회장은 강 회장이 기획, 추진, 검증한 한국 사업모델을 GE 세계화의 기본전략으로 채택하면서 직접 ‘컴퍼니 투 컨트리 어프로치(Company to Country Approach: 한 국가를 동반자로 보고 장기적인 접근방식을 택한다는 의미)’라고 이름을 붙였다. GE 세계화 전략의 토대와 영감을 제시한 강 회장은 일순간 스타가 됐다. 그때 GE의 각 사업부를 책임진 많은 임원들이 강 회장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면서 건넨 농담이 있다. “진 캉, 당신을 복사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당신 카피가 필요하다(Jean Kang, can we make your copy? We need your copy).” 세계화를 빨리 추진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니 강 회장의 노하우를 그대로 좀 베끼자는 애교 섞인 요청이었던 셈이다.

- 우즈베키스탄의 해발 7000m 빙하지대에서 스케치하고 있는 강석진 회장.(왼쪽) 티벳의 포탈라궁을 스케치하고 있는 강석진 회장.
- 우즈베키스탄의 해발 7000m 빙하지대에서 스케치하고 있는 강석진 회장.(왼쪽) 티벳의 포탈라궁을 스케치하고 있는 강석진 회장.



 ‘강석진 화풍’으로 일가 이룬 프로화가

회장님께서는 예전부터 ‘화가 CEO’로 알려져 있는데요. 미술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입문하신 겁니까.

서른 살 무렵 미국 뉴욕에 있는 투자금융회사에서 근무할 때 센트럴파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젊은 화가를 알게 됐어요. 어느 날 그에게 “당신처럼 유화를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각종 미술재료를 파는 화방으로 나를 데려가는 거예요. 거기서 물감, 팔레트, 붓, 캔버스, 이젤은 물론 그림 그리기 입문서까지 정성스럽게 안내하더군요. 그래서 얼떨결에 그 많은 미술 재료와 도구를 한꺼번에 산 겁니다. 그런 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친구처럼 안 되더군요. 사실 초보자가 자기 뜻대로 그림이 될 리가 있나요(웃음).

강 회장이 그림에 눈을 뜬 것은 아주 우연한 인연(어쩌면 필연이었을 수도 있다)에서 시작됐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전선에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바쁜 회사생활 때문에 미처 풀지 못한 짐을 정리하다 보니 뉴욕에서 잔뜩 사뒀던 미술 재료와 도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한동안 잊고 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다시금 샘솟았다. 그때부터 그는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북한산에서 점심식사도 잊고 풍경화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와 비슷한 또래의 두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한 남자는 차일두 화백(서양화가), 또 다른 남자는 동양화가인 무용 스님이었다.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겨 막걸리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차일두 화백이 “실례하지만 잠시 붓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하더니 강 회장의 미완성 작품에 붓칠을 쓱쓱 하기 시작했다. 불과 4~5분 지났을까. 강 회장의 눈이 커졌다. 그림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강 회장의 회고다.

“그날 만남에서 그림은 나의 의욕뿐 아니라 기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이후 차 화백과 함께 그림을 그리러 다니면서 많이 배웠죠. 다른 화백들의 도움도 컸습니다. 특히 박득순 화백(전 한국신미술회 회장), 김서봉 화백(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 한국 화단의 원로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얻었죠. 미술계의 대가들에게 배우다 보니 실력이 일취월장했죠. 그렇게 한 4~5년쯤 지나니까 원로들께서 ‘강 선생, 이제 우리와 함께 전시를 해도 되겠네’ 하시면서 한국신미술회(한국의 대표적인 구상화가 단체) 회원 가입을 추천해주시더군요. 전업화가가 아닌 사람으로는 정회원이 된 유일한 사례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제가 프로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강 회장은 GE코리아 시절 매일 출근을 두 차례 했다. 아침에는 회사로 출근하고, 밤에는 화실로 출근했다. 웬만한 에너지와 열정이 아니면 엄두조차 못 낼 ‘투잡(Two Job)’을 이어갔던 것이다. 여름 휴가에는 거의 한 달씩 회사 업무를 떠나 화가들과 함께 세계 곳곳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강 회장은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 중에 한 달씩 휴가를 내고 그림 그리러 다니는 사람은 아마도 세계에서 나밖에 없었을 겁니다”라며 웃었다.

강 회장이 장시간 회사를 비우자 처음에는 잭 웰치 회장도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강 회장이 자리를 비워도 GE코리아는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갔다. 강 회장을 대신해 경영 전반을 확실하게 책임질 임원에게 위임장(Delegation of Authority)을 맡겨둔 덕분이었다. 나중에 웰치는 강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 캉, 당신의 휴가는 미래 후계자를 키우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강 회장이 휴가기간 동안 경영을 위임하는 방식을 가리켜 ‘부재경영(Absence Management: 경영자가 없는 상태에도 경영이 원만하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직접 명명해줬다.

화가로서 주로 산과 강, 시골마을 등 대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풍경화에 천착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풍경화라는 장르, 자연이라는 소재를 고수하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 건지요.

저는 주로 높은 곳에 올라가 광활하게 펼쳐진 대자연을 화폭에 담습니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연의 생명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지요. 저는 자연에 푹 빠져서 무언의 소통이 이뤄진 다음에야 붓을 듭니다. 대자연이 “우리를 그려달라”는 소리를 할 때 그 모습을 담는 겁니다. 제가 광활한 자연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화단에서는 ‘강석진 화풍’ 혹은 ‘강석진 구도’라고 일컫습니다. 어떤 미술평론가는 제 그림의 고유한 구도를 ‘부감(俯瞰: 높은 위치에서 내려봄)구도’라고 규정하더군요. 마치 하느님이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구도 같다는 거죠. 저처럼 넓은 구도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어요. 아마도 반 고흐 정도 외에는 없을 겁니다. 제가 젊은 시절부터 세계를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그게 강석진 구도의 배경이 된 셈이죠. 또 자연을 주된 소재로 삼는 것은 시골마을(그의 고향은 경북 상주다)에서 자라나면서 산이나 강, 들과 같은 자연과의 친밀감이 내면화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강 회장은 굉장한 다작(多作) 화가다. 가장 최근 화집에 실린 작품수만 해도 유화 181점, 수채화 203점이나 된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린 전체 작품수는 그 자신도 가늠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1000점은 훨씬 넘을 듯하다. 오죽하면 그의 화실을 방문한 다른 화가들이 “우리 전업화가들보다 작품수가 더 많다”며 혀를 내둘렀을까.



- 강석진 회장이 자신의 개인화실에서 포즈를 잡았다.
- 강석진 회장이 자신의 개인화실에서 포즈를 잡았다.





경영과 예술은 열정·창조·프로정신이 공통점

경영과 예술을 병행하면서 두 분야 모두 일가를 이루셨다는 게 참으로 놀랍습니다. 둘 중 한 가지만 잘 하기에도 벅찰 텐데, 어떻게 둘 다 성공할 수 있었는지 비결이 궁금합니다.

1990년대 중반 무렵 미국 경제전문방송 CNBC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위너스(The Winners)’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스태프였죠. 성공한 사람을 초대해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인데, 저를 초대하고 싶다는 거예요. 프로화가로서 성공적인 경영자로 활동하는 사람을 세계에서 처음 발견했다는 말도 하더군요. 그래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는데, 앵커가 “경영과 예술은 전혀 다른 분야인데 어떻게 같이 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때 이렇게 답을 해줬습니다. “예술을 하려면 ‘열정(Passion)’이 있어야 한다. 경영도 열정이 없으면 못한다. 예술에서 ‘창조(Creativeness)’는 생명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경영에서는 창조적 발상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또 미술을 하더라도 ‘프로정신(Professionalism)’으로 해야 프로다운 작품이 나온다. 경영 역시 프로정신이 있어야 한다. 자, 그러면 경영과 예술의 기본적인 정신과 자세는 똑같은 것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는 “훌륭한 경영자는 훌륭한 종합예술가”라는 말도 덧붙였죠. 경영자는 모든 자원을 종합해나가며 결실과 성과를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녹화를 마치고 나오는데 스태프들이 줄을 서서 제게 박수를 치더군요. “이 프로그램을 해오면서 가장 신나는 날이었다. 우리도 앞으로는 예술가 정신으로 일하겠다”면서요.

강석진 회장과 친하게 지내는 경영자들은 종종 그를 ‘만년청춘’이라고 부른다.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강 회장은 바로 거기에 딱 들어맞는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한마디로 ‘열혈남아’다. 그의 열정과 활력, 지치지 않는 삶의 원동력과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합니다. 특히 팔굽혀펴기는 반드시 하는데, 한번 하면 700회 정도를 해요. 또 맨발로 땅의 기운을 받으며 산에 오르는 것도 무척 즐기죠. 평생 동안 팔씨름에서 두 번밖에 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체력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일이든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니까 열정과 에너지가 나올 수밖에 없죠. 경영자들에게 컨설팅을 해주는 거나, 그림을 그리는 거나, 학술논문을 집필하는 거나 모두 제가 좋아서 하는 일들이에요. 어떤 일이든 맡으면 즐기고 열정을 쏟는 것, 그게 젊게 사는 비결 아닐까요.”



  Tip.
강 회장은 한국 정보화 숨은 주역 

국내 데이터통신 산업 육성에 처음 불 댕겨

GE는 과거 인공위성 제조뿐 아니라 위성통신 사업도 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큰 데이터통신 회사인 GE인포메이션서비스를 갖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인공위성을 통한 데이터통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관련 서비스를 제공했다.

강석진 회장은 1981년 무렵 한국에도 데이터통신 회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체신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체신부에서는 데이터통신의 개념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그때만 해도 통신사업은 법적으로 민간기업이 할 수 없었다. 강 회장은 답답한 마음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성기수 박사를 찾아갔다. 성 박사는 KIST 초대 전자계산실장을 역임한 한국 컴퓨터 역사의 태두다. 그는 강 회장의 이야기를 금세 알아챘다. 그러면서 KIST에서 데이터통신 설명회를 겸한 대규모 세미나를 열자고 했다. 그의 제안으로 개최된 행사에 모인 국내 컴퓨터 전문가들은 GE의 위성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의 컴퓨터와 미국의 컴퓨터 사이에 데이터통신이 구현되는 모습을 보고는 다들 깜짝 놀랐다. 그들의 눈에도 데이터통신은 완전히 신세계였던 것이다.

세미나 결과에 고무된 강 회장은 관련 자료를 챙겨 당시 오명 대통령 경제비서관(전 과학기술부총리, 현 카이스트 이사장)을 찾았다. 오명 비서관은 강 회장의 설명을 듣고는 “이런 산업이 한국에서도 가능하냐”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 얼마 후 오명 비서관은 체신부 차관으로 임명됐다. 오명 차관은 강 회장을 초빙해 체신부 관료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여러 차례 개최했다. 아울러 통신산업 관련 법률 개정을 추진했다. 그렇게 해서 1982년 정부와 대기업들이 공동 출자한 ‘한국데이타통신(이후 데이콤을 거쳐 현 LG유플러스에 합병됨)’이 설립됐다. 한국 최초의 데이터통신 회사였다. 초대 사장에는 훗날 삼보컴퓨터 회장을 역임하게 되는 이용태 박사가 취임했다.

강석진 회장은 한국 정보통신 산업의 개척자들과 지금껏 교분을 나누고 있다. 그 역시 한국이 IT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일조한 숨은 산파 중 한 명인 셈이다. 오명 전 부총리는 얼마 전 강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때 강 회장님이 데이터통신 사업 이야기를 꺼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후에 저는 정보통신을 국가적 산업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였죠. 강 회장님은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산업을 육성하는 데 크나큰 동기를 부여한 주역입니다.”

 

강석진 회장은…

연세대 대학원(공업경영학 석사)을 졸업하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30여년 간 제너럴일렉트릭(GE)에 몸담았고, 그중 20년은 GE코리아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 전문경영인학회 이사장, 서강대·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 CEO컨설팅그룹 회장이다. 서양화가로도 활동해 세계미술문화진흥회 이사장과 한·일 서양화 교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역서: <당신의 운명을 지배하라>, , <잭 웰치와 GE방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