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우주인’ 고산씨가 벤처기업 ‘창업 도우미’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8년 한국 최초의 우주인 탑승자로 선발된 그는 우주선 발사 한 달여를 앞두고 전격 교체되는 좌절을 겪었다. 이후 그는 항공우주연구원을 거쳐 하버드대 케네디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 그가 지난해 타이드 인스티튜트라는 비영리법인을 설립하고 젊은이들의 창업을 돕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서울 종로3가 허름한 세운상가 5층. 복도의 맨끝 사무실에 들어가자 강의실 같은 공간이 나왔다.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만 있었고, 그 흔한 화이트보드나 장식장 하나 없었다. 벽에는 하얀 종이들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종이에는 여러 창업 아이디어와 물음표가 가득했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비즈니스로 연결할 것인지 고민한 흔적이었다.

고산 타이드 인스티튜트 대표는 약속시간보다 거의 1시간 늦게 사무실에 나타났다. 미안한 표정이 역력한 그는 서울 강북청년창업센터의 창업 교육 프로그램 일부를 맡는 문제로 회의가 길어졌다고 말했다.

왜 그는 강남의 근사한 오피스텔을 마다하고, 곧 재개발돼 허물어질 처지에 놓인 이곳에 사무실을 마련했을까. “요즘 창업 붐이 다시 불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웹 비즈니스죠. 그런데 더 큰 기회는 제품개발 분야에 있습니다. 세운상가는 실리콘밸리 같은 곳입니다. 아이디어를 시제품으로 바로 만들 수 있고, 숨어 있는 장인들도 굉장히 많아요. 필요한 부품도 바로 구할 수 있고요. 기존 창업 세대와 젊은 세대를 연결할 수 있는 고리 역할을 하는 곳이죠.”

이곳에서는 매달 2~3차례 최신 기술트렌드와 창업과 관련된 세미나가 열린다. 예술가나 벤처기업가, 연구개발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그야말로 ‘융복합 시너지’를 만든다.

신기술·신시장 정보 소개해 창업 유도

지난해 2월 고 대표가 설립한 타이드 인스티튜트(TIDE Institute, 이하 타이드)는 창업진흥을 위한 비영리법인이다. 타이드는 기술(Technology), 상상력(Imagination), 디자인(Design),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뜻하는 영어단어 앞자리를 조합한 말이다. 기술과 상상력, 디자인적 감각과 열정을 갖춘 창업자를 적극 길러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타이드는 현재 20명의 인원으로 구성돼 있다.

새로운 첨단기술에 대한 트렌드와 신시장에 대한 정보를 국내에 소개해 창업을 유도하는 것이 목표다. 창업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우수인재 유출을 막는 동시에 글로벌 기업을 키우는 열쇠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글로벌 창업시스템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창업과 관련된 각종 행사를 개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타이드는 지난해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함께 해외동포 청년들과 국내 이공계 학생을 대상으로 창업 지원 포럼을 열었다. 포럼은 창업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이를 비즈니스 모델로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창조적인 발상을 통해 두려움을 떨치고 창업에 도전을 할 수 있도록 기업가 정신을 발현시키기 위한 포럼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0월엔 미국 보스턴과 실리콘밸리에서 현지 한인과 유학생을 대상으로 창업 아이디어 경진대회를 주최했다.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우수인재를 창업으로 유인하기 위한 행사였다. 한국의 젊은 해외 인재들이 함께 모여 창업을 시작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그들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창업해 해외로 진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외국 문화에 적응하는 데 몇 년이 걸립니다. 하지만 해외의 젊은 인재들은 다릅니다. 이미 한국과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의 아이디어를 사업화하고 글로벌 진출을 돕기 위한 ‘글로벌 창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게 된 겁니다.”

가시적인 성과도 나왔다. 보스턴 경진대회에서 1등을 한 팀은 최근 한국에 들어와 사업을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한국계 벤처캐피털이 엔젤투자를 하기로 결정했으며, 대회 참가자들이 상시로 만날 수 있는 ‘사랑방’도 만들어졌다. 고 대표는 올해에는 미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영국으로 경진대회를 확대하고 국내 주요도시에서도 이러한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타이드는 최근 연세대 경영대와 손잡고 올해부터 1학기 학부과정에 3학점 짜리 ‘신사업모델 포럼’ 과목을 개설하기도 했다. 각 분야의 기술창업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빙해 강의를 듣고 아이디어를 비즈니스 모델화하는 과목이다.

지난 2008년 러시아에서 우주인 훈련을 받을 당시의 모습

우주인 훈련 받으며 사회환원 고민

고산 대표가 글로벌 창업 네트워크를 구상하게 된 것은 2010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공부하던 때였다. 하지만 최초의 계기는 우주인으로 선발돼 훈련을 받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주인 훈련을 받으면서 제가 받은 혜택을 어떻게 사회에 되돌려줄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국력이 더 강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땅덩어리가 작은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과학기술력을 키우는 길이라고 믿게 됐고, 결국 인재정책이 관건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지요.”

대한민국 1호 우주인 자리를 놓친 그는 2008년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과학정책과 관련된 업무였다. 정책에 관심은 많았지만 잘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외국 대학의 정책대학원 여러 곳에 지원했다. 마침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케네디스쿨에 입학하기 전 싱귤래러티(Singularity) 대학에서 10주 동안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첨단과학기술이 과연 뭔지를 알아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그 프로그램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창업을 키워드로 첨단과학기술과 기업가 정신을 접목해 실제 창업까지 하는 융복합 프로그램이었어요. 처음 4주는 바이오, 나노, 컴퓨터 사이언스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집중적으로 교육을 하고 이후 4주 동안은 실리콘밸리에 가서 실제 창업을 어떻게 하는지, 새로운 시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고 느낍니다. 마지막에는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묶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면 벤처캐피털이 바로 지원을 약속하는 겁니다. ‘아! 이거구나’ 싶었죠. 이 프로그램을 한국에 도입하면 이공계 기피현상과 이탈을 막을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케네디스쿨에 다니면서도 우수한 한인 학생들을 위한 네트워크 구성과 창업에 계속 관심을 가졌다. 창업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진 우수한 학생들이 많았지만 실제 창업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제대로 된 팀을 구성하지 못해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디어가 사장되고 결국 열정이 사그라지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한인 유학생 중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들이 한국에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문제였어요. 이들의 관심을 한국으로 돌리고, 창업에 관심이 많은 한인들을 모아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그렇게 해서 설립하게 된 것이 비영리법인인 타이드 인스티튜트였다. 비영리법인으로 설립한 것은 아이디어를 비즈니스 모델화하고, 실제 창업이 이뤄질 수 있도록 투자자와 연계시키기 위해서는 비전이 명확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돈 벌기에 급급하다보면 비전이 흐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타이드는 지정기부금 단체로 등록돼 있다.

 Tip l 아쉽지만 후회없는 우주인 훈련

“우주인 꽃 피울 수 있는 뿌리 되겠다”

고산 대표는 비운의 우주인으로 불린다. 우주선 발사를 한 달여 앞두고 탑승 우주인 자리가 예비 우주인 이소연씨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며 그래도 ‘비운’은 아니다고 웃으며 말했다. “열람이 불허된 책을 봤다는 이유에서였죠. 아쉽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어요. 국가적인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으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더 커졌고요. 무엇보다 치열한 과학기술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간이었죠.”

그는 오히려 우주인 배출사업이 단발성 행사로 끝난 것이 아쉽다며 규모와 시기를 고민해 우주산업 발전을 위해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우주인의 꿈은 접었을까. 그는 이제 우주로 가는 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며 돈만 있으면 갈 수 있지 않냐고 말했다. 다만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우주인은 과학기술의 꽃입니다. 하지만 그 꽃의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줄기와 뿌리죠. 줄기와 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으로 이뤄집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뿌리를 굳건하게 내릴 수 있는 토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가 정신 함양해야

그는 인터뷰 내내 도전정신을 강조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젊은이들도 답답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접근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아니라 마음자세가 문제라는 얘기다. 미국에서 개최한 창업경진대회의 명칭을 ‘앙트러프르너십(기업가정신) 대회’라고 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실리콘밸리에 가보니 그 분위기가 너무 부러웠어요. 어느 술집에 들어가 그들과 얘기를 해보면 ‘나는 이런 아이디어로 창업할 거야’, ‘한번 실패했지만 다시 한번 도전해 볼 거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창업에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 실리콘밸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도 도전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만 가지고 있다면 설사 창업을 못하고 취업을 하더라도 달라질 겁니다.”

그는 새로운 첨단기술 정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기반의 벤처창업이 활성화된다면 이공계 기피현상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그 역할을 타이드가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시장에선 첨단기술에 관한 정보가 넘치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러한 정보의 흐름이 막혀 있어요. 타이드는 이러한 지식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엔진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