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을 30여년 만에 연매출 800억원대 기업으로 키운 사람, 무릇 인재라면 지식(知)보다 도덕(道)과 예의범절(禮)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재까지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한 사람,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지만 검도의 최고봉 공인 8단에 오르기 위해 지금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사람, 대형 플라스틱 파이프 제조업체 사이몬 이국노 회장 이야기다.

 

“어서오세요. 이국노입니다.”     악수를 나누는데 손 마디마디가 굳은살 투성이다.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이런 걸까.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는데 오른손 등에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하다.

“아! 이거요? 얼마 전 대련 중 상대가 죽도로 여기를 내려쳐서 그만…. 고수라면 원래 손목보호대 부분을 쳐야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나요. 가끔 이런 일이 있는데 아직도 얼얼하네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사이몬 본사 이국노 회장 집무실은 검도 관련 장비로 가득하다. 그를 무도의 길로 이끈 스승(박종규 선생)의 유품인 호구(신체 보호장비)를 비롯해 일본 검도회가 선물로 준 왕장(王將)이라는 나무푯말, 1997년에 받은 공인 7단 인증서, 각종 검도 교본들이 사무실에 가득하다. 수련을 위한 별도 공간도 있다.

검도 정신에서 출발, 사훈 ‘입정’으로 정해

이 회장은 국내 플라스틱 제조업계에서 유명인물이다. 그가 1973년 왕십리에서 단돈 3만원으로 시작한 플라스틱 파이프 제조회사 사이몬은 오늘날 연매출 700억원대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같은 사이몬의 성장은 절도와 기개의 검객 이 회장의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검 하나를 들더라도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켜 정정당당히 진검승부를 펼치는 것, 그것이 이 회장이 말하는 세상 이치이자 경영 철학이다. 그래서 이 회장은 사훈도 ‘바른 것을 세운다’라는 뜻의 입정(立正)으로 정했다. 

“무(武)라는 글자는 ‘둘(二)이 창(戈)을 들고 서 있는 것(止)’을 의미해요. 무의 기본은 역설적이지만 평화를 상징합니다. 검도에서 삼례정진(三禮正進)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예(禮)란 국가에 대한 예, 스승에 대한 예, 상대방에 대한 예를 뜻합니다. 검을 통해 도를 닦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도는 뭐겠습니까. 바로 세상 이치죠. 도리, 사리, 천리와 눈치, 염치, 수치 같은 것들 말입니다. 우리 회사가 국내 플라스틱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바름을 세우려는 검도 정신을 잘 살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회장은 인터뷰 중간마다 ‘혼의 경영’을 강조했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품 원가를 계산기로 두드리며 트렌드를 살피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가 말하는 기업경영의 핵심은 ‘정신’이다. 제품에 담겨진 경영자, 장인의 혼은 소비자가 먼저 알아본다고 이 회장은 설명했다. 그가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3일 이상씩 검을 잡고 심호흡을 가다듬는 이유 역시 수련을 통한 자기 성찰의 의미가 강하다. 그는 오랜 수련을 통해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는 인내심과 도전정신을 뒷받침하는 기개와 배포를 쌓는다.

대한검도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이 회장은 현재 공인 7단이다. 입신의 경지라는 공인 9단 보유자는 현재 국내에 딱 1명뿐. 8단은 80명, 7단은 200명이다. 1997년 7단에 오른 그는 현재 8단 승단을 눈앞에 두고 있다.

“8단이라는 게 사실상 검도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단 승단 이후 10년 이상 수련해야할뿐더러 자격 조건을 갖췄다고 해도 성공 확률이 1%도 안 돼요. 생전에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9단을 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단계는 8단이 사실상 끝이죠.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네요. 벌써 3년째 낙방인데 올 4월 승단시험에는 반드시 붙을 겁니다.”

순간 이 회장의 눈에서 호안(虎眼)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 회장이 요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 검법을 소개한 조선세법을 재현하는 일이다. 조선세법은 1620년 중국 군사전략가 모원의가 쓴 ‘무비지’에 등장하는 검법서다. 무비지는 세계 각국의 무술, 전법 2400여권을 편집해 86권으로 만든 중국 무예서의 최고봉이다.

“인재는 예와 도, 체력을 겸비해야 한다”

“무비지에서 모원의는 ‘대대로 내려오던 우리(중국) 검법의 본류를 조선에서 얻었는데 거기에 그것이 온전히 갖춰져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어요. 그게 바로 24개 수로 구성된 조선세법이죠. 당시 모원의는 조선세법을 어느 호사가로부터만 들었을 뿐 누가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1790년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무관 백동수가 함께 28개 수로 구성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책 서문에서 이덕무 선생은 이 책이 무비지를 토대로 작성됐다는 것을 밝히면서 무비지 것을 그대로 베낀 게 통탄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이 회장은 사재를 들여 조선세법에 기록된 옷, 수(품새), 장비 등을 재현해 계량화시키는 일을 벌이고 있다. 현재 조선세법은 대한검도회 이종림 수석부회장 등 몇몇 검도인에 의해 현대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해 표준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 검도가 예술적 요소가 강하다면 조선세법은 그야말로 실전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조선세법은 사람을 살리는 검법, 즉 활인검(活人劍)인데 비해 일본 검도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검(殺人劍)이었습니다. 조선세법은 무도로 볼 때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그는 지난해 사재 100억원을 들여 ‘한국예도문화장학체육재단’을 설립했다. 이곳은 예와 도, 강인한 체력 속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 미래지향적인 인재를 양성, 지원하는 장학재단이다.

“칼을 잡은 지 50년에 이르지만 솔직히 아직도 검이 뭔지 모르겠어요. 다만 검도를 연마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눈은 밝아졌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검도가 주는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송창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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