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 대표는 요즘 국내외 광고디자인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앙팡테리블’(무서운 신예)이다. 박 대표를 비롯해 뉴욕의 명문 아트스쿨 SVA(School of Visual Arts) 졸업생 5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빅앤트는 설립 5년 만에 평생 한 개도 받기 힘들다는 세계 5대 국제 광고제(칸 국제 광고제, 뉴욕 페스티벌, 클리오 광고제, D&AD, 뉴욕 원쇼)를 모두 석권하는 쾌거를 거뒀다. 뉴욕 원쇼 광고제는 3년 연속 수상이다. 박용만 (주)두산 회장의 장남이기도 한 박 대표는 이러한 자신의 성공을 개미처럼 미친 듯 노력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디자인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대학 진학도 힘든 문제아였다. 너무 놀아 지겨울 정도였다던 그는 디자인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멘토로 삼는 후배들에게 “개미처럼 노력하라. 크리에이티브(창조적 발상)는 그 끝에 있다”고 말한다. ‘놀던’ 아이에서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경영자로 변신한 그는 그래서 요즘 대학, 기업들 사이 초청 강연자 ‘0순위’다.

“물어라.”

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이하 빅앤트)이 강연회에서 ‘어떻게 하면 창조적인 발상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청중들에게 자주 던지는 말이다.

중의적인 표현인 이 단어는 묻다(ask), 물어라(bite)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져 있다. ‘미친 듯이 묻고(ask), 물었으면(bite) 끝장을 내라. 그런 혹독한 고통과 훈련을 거쳐야만 창조적 발상이라는 영광의 산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미칠 수 없다’(不狂不及)의 또 다른 표현인 셈이다.

학창시절 땐 문제아 … 세계 광고계 기대주로 부상

그러나 그의 인생은 이 같은 격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학창시절 그는 소위 ‘문제아’로 통했다. 상문고 재학시절 그는 반에서 55명 중 50등을 했다. 공부하는 것보다 노는 게 좋았다. 농구코트, 나이트클럽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그는 정말 미친 듯이 놀았다. 그러다보니 학교 성적은 대학조차 갈 실력이 못됐다. 다행히 지원한 단국대 천안캠퍼스 경영학과가 정원이 미달되면서 겨우 입학은 했지만 대학도 따분함의 연속이기는 마찬가지였다. 2학년 1학기까지 내리 0점대 학점을 받아들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퇴하고 미국 웨스트 미시간 대학으로 유학을 갔지만 거기서도 그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사회학, 심리학, 기계공학 등 화려한 전과(轉科) 이력이 말해주듯 그의 방황은 미국에서도 계속됐다. 그러던 중 친하게 지내던 한 일본인 친구가 디자인을 공부하는 것에 매료돼 미술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그가 인생 최대 모험을 감행했다. 뉴욕 최고의 디자인학교로 통하는 SVA에 입학원서를 낸 것이다. 남들보다 10배씩 과제를 해내는 그에게 SVA는 미친 놈(Crazy man)이라는 별칭과 함께 입학을 허락한다. 그게 2005년 무렵이다. 박 대표 스스로도 “내 인생은 2005년 이전의 박서원과 이후의 박서원으로 나눠진다”고 말한다.



- 반전 포스터 '뿌린대로 거두리라'



- 금연 유도 재떨이

- 맞춤 제작이 가능한 보그지 쇼핑백



대학 2학년 때 또래들과 세운 빅앤트는 국내외 광고계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광고 디자인 회사로 통한다. 많은 기업들이 빅앤트의 능력을 높이 사는 이유는 발상의 전환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끌면서 동시에 거부 반응이 없게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데 있다. 빅앤트의 대표작인 반전포스터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만 해도 역발상이 빚어낸 수작이다. 총구가 긴 미군 병사 사진을 전봇대와 같은 둥근 기둥에 돌리면 어느새 총구는 병사의 등 뒤에 와 있다. 이 포스터로 빅앤트는 5대 국제 광고제를 모조리 휩쓸었다. 이후로 세계 광고계는 단순하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만드는 무서운 신예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알카에다도 빅앤트에게 “용감한 형제여”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 자신들의 입장을 잘 설명해줘 고맙다고 말할 정도로 빅앤트는 하루아침에 광고업계의 신데렐라가 됐다.

“제가 이렇게 변한 건 아무래도 철이 들어서 일거예요(웃음). 그렇다고 지난날이 후회되지는 않아요. 과거는 미래의 내 모습이기 때문이죠. 학창시절 그런 끼가 없었다면 오늘날 제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전 솔직히 디자인하는 사람 치고 그림을 잘 못 그리는 편이거든요. 지금도 사람들이 창조적 발상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그럴  때마다 전 호기심이라고 말해요. 학창시절 그렇게 놀았어도 전국방방곡곡 여행 다니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때 본 시골 정취나 자연 그게 지금 제 디자인 속에 반영이 돼 있는 겁니다.”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배출해내는 유태인들의 노동철학이 ‘열심히 일해라’가 아니라 ‘잘 쉬어라’인 것과 같은 이치다. ‘안식’이라는 쉼 속에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 것이 박 대표의 광고디자인에서도 그대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로 세계 광고상 휩쓸어

거대 광고제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빅앤트를 노크하는 광고주도 줄을 잇고 있다. 설립 후 1만3000여개 광고·디자인 프로젝트를 수행한 빅앤트는 광고카피부터 로고, 제품포장 디자인은 물론 공연 기획까지 광고, 디자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하고 있다. 전문화·분업화돼 있는 국내 광고 디자인 회사들과는 운영 방식이 다르다.

“광고와 디자인이라는 게 사실 다른 영역이 아니에요. ‘크리에이티브’(Creative:창조적)라는 개념으로 묶으면 다 연결되는 것이죠. 빅앤트는 앞으로도 저희 능력을 어느 한곳에 집중시키기보다는 크리에이티브를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 도전할 생각이에요.”

그동안 빅앤트가 만든 주요 작품만 봐도 영역이 하나같이 제각각이다. 패션잡지 보그 한국판에서 의뢰받은 쇼핑백부터 살펴보자. 아무것도 디자인돼 있지 않은 새하얀 쇼핑백에 소비자가 ‘VOGUE’라는 글자가 새겨진 롤러를 굴리면 자신만의 맞춤형 쇼핑백으로 탄생한다. 논현동 두산건설 사옥 전체를 책장모양으로 장식한 옥외 광고 북쉘브도 빅앤트의 대표작이다. ‘킹콩의 책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 광고로 빅앤트는 2010년 뉴욕 원쇼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금연 유도 재떨이도 흥미롭다.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넣으면 폐 모양의 통에서 꽁초가 쌓이면서 누런 물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도록 설계된 이 작품으로 빅앤트는 3년 연속 뉴욕 원쇼 광고상을 수상했다. 두산베어스 유니폼 디자인도 빅앤트의 작품이다. 

“수상 이후 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는데 저희는 몇 가지 원칙을 갖고 프로젝트를 수행해요. 우리의 선발 기준은 우선 제품이 좋아야 한다는 겁니다. 광고는 제품을 알리는 역할을 할 뿐, 제품의 수명은 제품 자체에 있거든요. 매일유업의 커피음료 바리스타 제품 디자인도 우리가 했는데 별 거 없었어요. 근데 그 제품은 지금 그 전보다 매출이 5배나 올랐다고 합니다. 워낙 좋은 제품인데 여기에 약간만 손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게 말이 통하는 클라이언트야 한다는 겁니다. 더불어 저희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재미있는 프로젝트면 더 좋겠죠. 피(Fee·디자인 수수료)는 정말 그 다음이에요.”

 박 대표는 두산가(家) 4세다. (주)두산 박용만 회장이 아버지다. 장남이 학창시절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하니 부모인 박 회장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정말 단 한번도 화내신 적이 없었어요. 성적이 떨어져도 언제나 “난 네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말씀뿐이셨어요. 디자인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래 하고 싶은 일 해야지 열심히 해”라는 말씀만 하셨을 뿐 반대하시지 않으셨어요.”



- 두산건설 사옥 건물 벽면을 책장으로 보이게 한 착시 현수막'북쉘프','킹콩의 책장'이라는 별칭의 이 광고로 빅앤트는 2010년 뉴욕 원쇼 광고제에서 상을 받았다.

- 백앤트가 디자인을 리뉴얼한 매일유업의 카페라떼.

아버지에게 “경영은 창조적인 것” 영감 배워

혹 ‘재벌가 자제’라는 편견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물론 지금의 성공을 두고 “돈 많은 부모 만나서 아니겠느냐”며 폄하하는 사람은 여전하다. 그러나 박 대표는 되레 “신경 안 쓴다”는 반응을 보였다.

“회사 만들면서 정말 부모님께 도움 받은 거 하나도 없었어요. 회사가 좀 돌아가자 사촌누나(박혜원 두산매거진 전무)가 “서원아 이것 좀 해줘”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못한다고 해요(보그지 한국판 쇼핑백과 두산매거진으로 디자인한 논현동 두산 사옥을 가리킴). 그런데 정말 제작비밖에 안 받았어요. 이런 건 매출에 도움이 안 돼요. 제가 하는 일이 저희 가족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즐거울 뿐이죠. 어렸을 때 말썽만 피우던 애가 뭔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게 즐겁잖아요. 두산베어스 유니폼, 로고, 캐릭터도 큰 형님(박정원 두산건설 회장·두산베어스 구단주)이 (리뉴얼) 해보라고 해서 한 건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만 엄청 얻어먹었어요. 그거 디자인 하려고 모교(뉴욕 SVA) 교수님들도 여러 차례 찾아보고 미국 메이저리그(MLB) 야구팀 유니폼을 디자인한 업체들에 자문까지 받았는데, 두산 팬들에게는 성이 안 찼나 봐요(웃음).”

다른 재벌가 자제들이 경영자 수업을 밟고 있는 게 부럽지 않을까.

“애초부터 회사 일에 참여해 보지 않아서인지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회사 경영도 결국 크리에이티브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께 회사 경영과 관련해서 특별히 조언을 받은 건 없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곁에서 보면 ‘아! 정말 창조적으로 회사를 경영하신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기업 인수·합병(M&A)만 해도 굉장히 크리에이티브한 분야잖아요.”

박 대표의 하루 일과는 머리를 깎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샤워를 하면서 밤 사이 자란 머리를 말끔하게 미는 게 그에겐 중요한 의식(?)이다. 마치 전투를 치르기 위해 격전장으로 떠나는 비장한 전사처럼 말이다. 그가 머리를 삭발한 이유는 다분히 자기 홍보(PR)를 위해서다. 광고주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미 있는 것을 재창조하는 게 크리에이티브

디자인과 함께 요즘 그가 열정을 쏟고 있는 있는 것은 ‘재능 나눔’이다. 숙명여대와 서울예대에 출강하고 있는 박 대표는 기관, 기업체 강사로 초빙돼 ‘창조적 발상’과 관련된 주제로 특강에 나서고 있다.

“특강료요? 주는 대로 받습니다. 저희 회사의 좋은 일에 쓰기 위해 만든 통장이 하나 있어요. 거기로 보내주시면 나중에 모아서 좋은 일에 쓰려고요. 돈 보고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얼마 전 낸 책 <생각하는 미친놈>(센추리원 펴냄)의 수익금도 모두 ‘좋은 일’에 쓰기로 했다. 그는 일단 책 인세의 70%는 난치병 유아 환자를 돕는 데 쓰고, 나머지 30%도 좋은 일에 쓸 궁리를 하고 있다. 책에서 그는 “크리에이티브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것을 다르게 바라보고 재창조하는 일이다. 모든 창조는 융합에서 시작된다. 섞고 뒤집고, 연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피어날 수 있다. 크리에이터는 때론 ‘싸움꾼’이 돼야 하고 때론 기존 관행에 ‘딴죽’을 걸기도 해야 한다. 심플(Simple)하고 강력(Strong)하면서 똑 소리(Smart) 나도록 하는 게 진정한 크리에이티브다”라고 말했다.



- 박서원 대표는…

1979년 서울 생으로 단국대를 중퇴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웨스트 미시간대에 입학했다. 우연한 기회에 디자인에 눈을 떠 미국 디자인 명문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SVA)로 학교를 옮겼다. 대학 2학년 때인 2006년 같은 학교 친구 5명과 함께 광고 디자인 회사 빅앤트인터내셔널을 차린 그는 5년 만에 국내외 굵직한 50여개 광고제를 휩쓰는 등 세계 광고 디자인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송창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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