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강산업은 1973년 포항제철(현 포스코) 제1고로(高爐: 용광로)가 준공되면서 마침내 역사적인 일관생산체제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포항제철의 고로 가동은 모든 철강제품의 기초원료가 되는 쇳물을 우리 손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됐음을 의미했다. 통상적으로 포항제철 출범을 한국 철강산업 발전, 나아가 한국 산업화의 초석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철강산업이 포항제철에서 처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포항제철 이전에도 극소수 제철소가 비록 생산량은 미미했지만 전기로(電氣爐)를 가동하고 있었고, 일부 철강제품 품목을 생산하는 업체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한국 철강산업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들인 셈이다.
세아그룹(이운형 회장)도 그런 철강 개척자 중 하나다. 세아그룹은 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시절인 1960년 부산철관공업(현 세아제강·세아그룹의 모기업)을 설립하면서 일찌감치 제조업에 진출해 강관(鋼管·철강 파이프)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국내 최초로 강관 수출을 시작했고, 1981년에는 강관업계 최초로 1억불 수출을 달성하는 등 한국 강관산업을 주도해온 주역이다. 창업주인 고(故) 이종덕 회장에 이어 이운형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선 1980년대 이후로는 적극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서 세아베스틸, 세아특수강 등 주요 계열사들을 시장 선도 기업으로 육성하는 데도 성공했다. 현재 세아그룹은 철강을 주력으로 하는 국내 기업 가운데 포스코, 동국제강과 함께 ‘빅3’를 형성하고 있다. 2011년 기준 자산총액 5조7330억여원으로 재계 순위는 30위권(공기업, 민영화된 공기업, 외국계기업 등 제외)이다.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은 세아그룹이 규모나 위상에 비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기업’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일반 소비재가 아닌 생산재를 제조·판매하는 B2B 비즈니스를 하는 탓이 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운형 회장도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여느 기업가들과는 달리 다소 베일에 가려 있었다. 그런 이운형 회장이 <이코노미플러스>의 노크에 자신의 집무실 문을 활짝 열었다. 언론매체와의 정식 인터뷰는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이 회장은 꾸밈없고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본격적인 대담에 앞서 차 한잔을 나누면서는 기어코 자신의 옆자리를 권하기도 했고, 기념촬영을 할 때는 다정하게 취재기자의 손을 잡기도 했다. 세아의 영문 표기가 선명하게 박힌 회사 근무복을 자연스레 입고서는 포즈를 잡는 모습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선대회장 시절부터 굳건하게 이어져온 현장중심 경영철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세아그룹 창업주 해암(海巖) 이종덕 회장(1915~2000)은 약관 21세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금고회사에 입사하면서 철강과 인연을 맺었다. 그때 사업가 안목을 기른 해암은 1945년 해방 후 서울 을지로에 ‘해동공업사’라는 철강재 수입판매상을 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기껏 만들어놓은 기반을 잃었지만, 해암은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금 사업을 일으켜나갔다. 그 무렵 해암은 우리나라가 절대빈곤을 벗어나려면 산업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마침내 제조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1960년 부산, 오늘날 세아그룹의 모태가 된 부산철관공업이 드디어 닻을 올렸다. 그 무렵 기아산업(기아자동차 전신)이 파이프를 만들고 있기는 했지만 자사가 제조하는 자전거용으로 그쳤다. 따라서 부산철관공업이 사실상 국내 강관산업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 세아그룹은 2010년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00년 장수기업을 향한 5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세아의 지난 50년은 한국의 산업화 및 수출입국 역사와 정확하게 궤를 함께한다.



- 세아제강 포항공장에서 생산된 강관 제품.

강석진 회장(이하 강 회장) | 세아그룹이 두 해 전 창립 50주년을 맞았죠. 그간의 성장 과정에서 우리나라 산업에 어떤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운형 회장(이하 이 회장) | 철강산업뿐 아니라 한국 산업사 전체를 보더라도 우리 세아는 한마디로 ‘모범기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면에서요. 철강산업을 비롯해 한국 산업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의 시기마다 저희가 거의 ‘정답’을 내놓았던 게 아닌가 해요.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주류는 아무래도 포스코죠. 포스코가 생기면서 조선, 자동차, 가전 등 국내 모든 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거죠. 그 전에 일본서 철강을 수입할 때는 가격이 굉장히 높았어요. 양도 제한적이었고요. 포스코가 기초소재를 만들면서부터 국내 산업이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포스코 이전에 저희가 있었어요. 저희는 포스코가 설립되기 전에 이미 수출시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포스코 물건을 쓰면서 포스코 발전에 일조를 한 셈이죠. 처음 나온 포스코 제품을 쓸 때는 참 힘든 일도 있었죠(웃음). 파이프 형태로 말리지 않고 깨지는 경우도 있었어요. 품질이 균일하지 않아서죠. 하여튼 같이 고생을 많이 했죠. 당시 포스코에 세계적인 품질을 요구했습니다. 물론 많이 사기도 했고, 세계시장 정보도 제공했죠. 그런 점에서 저희가 포스코 발전에 상당히 기여한 거죠.

강 회장 | 세아가 고품질 제품을 요구함으로써 포스코에 기술개발 동기를 부여한 셈이군요.

이 회장 | 물론 초창기 일이죠. 나중에는 포스코가 워낙 잘했으니까요. 저희가 81년 수출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어요. 1억불 수출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거죠(당시 1억달러 수출은 대단한 실적이었다). 그것도 이틀 전에 별안간 연락이 왔더군요(웃음).

1980년대에 접어들며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석유개발 붐이 일었다. 오일쇼크의 여파였다. 덩달아 유정(油井)용 강관 수요도 급증했다. 유정용 강관은 고도의 품질이 요구되는 제품이다. 미국석유협회(API)가 인증한 제품, 이른바 ‘API강관’만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부산파이프(부산철관공업에서 사명 변경)는 일본 가와사키제철(현 JFE스틸)로부터 핫코일(열연강판)을 공급받아 국내 최초로 API강관을 개발해 대량 수출에 나섰다. 그때만 해도 포스코는 API강관 생산에 적합한 소재를 공급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운형 회장은 “당시 포스코가 고급제품 개발에 대한 자극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 세아가 국내 철강산업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아그룹이 철강산업에 처음 뛰어든 것은 1960년. 당시 국내 철강산업은 조그만 전기로업체가 못처럼 단순한 철강제품을 만드는 수준에 그쳤다. 그런데 세아는 회사 설립 후 불과 7년 만인 1967년에 강관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원자재(열연강판)는 일본, 미국, 독일 등지서 조달했다. 국내서는 전혀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가 사실상 처음이었지만 진지하면서도 소탈하게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1967년 국내 최초 강관 수출 세계시장 도전

이 회장 | 당시(1960년대) 우리나라는 달러가 많이 필요했죠. 거의 모든 물자를 외국서 사와야 했으니까요. 세아가 일찍부터 수출을 시작한 것은 (달러 확보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죠. 또 수출시장은 품질과 가격이 경쟁력을 좌우하잖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희는 일찌감치 세계 수준에 도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아그룹은 기업공개도 선구적이었다. 1969년 5월, 부산철관공업은 주식을 한국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에 상장했다. 지금이야 유가증권시장, 코스닥시장을 합쳐 2000개 가까운 상장기업이 존재하지만 그때만 해도 은행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전력, 삼양사, 유한양행 등 달랑 몇몇 회사만 증시에 상장돼 있던 시절이다. 부산철관공업은 요즘 말로 치면 ‘IPO(기업공개) 대박’을 터뜨렸다. 5000만원을 공모하는데 청약률이 무려 342%에 달했다. 수출을 선도하는 알짜 우량기업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던 셈이다. 당시 부산철관공업의 상장 소식은 신문에도 대대적인 보도가 됐을 정도라고 한다.

이 회장 | 저희 수출 규모가 늘어나면서 공장을 키워야 했는데,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때는 정부 차관을 사용하려면 정치자금을 많이 내야 했던 시대죠. 그런 걸 내면 사업이 안되니까 정치권에 부탁하면 안되겠다 판단했답니다. 그래서 기업공개를 하게 됐습니다. 그때는 일반 국민들이 주식투자를 거의 안 하던 시절이었죠. 주로 은행 등 기관투자자들이 저희 주식을 샀는데 “굉장히 좋은 회사다”라는 평가도 많았죠.

세아그룹이 한국 현대 기업사에서 선구적인 족적을 남긴 것은 또 있다. 사원지주제, 지주회사제 도입이 그런 사례다. 특히 1969년 기업공개와 함께 단행한 사원지주제는 국내 기업 중 최초 도입 사례로 기록돼 있다.

강 회장 | 그 무렵만 해도 국내에서 사원지주제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인데, 어떤 배경으로 도입하게 된 겁니까. 직원들이 다 부자가 됐을 것 같은데요(웃음).

이 회장 |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때 직원들이 주식을 팔아 집도 사고 그랬다고 해요. 당시 법적으로 상장기업 대주주는 지분을 40% 이하로 가져야 했기에 경영 안정을 위해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준 측면도 있고, 특히 선대 회장께서 현장 직원들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기 때문에 보답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선친께서는 현장에서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어서 직원들의 고충을 잘 아셨거든요. 간혹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으면 선친께서 들어오셔서 “자네들 공산당이냐, 무슨 회의를 많이 하냐, 생산이든 판매든 현장에서 해야지” 하며 핀잔을 주시곤 했습니다(일동 웃음). 그만큼 현장을 중시하셨죠.



-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

세아그룹은 지주회사제 도입에서도 몇 발짝 앞선 기업이다. 국내 대기업집단 가운데 단연 선발주자 격이다. 2000년 무렵 일찌감치 지주회사 설립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 2001년 곧바로 지주회사 체제로 그룹을 재편했다. 모기업인 세아제강에서 분리돼 나온 세아홀딩스에 지주회사 역할을 맡겼다.

이 회장 | IMF 사태로 많은 회사들이 무너졌죠. 계열사간 상호보증 때문에 한 회사가 잘못되면서 결국 다 망하게 된 거죠. 그런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 일찍 지주회사제 도입을 결정했습니다. 세아제강과 세아홀딩스를 분리하니까 사세 확장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각자 독립하다 보니 서로 잘하려고 더욱 노력하게 된 덕분이죠. 같이 섞여 있으면 성과 구분이 잘 안 되어 합리적 보상이 어렵거든요. 여하튼 저희 세아는 수출, 기업공개, 지주회사제 등 국가의 굵직굵직한 산업정책에 맞춰 항상 남들보다 한발 앞섰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비록 대그룹은 아니지만 중요한 시기마다 이정표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 거죠.

세아그룹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룹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세아제강을 앞세워 강관사업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점차 신성장엔진을 장착해 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신사업에 진출하기도 했고, 인수합병(M&A)을 통해 잠재력 있는 회사를 품에 안기도 했다. 현재 세아그룹의 주축은 세아제강, 세아베스틸, 세아특수강 3사인데 세아베스틸(옛 기아특수강), 세아특수강(옛 창원강업) 두 회사는 모두 M&A를 토대로 키워낸 계열사다. 특히 세아베스틸은 2010년 기준 모기업인 세아제강보다 매출액이 웃돌 만큼 효자 계열사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게다가 영업이익률은 국내 주요 철강업체 가운데 으뜸일 정도로 알짜기업이다.

2003년 말 세아그룹이 기아특수강을 인수하기까지는 몇 차례 곡절이 있었다. 첫 번째 입찰에서는 워낙 큰 회사들이 나선다고 해서 그냥 포기했고, 두 번째 입찰에서는 골드만삭스에게 400억원 차이로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빼앗겼다. 크게 실망하고 있을 때 뜻밖의 반전이 벌어졌다. 골드만삭스가 주판알을 튕기다가 자신이 없었던지 포기하면서 결국 세아그룹이 기아특수강을 품에 안게 됐던 것이다. 두 번의 고배 뒤에 축배였다. 이 회장은 살며시 웃으며 “하느님의 뜻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 | 저희가 인수에 나섰을 때 기아특수강은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상태였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어요. 특수강 분야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워낙 다품종 소량생산에다 기술적으로도 까다로워 세계적으로 돈 버는 회사가 극히 드물어요. 당시 기아특수강은 매년 400억~500억원씩 적자를 내고 있었어요. 세간에는 회사 운영이 제대로 안 된다는 말이 많이 나돌았죠. 하지만 우리가 인수해 제대로만 경영하면 잘 되지 않겠느냐는 역발상을 했지요. 도전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봤어요. 물론 문제가 많았죠. 예를 들어 수출을 하는데 적자를 내면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수하자마자 판매 체계부터 불필요한 낭비까지 회사 시스템을 몽땅 고쳐나갔죠. 한마디로 원칙을 세운 겁니다.

기아특수강은 세아그룹의 품에 안기면서 세아베스틸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바뀐 것은 그저 사명뿐이 아니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만년 적자회사가 불과 1년 만에 흑자로 돌아선 것이다. 대체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 세아베스틸 군산공장 전경(위). 이운형 회장은 2009년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수상했다.

개인보다 먼저 회사를 위하는 기업문화

이 회장 | 우선 철강시장이 호황기로 접어든 덕을 봤죠. 나아가 직원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의식변화죠. 세아는 기본적으로 개인보다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기업문화가 강하거든요. 제가 무슨 부탁을 해도 회사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안 들어줘요(웃음). 그런 의식변화가 점차 스며들어 자리잡으면서 구매, 관리, 판매 등 전 부문에서 효율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죠. 그렇다고 사람을 내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저희는 세아베스틸 인수 첫 해에 흑자를 낸 이후 계속 투자를 해왔습니다. 거의 1조원 넘게요. 생산량은 당시 70만톤 규모에서 지금은 220만톤으로 3배가량 늘었죠. 인원이 크게 는 것도 아니에요. 한 10% 정도 늘었을까요.

강 회장 |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큼 회사의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뜻이군요. 그렇다면 세아그룹 계열사들의 전반적인 생산성은 어떻습니까? 1인당 생산성(총매출/인원수)이 국내 산업계에서 최고 수준인 것으로 봐도 될까요.

이 회장 | 아무래도 대규모 장치산업인 석유산업의 1인당 생산성이 가장 높겠죠. 물론 철강산업도 1인당 생산성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강 회장 |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완제품 산업의 성장은 고품질 소재와 부품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세아그룹도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 같습니다만.

이 회장 | 그럼요. 예를 들어 세아가 현대·기아차에 부품·소재를 많이 공급합니다. 국내 자동차산업이 막 성장할 때 도움을 줬죠. 저희가 선(先)투자해서 자동차부품업체들이 필요한 원재료를 제때 공급한 게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품을 수입해야 하니까 비용이나 물류 등 여러 문제가 있었겠죠.

강 회장 | 세아그룹의 가장 큰 수요산업은 어디인가요.

이 회장 | 현재로서는 자동차산업이 가장 큰 것 같아요. 조선, 기계, 중장비, 건설산업 등의 비중도 큽니다. 특히 건설 쪽 수요는 일반 건물보다 주로 공장이 많습니다. 공장이란 게 대부분 파이프로 연결되니까요.

강 회장 | 철강제품 분야는 무엇보다 기술력과 품질이 아주 중요할 텐데요. 세계 시장에서 세아그룹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회장 | 저희 계열사들이 만드는 품목이 워낙 많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세아ESAB의 선박 건조용 용접선의 경우에는 저희가 처음 개발한 후에 다른 업체들도 따라 만들기 시작했죠. 한국번디는 자동차나 냉장고에 들어가는 특수파이프를 만드는데 세계 어느 회사보다도 저희 공장이 품질이나 생산성에서 최고인 것 같습니다. 저희가 금속가공 분야에서는 참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세아베스틸 군산공장은 생산규모가 200만톤 이상 되는데 세계 특수강업체 중에서는 톱클래스입니다.



- 강석진 회장

세아그룹은 전형적인 철강전문기업이다. 주력사업은 철강제품 제조에 방점이 찍혀 있다. IT, 물류, 도시가스 등 다소 성격이 다른 자회사들이 일부 있지만 어디까지나 본업의 보조적 위치에 머무른다. 사실상 ‘철강 외길’만을 걸어온 기업인 셈이다. 한 우물만을 깊게 파고든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강 회장 | 우리나라 대기업들을 보면 사업다변화를 할 때 핵심사업과 상관없는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세아는 일관성 있게 철강제품 쪽으로 다변화한 게 인상적입니다.

이 회장 | 솔직히 말하면 다른 데로 눈 돌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파이프라는 게 예전에는 국가 기간산업 제품이라서 가격통제를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흑자를 내기도 어려웠어요. 인건비가 올라가는 것도 정부에서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00만호를 짓는다고 할 때 물건이 모자라니까 별안간 가격이 두 배로 뛰었는데도 저희는 덕을 본 게 없었어요. 딱 정해진 가격에 팔아야 하니까요. 시장에서 유통하는 사람들이 돈을 번 거죠. 말하자면 시장왜곡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본축적이 어려워 다른 걸 할 여력이 없었어요. 공장 짓기도 바쁘니까요. 그래서 저희가 아직 본사 건물이 없는 것 아닙니까. 저희가 2010년 6조원 이상 매출을 올렸는데 이런 규모의 기업 가운에 본사 사옥이 없는 건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세아그룹 본사는 서울 중구 봉래동 1가에 위치해 있다. 건너편으로 숭례문이 내려다보이는 빌딩의 3개층을 업무공간으로 쓰고 있다).

강 회장 | (짐짓 놀라면서) 그렇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회사 내실이 별로 안 좋으면서도 사옥만 엄청나게 크게 지어 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세아는 참 특이한 케이스로 보입니다.

이 회장 | 저희가 사실 이것저것 새로운 사업을 시도해봤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우리가 장점이 있는 사업을 해야 경쟁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죠. 제가 직원들한테 비판도 많이 받아요(웃음). 한때 금융업이라면 누구나 다 들어갔잖아요. IMF 이전에 말입니다. 그때 금융업에 들어가면 돈 버는데 왜 안 들어가느냐며 바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함께 금융업을 해보자는 제안도 자주 받았죠. 그런데 너도나도 금융업에 진출했다가 나중에 IMF가 터지면서 모기업까지 망가진 경우가 많았죠. 저희는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희는 어떤 사업이든 만약 들어간다면 우리가 기여할 게 뭐냐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보수적이다 보니 직원들은 우리가 다른 기업에 비해 새로운 사업에 투자를 너무 안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죠.

강 회장 | 과거 우리나라 기업들이 문어발식 다변화를 참 많이 했죠. IMF 전에 잭 웰치(전 GE 회장)가 늘 저한테 말한 게 “한국 기업들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다변화를 하는지 납득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가 GE 회장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GE 전체 사업을 3가지 핵심역량 그룹으로 나누고 그것과 관련 없는 사업을 모두 처분한 겁니다. 자신 있는 핵심역량에만 집중하자는 취지였죠. 그런 면에서 세아그룹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드물게 핵심 분야에만 완벽하게 집중해 탄탄한 철강기업이 된 것 같습니다.

이 회장 | 저희 경영전략을 요약하면 핵심역량 강화와 더불어 연관사업 확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특수강 원료인 몰리브덴, 니켈 등과 같은 자원을 장기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그래서 2010년에 자원개발 전담팀을 꾸렸고 몰리브덴을 가공하는 세아M&S(구 광양합금철)를 인수하기도 했죠.

 

1. 세아베스틸 대형단조공장 내부 모습.

2. 세아특수강 CHQ 와이어로 만든 2차 가공품들.

3. 이운형 회장(오른쪽)이 사업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정도경영·투명경영·합리경영 3대 경영철학

세아그룹을 이끌어가는 이운형 회장의 경영철학은 3가지다. 정도(正道)경영, 투명경영, 합리경영이 그것이다. 고 이종덕 선대 회장이 평생에 걸쳐 실천한 경영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이운형 회장은 “선대 회장님을 회상하면 현장중심경영과 정도경영 두 가지 철학이 먼저 떠오른다”며 “이는 오늘의 세아를 있게 한 더없이 중요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강 회장 | 창업주인 해암 이종덕 회장님 시절부터 세아그룹의 역사를 지탱해온 경영철학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릴까요.

이 회장 | 제가 세아는 우리나라 철강산업 역사에서 모범기업이라고 자부한다고 말씀드렸죠. 규모가 큰 다른 파이프 회사들은 IMF 지나면서 거의 다 부도가 나거나 사업을 축소했습니다. 그런데 세아는 어떻게 살아남아 더욱 성장했느냐? 그건 역시 회사 설립 때부터 원칙을 지키는 정도경영을 해온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게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점이죠. 저희 임직원들은 회사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얻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봐요. 회사를 위해서만 일을 하는 거죠. 그게 체질화된 게 아닌가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저희 회사 임원들은 골프를 칠 때도 각자 그린피를 냅니다. 물론 저도 개인 돈을 내죠. 그뿐 아니라 게임값도 내죠(일동 파안대소). 이런 생각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또 저희 선친께서 공장을 지을 때도 그랬지만 저희는 다른 회사보다 보통 30% 싸게 지어요. 왜냐, 저희가 직접 공장을 짓기도 하고, 직접 필요한 자재를 구매하기도 하고, 저희 엔지니어들이 직접 기계류를 만들기도 하거든요. 원가관리를 잘한다는 거죠. 그게 바로 경쟁력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다른 회사는 적자를 내는데 우리는 흑자를 내는 거죠. 아울러 현장을 우대하고 중시하는 현장중심경영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품질이나 생산성 측면에서 훨씬 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봅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아는 임직원 서로간의 신뢰관계가 두텁다는 점입니다. 저뿐 아니라 각 계열사 CEO들, 그리고 직원들이 모두 신뢰로 뭉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운형 회장은 철강업계에서 문화예술의 후원자이자 전도사로 유명하다. 특히 지난 2000년부터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을 맡아 8년간 재임하면서 오페라단원들의 수호천사 역할을 해왔다. 2008년부터는 후원회장으로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 지난 2009년에는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글로벌 명품기업 몽블랑이 세계 각국에서 문화예술 후원에 모범적으로 앞장서는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문화훈장’이다. 이 회장은 국내 철강업계가 문화예술 분야 후원을 늘리는 데도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는 “철강업계 사람들이 (문화활동 덕에)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들 그래요”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강 회장 | 회장님께서는 문화예술 분야에도 많은 공헌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이 회장 | 저희 숙부님이 서울대 미대를 나오셨습니다. 큰 누이는 한국무용을 했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따라다니며 구경을 많이 했죠. 후원활동을 시작한 것은 다른 계기가 있습니다. <아침이슬>의 작곡가이자 극단 학전 대표인 김민기씨가 고등학교 후배예요. 언젠가 객석을 만드는 데 재정적으로 좀 도와줬더니 그렇게 고마워하더군요. 그때 ‘아, 예술가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은 솔직히 얼떨결에 맡은 겁니다(웃음). 국립극장 산하에서 재단으로 독립하게 됐을 때 평소 알고 지내던 박수길 교수(한양대 음대)가 제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제가 오페라에 문외한이지만 상황이 다급하다고 하기에 우선 이름만 올려놓고 나중에 좋은 분을 알아보자고 했죠. 그랬더니 문화부장관으로부터 덜컥 임명장이 온 거예요. 그걸 보니 ‘어, 이거 맡아야 하나’ 싶더군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된 거예요. 막상 이사장을 맡으니까 도와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자주 형편을 들여다봤는데, 어느 날 문득 예술가들에게 존경심이 생기더군요. 그걸 계기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후원을 하게 된 겁니다. 처음 우리 직원들에게 오페라 같이 보러 가자고 하니까 싫어하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표가 없어서 서로 가겠다고 다툴 정도예요(웃음). 

강 회장 | 그때 국립오페라단에서 회장님께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국내 경영자 중에서도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이 회장 | (웃음을 띠며) 그것보다는 ‘아, 이 사람이 거절을 잘 못하는구나’ 생각한 거죠(일동 박장대소).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튕기거나 뻣뻣하게 나오는데 저는 같이 걱정해주고 하니까 말입니다.

강 회장 | 결국 회장님 덕분에 세아 임직원들이 전부 문화를 좋아하게 되고 문화에 가까워졌는데, 그러면서 혹시 일이나 경영에 임하는 마인드가 훨씬 창조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이 회장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화예술과 경영이 굉장히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가령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같은 오페라를 예로 들면 똑같은 스토리이더라도 연출가에 따라 항상 새롭고 다른 작품을 창조하거든요. 똑같은 스토리지만 똑같지 않은 겁니다. 사람들이 계속 찾아가서 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경영도 마찬가지죠. 사장이 다양한 전문가들을 모아서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하는 거니까 아주 비슷한 점이 많은 거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죠. 사실 어느 기업이든 제품을 만드는 건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인간성과 재미, 감동이 들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건 결국 문화적인 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철강업계의 대표적인 문화 전도사 명성

강 회장 | 회장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오페라 연출가나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다양한 기능을 모아 창조적으로 조화시키는 일을 하죠. 그런 면에서 기업 경영자들은 문화예술로부터 창조적인 경영의 영감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이 회장 | 사실 세아그룹이 잘나가는 것은 저보다는 각 사의 CEO들이 전체적인 책임을 맡아 잘해주니까 가능한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에 ‘운(運)’자가 들어가서 운이 좋은 것도 같아요(웃음). 그분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강 회장 | 회장님께서는 각 계열사 전문경영인들에게 경영상의 책임과 권한을 대부분 위임하고 계신가 봅니다. 자율경영이나 책임경영 차원에서 말입니다.

이 회장 | 맞습니다. 물론 한 달에 한 번씩은 각 사 대표이사가 와서 전반적인 경영현황 보고도 하고 상의도 합니다. 전체 경영진 회의는 1년에 두 번 정도 갖습니다.

강 회장 | 그나저나 회장님은 얼굴이 40대 청년 같습니다(실제 이 회장은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 보였다. 예순다섯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마음을 비워놓고 전문경영인들에게 일상적인 경영을 위임해서 그런가요(웃음).

이 회장 | 제가 사실 머리가 하얗게 셌어요.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이건 제가 물들인 게 아니라 집사람 작품이에요. 칠(염색)도 하고 새치 나면 뽑아주기도 해요(웃음).

강 회장 | 참, 두 분의 애정이 끔찍이도 깊네요(일동 웃음).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세계 톱10 선진국으로 가고 있는데, 아직 문화적으로는 선진국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 문화도 선진화해서 세계에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보는데요.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회장 | 우리나라 사람들이 능력이 있잖아요. 외국에서 콩쿠르를 하면 한국 사람 오지 말라고 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왜냐, 한국 사람이 전부 1등을 해버리니까요. 굉장히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미국, 유럽에 비해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매우 적어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 오페라가수가 한국에 오면 꼭 이탈리아 대사가 그 사람을 초청하고 챙기고 하거든요. 어떤 때는 항공료도 낸다 그래요. 프랑스나 독일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외국에 가서 뭐 한다고 할 때 한국 대사가 항상 나올 수 있나요? 그건 예산이 없어 못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보다 많은 지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 회장 |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예산 증액뿐 아니라 기업들도 문화예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후원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한국의 문화 수준이 높아져 문화 선진국으로 널리 알려진다면 우리 기업들의 활동에 도움을 줍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경제 선진국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죠.

세아그룹의 사명(社名)인 세아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기업’이 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아울러 세아그룹의 기업 로고를 보면 ‘SeAH’라는 영어 표기 위에 빨간 V자가 얹혀 있다. 이 V자는 벌겋게 달궈진 무쇠덩어리를 형상화한 것인데, 무쇠를 녹일 만한 뜨거운 열정과 강철처럼 단단한 신념으로 세아라는 기업의 가치와 위상을 드높이겠다는 다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강관산업의 선구자이자 철강산업의 리더로 자리매김해온 세아그룹. 그 우직하고 꾸준한 발걸음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기업이 되겠다는 다짐이 결코 허언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근거가 아닐까.

 

  Tip. 세아그룹 경영 현황 

세계 곳곳 생산기지 확보 ‘글로벌 세아’ 도약

세아그룹은 모기업인 세아제강과 지주회사인 세아홀딩스를 양대 축으로 국내외에 걸쳐 45개 계열사를 거느린 철강제품 제조 전문기업이다. 세아제강, 세아베스틸, 세아특수강이 삼각편대를 이뤄 주력기업 구실을 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세아스틸아메리카를 설립하면서 해외 진출의 첫 걸음을 뗐고, 현재는 미국, 멕시코(이상 미주), 중국,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이상 아시아), 아랍에미리트(중동), 뉴질랜드(오세아니아) 등지에 현지법인 및 생산공장을 두고 있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세아제강은 국내 최초로 용접강관의 대명사인 API강관을 개발하는 등 한국 강관업계를 주도해왔다. 연간 100만톤 생산 규모의 포항공장은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수준으로 평가된다. 이밖에 군산공장, 창원공장을 핵심 생산거점으로 삼아 배관용·송유용·유정용·기계구조용 강관을 비롯해 스파이럴 강관, 스테인리스 강관, 티타늄 튜브, 아연도 강판, 컬러 강판 등 연간 총 140만톤 규모의 다양한 철강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또 세아베스틸은 국내 1위의 특수강 기업으로 세계 톱클래스 수준의 군산공장을 통해 연간 220만톤 규모의 특수강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세아베스틸에서 생산하는 특수강은 자동차용, 건설중장비용, 풍력발전 및 조선용 부품으로 공급되고 있다. 세아특수강은 자동차, 전자제품, 건설 등에 사용되는 볼트, 너트, 스크루 등 체결부품 소재로 쓰이는 CHQ와이어(냉간압조용 선재) 시장에서 국내 넘버원 기업이다. 현재 시장점유율은 약 40%에 달한다. 세계적인 종합부품소재 기업을 목표로 생산거점 및 신규사업 확대를 추진 중이다.

 

  Tip. 세아그룹의 사회적 책임 철학 

“기업은 사회구성원 행복증진에 앞장서야”

2009년 세계 철강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수요가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거의 반 토막이 났을 정도였다. 모든 철강업체들이 한파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세아그룹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의 수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2010년 주력기업인 세아베스틸의 주주총회에서는 이례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대주주를 제외한 소액주주들에게만 배당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이익이 적게 나더라도 대주주 배당부터 챙기는 기업이 적지 않은 현실에 비춰 매우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운형 회장의 설명이다.

“당시 결정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수많은 소액주주들은 저희를 믿고 돈을 맡겨 놓은 거잖아요. 그런데 배당을 못 받으면 손해를 보는 거죠. 그래서 저희(세아홀딩스) 지분 60%에 대해서는 배당하지 말고 나머지 40%에 대해서는 배당을 하자고 결정했어요.”

세아그룹은 사업 성격상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않지만 무대 뒤에서 조용하면서도 꾸준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세아의 사회공헌활동은 크게 지역사회 봉사활동, 문화예술단체 후원활동, 장학사업의 세 갈래로 나뉜다. 이운형 회장은 평소 각 계열사 CEO들에게 영업이익의 1% 이상은 사회공헌을 위해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한다.

“이제 기업이 고용을 창출하고 흑자를 내고 세금을 잘 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시대가 됐습니다. 회사는 물론 임직원들도 함께 나서서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가치와 행복을 증진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나가야 해요.”

 

  Tip. 세아그룹의 인재상 

‘겸허한 자세와 감사하는 마음’이 기본덕목

세아가 추구하는 인재상은 기본 덕목인 겸허한 자세와 감사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사람, 적응력과 융화력을 갖춘 사람이다. 이운형 회장은 “머리가 영리하고 재치가 있는 사람보다는 정직하고 꾸준한 사람, 좋은 인성을 갖춘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해왔다”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면서도 우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일해온 직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세아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운형 회장은… 

1947년생 / 1965 경기고 졸업 / 1969 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 / 1974 미국 미시건대 경영대학원 졸업 / 1980 부산파이프(현 세아제강) 대표이사 사장 / 1981 금탑산업훈장 수훈 / 1995~ 세아제강 대표이사 회장 / 2000~2007 국립오페라단 이사장 / 2000~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 2001~ 세아홀딩스 회장 / 2006~ 한국메세나협의회 부회장 / 2007~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 2008~ 국립오페라단 후원회장 / 2009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 수상

강석진 회장은… 

연세대 대학원(공업경영학 석사)을 졸업하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30여년 간 제너럴일렉트릭(GE)에 몸담았고, 그중 20년은 GE코리아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 전문경영인학회 이사장, 서강대·이화여대 경영대 겸임교수, CEO컨설팅그룹 회장이다. 서양화가로도 활동해 세계미술문화진흥회 이사장과 한·일 서양화 교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역서: <당신의 운명을 지배하라>, <GE 신화의 비밀>, <잭 웰치와 GE방식> 등

/ 대담 :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전 GE코리아 회 / 정리 : 김윤현 기자 / 송창섭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