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건설업체 플래너스종합건설(이하 플래너스)의 신기옥(72) 회장은 평생 화가를 꿈꿨다. 40여 년간 취미 삼아 짬짬이 붓을 들던 신 회장은 2007년 마침내 전업화가로 데뷔했다.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한 기반들을 수십 년 동안 닦아놓은 뒤였다. 지난 7월 13일 개인 화실에서 만난 그의 표정엔 미소와 회한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때론 그를 웃게 만들고, 울게도 만들었던 ‘캔버스 스토리’를 들어보자.

신기옥 회장은 2007년 생애 첫 전시회를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1964년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이래 무려 40여 년 만의 등단이었다. 평단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미술계 관계자들의 추천 덕분에 그는 같은 해 국내 최대 미술전시회인 서울아트페어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단숨에 국내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했다. 작품을 전시한 수천명의 화가들 중 전체 판매 순위 1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엔 세계 최대 미술시장인 중국 상하이국립미술관의 초대전까지 열었다. 덕분에 신 회장의 그림은 100호(160x130cm) 작품의 경우 3000만원을 가뿐히 넘을 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 경영자에서 화가로 ‘인생 2막’을 화려하게 열어젖힌 것이다.



그는 아직도 데뷔전의 감격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30년간 건설회사를 운영하면서 단 한순간도 붓과 캔버스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등단 후 아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지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평생의 꿈이던 화가로 인정받게 된 지금입니다.” 



1960년대. 당시에도 홍대는 전국의 미술 엘리트들이 몰려드는 예술의 요람이었다. 추상미술의 대가 서승원, 최명영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바로 신 회장의 동기였다. 신 회장도 촉망받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국내 현대미술에서 한 획을 그은 전위미술 그룹 ‘오리진’의 창립 멤버로 각종 공모전을 휩쓸며 교수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졸업할 무렵 깊은 고민에 빠졌다. 



- 잘 정리된 화구에서 신기옥 회장의 깔끔한 성격이 엿보인다.

불투명한 미래…화가 꿈 잠시 접어

화가로서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이다. 예술이 천대받던 시절이라 화가들에겐 가난이 숙명처럼 따라다녔다. “미국과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던 백남준도 국내에선 무명이나 마찬가지였죠. ‘미술시장’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어서 작품만으로는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은 인격을 결정합니다.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원 없이 그림을 그리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죠.”



그는 화가로서의 꿈을 당분간 접어두기로 했다. 첫 직장은 동양방송(TBC, 1980년 KBS로 흡수)이었다. 영화·드라마 세트 조성하는 역할이었지만 큰돈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방송국을 뛰쳐나와 처음으로 꾸린 사업체는 미술학원. 초반부터 ‘족집게’ 입시지도로 원생들이 몰리면서 당시로선 상당히 큰돈인 매월 200만원의 수입을 얻었다.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었다. 이때 모은 돈으로 강남구 논현동에 살 집을 직접 지은 것이 건설업계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독특하고 수려한 디자인이 인근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건축의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플래너스의 주무대는 1970년대 이후 급부상한 강남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수백개의 건설사들이 명멸했지만 플래너스가 중견건설사로 자리 잡은 것은 신 회장의 탁월한 미적 감각 덕분이다. 실용적이면서도 조형미가 돋보이는 고급주택과 오피스 건물들이 강남권 신흥부자들의 기호에 맞아떨어졌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곳곳에 포진한 80여 채의 오피스 건물이 플래너스의 포트폴리오를 이룬다.



회사가 성장할수록 신 회장의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책상 서랍에 넣어둔 붓과 물감, 팔레트 때문이었다. 비수기인 겨울이나 휴가를 이용해 취미 삼아 1~2개 작품을 그렸지만 이는 화가를 꿈꾸는 열망에 기름만 부었다. “당장 은퇴하고픈 생각이 들수록 더욱 독하게 경영에 매달렸습니다. 우선 제가 은퇴하더라도 회사가 안전하도록 기반을 닦아야 했거든요. 사업이든 예술이든 프로가 되려면 모든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경영도 결국 화가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던 셈이죠.”



그간의 경영활동은 창작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관람객의 감성적인 니즈를 발굴하는 혜안을 길러줬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면 신 회장의 그림은 매우 단순한 구조다. 우선 배경은 수직으로 겹겹이 포개진 직선들이다. ‘0’과 ‘1’이라는 신호가 무한히 반복되는 디지털 코드와 도시를 가득 메운 건물을 상징한다. 중앙에는 연잎, 나비, 꽃, 여인 등 자연에 대한 상징들이 배치된다. 몇 가지 간단한 상징물로 캔버스에 문명과 자연을 공존시킨 셈이다. 



“현대 문화는 단순함이 특징입니다. 클래식이나 재즈와 달리 따라 부르기 쉬운 유행가들이 대표적이죠. 단순한 멜로디와 리듬이 반복됩니다. 이는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복잡한 형태를 버린 팝아트가 부상한 것도 대중문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제 그림에서도 관람객들에게 익숙하도록 단순함이 강조됐죠. 나름 관람객들에 대한 ‘마케팅’입니다.”    



신 회장은 주로 경기도 양평의 개인 화실에 머문다. ‘청류산방(淸流山房)’이라는 맑은 계곡과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교외다. 이곳에서 그림과 서예, 다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마치 신선 같지만 그의 하루는 경영자 시절 이상으로 치열하다. 2~3개 작품을 동시에 그리면서 새벽 3~4시까지 작업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다른 화가들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의욕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이제 데뷔 4년차라 아직까지 신인이기도 하고요. 제 작품들만 모아놓은 미술관을 갖추려면 부지런히 그려야죠.”

조석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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