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76) 동원그룹 회장은 ‘살아있는’ 장보고다. 신라의 장보고가 9세기 초·중반 서해를 무대로 주변의 제해권을 장악한 동아시아의 해상왕이었다면, 김재철 회장은 조그만 반도국에 머물러 있던 우리나라의 경제활동 영역을 드넓은 대양으로 확장시킨 한국 원양산업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다. 그에게 따라붙는 ‘21세기의 장보고’라는 수식어는 그래서 자연스럽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 장보고라는 애칭을 붙이는 것은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21세기 해양왕 김재철’로 부르는 게 어떨까 싶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미완의 해상왕국으로 끝난 반면 김재철 회장의 동원호(號)는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드는 일등 원양기업의 기세를 더욱 키워가고 있어서다. 그는 한국이 바다에서 보다 큰 미래를 일궈 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해양강국론자이자 바다예찬론자다. 한국무역협회장과 여수세계박람회유치위원장으로 활동할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바다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이후 경영일선으로 돌아가 언론과의 접촉을 삼갔던 그가 <이코노미플러스>의 초대장을 받아들였다. 대담자인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이 “창업 기업가 세대의 원로로서 평생 실천해 온 도전정신과 기업가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며 삼고초려한 끝에 성사된 일이다. 지난 4월 8일 오후 2시께 서울 양재동 동원그룹 사옥 회장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가슴속에 담아 뒀던 이야기 보따리를 남김없이 풀어헤쳤다. 진지한 대화와 유쾌한 정담이 쉴 새 없이 오고 간 이번 대담은 무려 4시간이 지나서야 마쳤다. 재벌그룹 총수로서 이만큼 긴 인터뷰 시간을 할애하기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재철 회장은 “우리 국민이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환기시킬 수만 있다면 이번 대담은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21세기 장보고’가 밝힌 ‘나의 삶, 나의 경영’



“바다는 실력으로 승부 거는 곳…

     

한국은 해양강국 될 역량 충분하다”

김재철 회장은 마도로스 출신으로 세계 최고 원양기업을 일군 입지전의 주인공이다.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어로학과를 졸업하고 곧장 원양어선에 올라탄 그는 약관 28세에 선장 자리를 차지했다. 이어 서른에 소속 원양회사의 수산부장, 서른넷에는 이사직에 오를 만큼 승승장구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원양어업의 개척기. 멀리 거칠고 험한 바다에서 어획 실력과 리더십을 동시에 발휘할 만한 전문가들이 드문 시절이었다. 1969년 4월, 서른다섯의 젊은 원양어업 전문가 김재철은 마침내 창업의 길을 택했다. 오늘날 동원그룹의 모태기업인 동원산업을 설립한 것이다. ‘동원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그 시절에는 30대 나이에 회사를 설립한다는 게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는 전남 강진군이 고향이다. 바다 사나이라는 숙명을 타고났을 법도 한데 사실 학창시절만 해도 농업인이 되는 길을 걸었다. 운명이 바뀐 건 강진농고 3학년 때였다. 평소 존경하는 담임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열변을 토하면서 강조한 말씀이 가슴에 ‘팍 꽂힌’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한다.



- 김재철 회장(오른쪽)과 강석진 회장이 대담을 하던 도중 활짝 웃고 있다.



 바다사나이, 오대양 육대주에

 도전장을 내밀다

“당시 사모아에서는 일본 배, 한국 배가 40~50척가량 조업하고 있었는데 제가 일을 잘하니까 ‘명선장’으로 이름났지요. 그러니까 자신이 생겼어요.”

강석진 회장(이하 강 회장) | 김 회장님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세계 오대양에 도전한 분입니다. 사람들이 회장님을 가리켜 ‘21세기의 장보고’라고도 말하죠. 28세에 선장이 됐고 30대 중반에 일본에서 중고 어선을 빌려 동원산업을 창업했는데, 그 시대 환경에 비춰 보면 도전정신이 참 대단하셨습니다.

김재철 회장(이하 김 회장) | 도전정신이라면 도전정신인데, 사실 그때는 젊기에 겁이 없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웃음). 제가 농고를 다녔으니 당연히 농대로 가게 돼 있었죠(당시 그는 서울대 농대 진학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최석진 선생님(담임교사)이 어느 날 “너희들, 서울대가 최고인 줄 아는데 거기 나와 봐야 지금 나처럼 입씨름하며 살기밖에 더하냐? 나 같으면 바다 계통 학교 간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교무실로 찾아가 바다 계통 학교가 어떤 곳이 있느냐고 여쭸는데 선생님께서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가 살길은 바다에 있다”고만 하시는 거예요. 부랴부랴 알아보니 부산수산대와 해양대가 있더군요. 해양대는 당시 교통부 산하 직업학교라서 학위가 안 나온다고 하기에 수산대를 선택했죠. 또 제일 좋은 과가 어디냐 물어보니 어로학과라고 해서 지원하게 된 거죠. 막상 입학해 보니 학교 건물은 미군에 수용돼 있는 터라 판잣집 같은 데서 수업을 받는 지경이었어요. 국내에선 공부하는 게 한계가 있구나 싶더군요. 그러다 졸업하던 해(1958년)에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출항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왕이면 원양에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그 원양회사(제동산업)를 찾아갔더니 절 우습게 보더라고요. 여기가 어딘데 너 같은 풋내기가 오느냐는 거였어요. 최초의 원양어선 출항이라 국내 최고 선원들만 탈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수산대도 나왔고 원양어선을 꼭 타고 싶다며 계속 떼를 썼죠. 그쪽에서 “배에는 침대도 없다”고 하면, 난 “그럼 침대 갖고 타겠다”고 맞받았어요. “정말 가겠느냐”고 묻기에 “정말 가고 싶다. 월급도 안 받고, 내가 먹을 식량도 갖고 타겠다. 죽어도 괜찮다”고 졸라댔더니 “밥은 먹여주겠는데 월급은 없다”면서 결국 허락하더군요. 나중에 승선할 때 야전침대를 짊어지고 탔죠. 그렇게 탄 배가 바로 ‘지남호’였습니다.

‘지남호(指南號)’는 김 회장의 인생을 바꿔 놓은 배이자 한국 원양어업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기념비적 어선이기도 하다. 미국이 해양조사선으로 건조한 ‘워싱턴호’를 들여와 개조한 230톤급 어선 지남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남쪽 바다에서 돈을 벌어 오라’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였을 만큼 장안의 화제였다. 1957년 6월 29일 부산항, 지남호가 제1부두를 서서히 빠져나갔다. 비록 시험조업 목적이었지만 한국 최초의 원양 출어 순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초 상업조업은 이듬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남호의 첫 출항은 한마디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 배 좀 탄다는 사람들로 선원을 꾸렸지만 문제는 원양어업을 경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초보라서 어떤 어종이 비싼지, 또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지남호는 출항 후 47일을 헤맨 끝에 인도양에서 처음으로 사람 키만 한 새치를 낚아 올렸다(당시에는 그게 새치인지 참치인지 구분도 못 했다고 한다). 하지만 출항 108일 만에 돌아올 때는 10톤의 어획물을 싣고 나름대로 개선나팔을 불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상품(上品) 세 마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져 주한 외교사절단 선물로 쓰였다. ‘다랑어’라는 원래 이름 대신 ‘참으로 좋은 물고기’라는 뜻의 ‘참치’라는 이름이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강 회장 | 수산대를 졸업하면 안정된 공직으로 갈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험한 길을 선택하셨습니까.

김 회장 | 당시는 호기심이 참 많았을 때죠. 그때만 해도 부산수산대는 ‘뱃놈대학’이라고 해서 안 알아줬는데, 육상 근무를 마다하고 바다에 간다고 하니 ‘크레이지(미친)’라는 소리까지 들었죠. 하지만 바다에 나가 보니 정말 그곳에 길이 있다 싶더군요. 물론 고생은 많이 했지만요. 그때는 선원들도 참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출항했어요. 우리 국민이 제대로 참치를 알게 된 게 ‘동원 참치캔’이 출시된 1982년 이후입니다. 그보다 24년 전이었으니 참치가 어떤 생선인지 알 리가 없었지요. 나는 일본서 어류도감을 구해 우리가 잡은 물고기가 참치가 맞는지 대조, 확인하며 계속 공부했습니다. 참치가 아닌 고기는 버리고, 참치 중에서도 비싼 것만 실어서 갔죠.

강 회장 | 그 전까지 우리에게 원양어업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참치를 알 리가 없었겠죠. 그나마 저는 청년시절 삼일빌딩 옆 참칫집에 단골로 다니면서 참치를 알게 됐는데, 처음 느낀 환상적인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김 회장 | 처음 배를 탔을 때 제 직책이 실습항해사였어요. 1년간 무보수로 일한 다음 정식 항해사가 될 수 있었죠. 그 무렵 남태평양 참치잡이가 돈벌이가 된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배를 건조해 원양어업에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원양어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제가 배를 탄 지 2년 반 만에 선장이 된 것도 그 덕분이었죠. 28살 때 선장이 처음 됐는데, 그때 갑판장이 꼭 제 아버지 나이였어요. 선장이 소대장이라면 갑판장은 특무상사입니다. 선원들도 모두 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그러니 모두가 저 어린 선장한테 목숨을 맡겨도 되나 하며 불안해했죠. 처음에 참 고비가 많았습니다.

강 회장 | 회장님 창업 초기 얘기를 들으니 좀 이해됩니다만, 경영학계에서는 회장님의 경영철학을 ‘캔두이즘’(Candoism: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불굴의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김 회장 | 처음엔 백지상태로 나갔지요. 다른 사람들은 경험에만 의존했지만 저는 대학서 배웠으니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셈이었죠. 당시 사모아에서는 일본 배, 한국 배가 40~50척가량 조업하고 있었는데 제가 일을 잘하니까 ‘명선장’으로 이름났지요. 그러니까 자신이 생겼어요. 빨리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주변에서 “그런 좋은 기술 갖고 왜 월급쟁이만 하느냐, 사업을 왜 안 하느냐, 우리가 지원할 테니 한번 해 봐라”고들 권유를 많이 해서였죠. 어떤 사람들은 그러더군요. 제가 우리나라 벤처 1호라고요. 요새야 20대, 30대 사장이 많지만 당시는 나이 50에 대기업 부장 하면 잘한다고 했던 시절입니다. 제가 고려원양 수산부장으로 근무할 때 대학 9년 선배를 차장으로 데리고 일했습니다. 왜냐면 참치회사인데 참치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남들이 안 갈 때 원양에 다녀왔으니 김 아무개가 잘 안다고 이름이 알려진 덕분이었죠. 1965년 고려원양 시절 인도양에 처음 나가게 됐는데 거기 가 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배 3척을 이끌고 갔습니다. 수산부장, 선장, 선단장까지 1인3역을 했지요. 그만큼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본사에서도 상황을 판단할 만한 사람이 드물었고, 게다가 당시는 전화도 안 되던 시절 아닙니까? 호랑이도 잡아 본 사람이 잡는다고, 인도양에 다녀왔더니 바로 이사로 승진을 시키더군요. 그러곤 주변에서 하도 독립하라고들 해서 사업을 일찍 시작하게 됐습니다.



- 김재철 회장이 집무실에 걸어 놓은 ‘거꾸로 세계지도’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1957년 지남호가 인도양에서 잡은 대형 생선을 놓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생선 바로 왼쪽)과 정부 인사, 주한 외교사절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Tip | 김재철 회장에게 바다란…

“인생수업의 도장이자 제2 고향”

김재철 회장의 고향은 전남 강진군이다. 어렸을 적부터 바다와 숙명적인 인연을 맺었을 법하지만 뜻밖에도 그렇지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태어난 고향집이 바다와는 좀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어릴 때는 바다를 모르고 자랐다고 한다. 그가 바다와 더불어 일생의 인연을 맺은 것은 부산수산대 진학 이후인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수산계 선구자들 중에는 바닷가 출신보다 오히려 산골 출신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김 회장은 “아마 바다의 무서움을 몰랐기 때문에 동경하는 마음으로 바다를 택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 아닌가”라고 풀이했다.



그에게 바다는 “인생수업의 도장이자 생활의 장”이었고 “제2의 고향”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요즘도 사업 구상을 할 때면 바다에 간다고 한다. 최근에는 주변의 권유로 바다와 관련된 호(號)를 하나 지으려고 생각 중이다. 바다 양(洋)자를 넣은 호로 자양(滋洋: 풍요로운 바다)과 자양(慈洋: 자애로운 바다) 둘을 후보로 저울질하고 있다. 내심 전자에 마음이 좀 더 기울어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바다에서 삶의 철학을 완성했고 평생의 교훈을 얻었다. 거친 바다 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수 차례 만나면서 체득한 깨우침이다. “거센 풍랑을 만나면 인생의 끝이 보여요. 세차게 몰아치는 파도와 맞서다 보면 순간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런 고비를 넘기고 나면 인생을 새로 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힘들게 살아났는데, 남은 인생을 구질구질하게 살 필요가 있겠어요.”



‘거꾸로 세계지도’에 담긴

 진취적 발상과 기백

“도전정신이란 건 세계에 나가 보면 자연히 생길 수 있어요.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 위치가 어떤지를 알게 되면 발상의 전환이 됩니다. 거꾸로 된 세계지도는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하자는 취지지요.”



- 강석진 회장



김재철 회장 집무실의 한쪽 벽면에는 언뜻 보면 ‘이상야릇하게’ 생긴 대형 지도가 하나 걸려 있다. 세계지도인 것 같긴 한데, 우리가 아는 지도와는 위아래가 뒤바뀐 모양새다. 이름하여 ‘거꾸로 세계지도’다. 김 회장은 한국무역협회장 시절이던 2000년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는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당시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로 등극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거꾸로 세계지도’는 그가 이 책을 쓴 모티프다.

김 회장 | 이 지도를 처음 제작한 게 한 10년 됐죠. 그런데 내가 창안한 게 아니라 남반구에 가면 더러 볼 수 있어요. 지구라는 건 조그만 별이잖아요. 아니, 별 축에도 안 드는 행성인데, 하늘의 그 많은 별들은 위아래가 없지 않습니까? 지구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대항해 시대 유럽인들이 세계지도를 그리며 자기들을 위로 하고 아프리카를 아래로 한 겁니다. 그게 오늘날 세계지도로 정착된 거고, 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해 왔어요. 남반구를 위로 둬도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우리가 고정관념 때문에 이 지도를 거꾸로 된 지도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말도 잘못된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바꾸고 발상의 전환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로 ‘거꾸로 세계지도’를 보급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 쪽으로 성큼 다가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술술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보통 지도는 우리나라가 대륙에 매달려 있잖아요. 반면 이 지도에서는 태평양 쪽으로 서 있지요. 왼편으로는 태평양의 파도를 일본 열도가 방파제처럼 늘어서서 막아주고, 오른편으로는 중국이 유라시아 대륙의 거센 강풍을 막아주는 형세입니다. 풍수학자들은 ‘좌청룡 우백호’ 형상이라고 합니다. 제가 무역협회장 시절 외국 손님들이 이 지도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면서 하나 줄 수 없느냐고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아예 잔뜩 프린트해 놓고 선물로 주곤 했죠.”

강 회장 | 저도 회장님이 주신 지도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지요. 이 거꾸로 된 세계지도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줘요. 세계를 보는 시각이 확 달라지고, 세계화 마인드가 훨씬 더 잘 전달돼요. 우리가 밑에 있는 게 아니고 위에 있는 게 특히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김 회장 | 도전정신으로부터 우리 대화가 시작됐는데, 도전정신이란 건 세계에 나가 보면 자연히 생길 수 있어요.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 위치가 어떤지를 알게 되면 발상의 전환이 됩니다. 이 지도는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하자는 취지지요. 제가 과거 조선일보에 ‘상자 밖을 보며 뛰자’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나라는 조그만 상자에 불과하거든요. 그 안에서 서로 경쟁한다는 건 버스 안에서 자리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강 회장 | 앞으로 우리 교과서에도 거꾸로 된 세계지도를 공식적으로 싣는다면 어린 학생들의 세계관이 확 달라지고 또한 어릴 적부터 세계화 마인드를 키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김 회장은 ‘거꾸로 세계지도’ 앞에서 계속 한반도 예찬론을 이어갔다. “우리 조선업이 발달한 것은 수심이 어느 정도 되는 바다가 있어서 가능합니다. 그런 데다 동해는 깊은 바다, 서해는 얕은 바다여서 우리는 수산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지금은 남획으로 어장이 많이 황폐해졌지만 서해는 원래 세계 3대 어장으로 불릴 정도로 어족자원이 풍부했어요.”

강 회장 | 처음 배를 빌려 회사를 차렸을 때 어느 항로로 어디까지 나아갔습니까.

김 회장 | (손끝으로 한 지점을 가리키며) 사모아로 갔었죠. 사모아는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발상지나 마찬가집니다. 처음엔 가는 데 꼬박 23일 걸리더군요. 그곳의 ‘아메리칸 사모아’라는 작은 섬에는 남태평양에서 가장 좋은 항구가 있었죠. 1963년 사모아 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참치 통조림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그게 ‘스타키스트’ 공장이었지요(70년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스타키스트는 세계 최고 참치 브랜드이자 미국 가공참치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으로 지난 2008년 동원그룹에 인수됐다). 제가 잡아서 납품한 참치가 바로 이 공장에서 처음 생산된 참치캔의 재료로 쓰였습니다. 그땐 우리가 워낙 돈이 없었을 때라 선금을 받아 조업하고 나중에 고기를 잡아 갚았지요. 스타키스트는 우리 원양어업과는 인연이 아주 깊은 셈이죠. 공장 준공 20주년 기념식 때는 저를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지도 위에 작은 점으로 표시된 사모아를 바라보는 김 회장의 눈길엔 깊은 감회가 서려 있는 듯했다. 젊은 시절 그가 첫 도전에 나섰던 장소가 아닌가. 게다가 자신에게 돈벌이를 안겨 줬던 그곳 회사를 무려 40여 년이 지나 사들여 주인이 됐으니 그 벅찬 감회가 어찌 쉽사리 사라질까. 동원그룹의 스타키스트 인수는 사모아 사람들에게도 큰 화제였다고 한다.





  Tip | 인재양성의 비결 ‘선장 리더십’론

김정태·박현주 등 ‘김재철 사단’ 길러내기도

“배가 폭풍권에서 사투를 벌일 때 선원들은 휘몰아치는 파도를 보지 않고 선장의 얼굴을 봅니다. 선장의 얼굴에 확고한 자신감이 있을 때는 선원들도 안도하고 명령에 따르지만, 선장의 얼굴에 불안감이 보이면 선원들은 더욱 안절부절못하여 위기를 자초하게 됩니다. 저는 항상 윗사람일수록 더 노력하고 더 알고 더 희생해서 아랫사람의 신뢰를 살 것을 강조합니다.”



김재철 회장의 리더십 철학은 어떤 상황에도 확고한 자신감으로 구성원을 이끌어 조직의 명운을 책임질 줄 아는 ‘선장 리더십’론으로 요약된다. 그는 동시에 아랫사람에게 권한과 책임을 최대한 부여해 부하직원들이 스스로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 신뢰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그 덕분인지 이른바 ‘김재철 사단’이라 불리는 수많은 인재들이 그를 거쳐 갔다. 특히 오늘날 한국 금융산업을 선도하는 경영자들 중에는 옛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출신들이 꽤 많다. 주택은행장과 통합 국민은행 초대 행장을 역임한 김정태 전 행장과 국내 최대 금융투자그룹을 이끌고 있는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김재철 사단의 대표주자다.



김 전 행장은 1982년 동원증권 상무로 출발해 1998년 주택은행장으로 선임되기까지 동원증권의 간판이자 김 회장의 핵심 금융 브레인이었다. 관련업계에서는 김 전 행장이 자신의 인생 좌우명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라고 삼은 것도 그만큼 김 회장과의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박 회장은 고등학교(광주일고) 선배인 김 전 행장과의 인연으로 1988년 동원증권에 입사했다. 3년 후 33세의 나이에 국내 증권사 최연소 지점장(중앙지점장)에 올랐고, 그해 1조4000억원의 주식약정을 올려 전국 1위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2년 연속 전국 증권사 지점 중 약정고 1위, 1인당·지점당·일일/월별 생산성 전국 1위 등을 모두 휩쓸면서 최연소로 임원으로 승진하는 등 동원증권의 스타로 우뚝 섰다.



김재철 회장은 ‘김재철 사단’을 길러낸 데 대해 “본인들 스스로 굉장히 우수한 인재들이었죠. 저야 뭐 잔소리 외에는 한 게 별로 없어요. 다만 경영 결과는 사람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했지요”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에게 김정태 전 행장과 박현주 회장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박현주 회장은 영업에 특출한 능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리 때 지점장 서리로 발령을 냈는데 전국 1등을 하지 않겠습니까. 김정태 전 행장도 참 기억에 남는 사람입니다. 동원증권 사장으로 근무하다 주택은행장으로 간다고 사표를 내러 왔는데 어찌나 서운하든지. 하지만 소신껏 일하되 돈에 연연하지 말라고 퇴직금을 두둑하게 줬어요(웃음). 저하고 17년가량을 함께 일했는데 왜 섭섭하지 않았겠습니까.”



김 전 행장은 지금도 가끔 김 회장에게 연락을 한다고 한다. 박 회장과는 2009년 제3회 ‘언스트앤영 최우수 기업가상’ 시상식에서 오랜만에 만났다고 한다. 김 회장은 전년도 수상자 자격으로 참석했고, 박 회장은 그해 수상자였다. “박 회장이 그러더군요. ‘회장님께 배운 대로 했더니 이렇게 성공했습니다’라고 말이죠.” 박 회장은 자서전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에서 지점장 발령이 인생의 전환기가 됐다면서 “지점장 발령이 없었다면 나는 관리를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이 밖에 ‘김재철 사단’ 인사로는 박 회장과 함께 동원증권에서 근무한 펀드매니저 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 장인환 KTB자산운용 사장, 송상종 피데스투자자문 사장,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사장, 정태석 전 광주은행장 등이 꼽힌다.





 바다에서 배운 기업경영 철학의 정수

 ‘정도경영’

“모름지기 기업이란 고용을 창출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며, 이익을 내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예요. 나라가 유지되는 것도 기업이 내는 세금으로 가능한 겁니다.”

- 김재철 회장

강 회장 | 동원그룹의 사업 내용을 보면 동원시스템즈, 동원CNS 등 몇 개 회사를 빼면 대부분 원양어업과 식품사업, 그리고 이와 연관된 사업들입니다. 핵심역량에 집중하고 있는 튼튼한 사업구조인데요. 기업을 키워 오면서 핵심역량에만 전념한 특별한 마음가짐이나 뜻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김 회장 | 뭐, 배운 도둑질이 고기 잡는 거라서 그렇죠. 허허. 사실 한 우물만 파겠다고 했다기보다는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습니다. 다만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이것저것 벌리는 건 좋지 않아요. 제가 수산업을 하면서 한국 제일, 나아가 세계 제일 수산회사를 만드는 게 꿈이었는데 어느 시점에 그건 달성했더군요. 그런데 고기만 잡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걸 가공도 해야 하고, 또 소비자들에게 팔기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물류, 유통 등 주변산업으로 뻗어 나가게 된 거죠.

동원그룹은 기업지배구조 면에서 매우 선진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2001년 동원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하면서 일찌감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또한 2004년에는 금융사업 부문을 계열 분리해 동원금융지주로 독립시켰다. 사업 집중화와 주주가치 제고, 그리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라는 시대적 대의를 추구한 셈이다. 동원금융지주는 2005년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한 후 ‘아시아 최고의 투자은행’을 새로운 비전으로 삼아 한국투자금융지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김재철 회장은 금융사업과 식품사업을 두 아들에게 승계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남(김남구 부회장)은 한국투자금융그룹을 이끌고 있고, 차남(김남정 부사장)은 동원그룹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에서 경영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다. 동원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지정하는 대기업집단(재벌) 명단에서 2005년부터 이름이 사라졌다. 금융사업 부문을 계열 분리하면서 자산규모가 축소된 탓이다. 하지만 한국투자금융그룹을 합친 자산 규모로는 국내 재계 20위권에 해당한다.

바다 사나이 중에서도 김 회장은 특출한 인물이다. 원양어업으로 세계적인 일가를 이뤄낸 것만 봐도 틀림없다. 진정한 바다 사나이들은 호연지기가 강할 듯한데, 김 회장의 인생 항로를 되짚어 보면 과연 그렇구나 하며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다 사나이들은 좀 거칠기는 해도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요. 바다라는 게 이유를 들어주거나 사정을 봐주지 않거든요. 바다에서는 실력이 없으면 죽는 겁니다.”

강 회장 | 어떤 면에서는 회장님이 바다에서 체득한 철학이 동원의 ‘정도경영’에 기반이 된 것 같습니다.

김 회장 | 맞습니다. 동원그룹 직원 누구에게나 ‘동원정신’이 뭐냐고 물어보면 ‘열성’과 ‘도전’이라고 답하거든요. 제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창조’라는 덕목을 추가했습니다. 남들을 따라갈 때는 열성과 도전만 있어도 되지만 새로운 것을 해야 할 때는 창조정신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원정신을 뒷받침하는 행동강령으로는 ‘원칙은 철저히 지키자, 작은 것도 소중히 하자, 새로운 것은 과감히 하자’의 세 가지를 늘 주문합니다.

강 회장 | 큰 기업가들은 겉으로 봐선 큰 것만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실제로 보면 세심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장님께도 그런 모습이 느껴지는데요.

김 회장 | 배가 아무리 커도 작은 ‘물구멍’ 하나가 나면 그냥 가버리거든요. 또 부품 하나가 고장이 나서 엔진이 멈추면 폭풍 속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세밀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돼요.

강 회장 | 이를테면 ‘바다 정신’이라는 것은 모험정신이 강하면서도 정도를 걸어가고, 또한 어떤 일이든 결코 적당히 하는 법이 없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군요. 회장님은 평소 큰 기업보다는 좋은 기업, 사회에 필요한 기업,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을 강조해 왔는데요. 회장님이 생각하는 좋은 기업은 어떤 모습일까요.

김 회장 | 기업은 사회의 인적·물적 자원을 갖고 경영을 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적자를 내면 사회에 죄를 짓는 거죠. 최소한 죄를 안 짓는 정도는 해야 합니다. 또 무조건 사업을 많이 벌이는 것도 안 됩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기업이 돼야지, 자기 돈만 벌려고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름지기 기업이란 고용을 창출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며, 이익을 내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예요. 나라가 유지되는 것도 기업이 내는 세금으로 가능한 겁니다.

김재철 회장 하면 ‘성실 납세’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좀 오래된 일이지만 그가 세금 납부로 세간의 큰 화제가 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 11월 김재철 회장은 장남에게 동원산업 주식 10%를 양도하면서 69억여원의 증여세를 자진신고하고 납부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많은 신문들이 크게 보도했다.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절세를 가장한 탈세를 하는 것이 공공연한 우리 사회 풍토에서 내야 할 세금을 고스란히 낸 데다, 당시까지 자진납부 증여세로는 사상 최대 금액이었던 까닭이다. 1991년 3월 9일자 조선일보는 ‘이 사람’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감히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향해 ‘이 사람(김재철 회장)을 보라’고 외치고 싶다. 국민과 함께 그에게 충심으로부터의 박수를 보낸다”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김 회장의 회고다. “그때 애(김남구 부회장)가 일본서 MBA를 다니고 있었는데, 회사가 조그마할 때니까 세금 제대로 내도 뭐 문제될 게 없었죠. 저는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때 생각했어요. 앞으로 남은 삶은 ‘엑스트라 인생’이다, 구질구질하게 속여서 뭘 좀 얻기보다는 살아도 떳떳하게 살자고 말이죠. 그게 지금껏 삶의 신조가 됐습니다.”





- 1975년 무렵 ‘동산호’에 승선했을 때의 김재철 회장.



  Tip | 김재철 회장 특유의 ‘무대경영론’

“사장은 연출자, 직원은 연기자, 회사는 무대”

김재철 회장의 기업경영 요체는 ‘무대경영론’으로 요약된다. 김 회장은 회사 설립 초기부터 “기업이 무대라면 경영진은 연기자인 사원들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여건을 만드는 연출자에 불과하다”고 강조해 왔다. 경영진이 꾸며 놓은 무대 위에서 직원들이 역량을 십분 발휘해 관객(고객)에게 감동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무대경영론의 요지다. 거친 풍랑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선원들과의 혼연일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김 회장은 무대경영론을 통해 설명한다. 한국경영사학회는 지난 2009년 펴낸 <도전과 정도경영의 40년-동원그룹·김재철 회장 연구>라는 논문에서 “기업은 무대이고 직원은 연기자이며 경영자는 연출자라는 김 회장의 무대경영론은 오너, 임직원, 고객이라는 기업경영의 삼위일체를 잘 설명해 주는 경영철학”이라고 평가했다. 이 논문은 또 “‘연출자인 경영자와 연기자인 종업원이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자기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동료가 알며,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 고객이 안다’는 평소 김 회장의 주장을 근거로 무대경영론이야말로 고객을 최우선시하는 동원의 핵심 경영철학”이라고 지적했다.



 “천혜의 해안조건 활용해

 해양대국 건설하자”

“우리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참으로 좋은 해양조건을 갖추고 있어 해양의 세기를 맞아 잘만 하면 역동적인 해양강국이 될 수 있어요. 역사를  돌이켜 봐도 우리나라가 해양지향적일 때는 국운이 번창했지만 대륙지향적일 때는 위축됐습니다.”





- 김재철 회장은 한국무역협회장 시절 국내서 보기 드문 대형 지구의 500개를 제작해 청와대, 장관실, 대학, 언론사에 보급했다. 그 지구의 앞에서 강석진 회장과 담소하고 있는 김 회장.



강 회장
| 회장님께서는 ‘2012 여수세계박람회(여수엑스포)’ 유치에 혁혁한 공을 세우셨는데, 평소 서·남해안 개발에 관해 점(點)이 아닌 선(線)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도 서·남해안 지역 개발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죠. 회장님은 우리 서·남해안 지역 개발의 효과 극대화를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김 회장 | 우리나라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남해안이 세계를 향한 도약의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남해안 개발이 지지부진했지만 2012 여수엑스포를 계기로 남해안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될 겁니다. 특히 여수는 목포와 부산의 딱 중간 위치예요. 즉 남해안의 중심점에 있어요. 여수엑스포를 통해 남해안 시대가 열릴 거라고 봅니다. 또 남해안은 제대로 개발하면 인구 1000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 건설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면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인구를 분산할 수도 있고 통일 이후의 대비도 될 것입니다. 1200여년 전 장보고가 청해진(완도)을 동북아 무역중심지로 발전시켰던 것도 우리 남해안의 지리적 조건이 그만큼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강 회장 | 요즘 무슨 지역개발을 하겠다고 발표하면 서로 자기 지역으로 가져가려고들 하지 않습니까? 만약 서·남해안을 선(線)으로 개발한다면 전라도, 경상도를 나누며 서로 싸울 일도 없어질 것 같군요.

김 회장 | 서·남해안 개발법(동서남해안권발전특별법)이 재작년에 통과됐는데 그 공로자가 김태호 전 경남지사입니다. 김태호 전 지사 방에 가면 거꾸로 된 세계지도가 붙어 있어요. 도지사가 되자마자 우리한테 연락해 지도를 하나 달라고 요청해서 보냈지요. 그 양반이 서·남해안 개발법 통과에 많은 공을 세웠어요.

강 회장 | 남해안을 연결하면 경남, 전남 상관없이 하나가 되어 다 잘될 텐데요.

김 회장 | 내가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모두 경상도, 전라도 따지는데 바닷물이 어디 경상도 물, 전라도 물 따로 있느냐, 선을 긋지 말자”고 말입니다.

강 회장 | 제가 화가라서 그림 도구를 가지고 남해 일대에 자주 스케치하러 가는 편입니다. 그런데 화가의 눈으로 보면 남해는 어딜 가든지 기가 막힌 그림의 배경과 구도가 나와요. 엄청난 관광자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 회장 | 맞습니다. 내가 세계의 바닷가 명소라는 데는 죄다 가봤다고 할 수 있는데, 세계에서 우리 남해만큼 아름답고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데가 없어요. 프랑스 칸(Cannes) 같은 곳도 막상 가보면 형편없어요. 관광자원이라고 해봐야 유명한 배우들의 핸드 프린트 같은 거밖에 없더라고요. 거기 비하면 우리 남해는 얼마나 멋져요. 여름철 석양 무렵에 한려수도를 배 타고 지나가면 시 한 수 읊어 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순간 그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참,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우리나라는 태풍이 유명하잖습니까? 만약 남해안의 경치 좋은 절벽 위에 식당 하나 차려 놓고 태풍으로 큰 파도가 치는 장관을 보여주면 엄청나게 장사 잘되지 않겠어요?(일동 웃음)

대담이 길어지면서 모두가 약간의 시장기를 느낄 즈음 간식이 준비됐다. 딸기와 배, 호두와 곶감, 그리고 동원그룹에서 만든 치즈가 참석자들의 좌석 앞에 놓였다. 김 회장은 비서실 직원을 불러 사진기자와 동영상 촬영자의 몫도 챙기라고 세심하게 지시했다. 그러면서 “고생이 많습니다. 내가 너무 오래하죠, 허허” 하며 웃음을 지었다. 대담이 재미를 더하자 김재철 회장도 갈수록 흥이 나는 듯했다. “우리가 웬만한 식품은 다 만들죠. 이 치즈도 참 맛있지 않습니까?” 그는 연신 고소한 치즈를 조금씩 입에 넣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강 회장 | 회장님은 ‘바다예찬론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한국이 세계 오대양을 누비는 해양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된 세계지도처럼 정부, 기업, 국민 모두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회장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김 회장 | 21세기는 많은 자원을 해양에 의존하고 대부분 상품이 해양을 거쳐 교역되는 바다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참으로 좋은 해양조건을 갖추고 있어 해양의 세기를 맞아 잘만 하면 역동적인 해양강국이 될 수 있어요. 역사를 돌이켜 봐도 우리나라가 해양지향적일 때는 국운이 번창했지만 대륙지향적일 때는 위축됐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사실을 빨리 깨달았으면 싶습니다. 작년에 폴 케네디(미국 예일대 석좌교수, 명저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역사학자) 교수가 한국에 와서 강연하는 걸 들었는데요. 그분이 말하길 과거 영국이 세계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造船) 능력이 세계 최고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지금 한국은 세계 최대 조선강국이 아니냐? 그런 면에서 한국은 대국으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어요.

김재철 회장은 회사경영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일찍부터 해양강국 건설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 온 기업가다. 1985년 수산·해운업계 지도자들이 뜻을 모아 발족한 ‘해양개발기본법 추진민간위원회’와 1989년 21세기 국가발전 청사진의 구체화를 목표로 만들어진 ‘해양개발연구회’의 회장을 잇달아 맡은 바 있다. 특히 해양분야 행정을 도맡을 부처 신설의 필요성을 공론화시켜 해양수산부 출범의 산파역을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현 정부 들어 해양수산부가 문패를 내린 데 대한 아쉬움이 크다. 그는 에둘러 섭섭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해양 진출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그런 중국이 우리나라에 두 번 놀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해양수산부를 만들어 놀라고(그만큼 발상이 진취적이어서), 두 번째는 그걸 없애서 더 놀랐다는 거예요.”

  Tip | 김재철 회장의 가족 이야기

“남구가 아빠를 몰라보고 ‘타잔’이라 불렀어요”

“배를 탈 때는 한번 출항하면 1년이나 1년 반 있다가 돌아왔어요. 남구(김남구 부회장)도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처음 봤지요. 출항하기 며칠 전에 아이가 생겼던가 봐요. 어느 날 아내가 보낸 편지에 애 낳았다는 소식이 적혀 있더군요. 아, 이제 죽어도 씨는 남겼구나 하고 안심이 되더군요, 하하.”



김재철 회장은 대학을 졸업하던 1958년부터 7년간 원양어선을 탔다. 선원과 선장 자격으로 배를 탄 건 고려원양 수산부장 시절 인도양 출어가 마지막이었다. 늘 바다에 나가 있던 터라 가족을 돌볼 수가 없는 건 당연했다. 마음이 짠할 때도 허다했다. “남구가 네댓 살 때였나 봐요. 인도양서 조업을 하다 케이프타운에 잠깐 들렀을 때 서커스 관람을 했죠. 그때 사자와 함께 사진을 찍어 집에 보냈는데, 남구가 그 사진을 보더니 아버진 줄도 모르고 ‘야! 타잔이다, 타잔!’이라고 했대요, 글쎄. 남구가 그러는데 한번도 아버지 무릎에 앉아 본 적이 없다고 해요. 내 기억에도 그 애를 안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요즘 같으면 쫓겨나죠(웃음).”



김재철 회장이 엄격하게 자녀교육을 시킨 것은 재계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장남 김남구 부회장은 입사하기 전 6개월간 남태평양과 베링 해에 나가 참치배를 타는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쳤다. 또 차남 김남정 부사장은 참치통조림 공장에서 생산직부터 시작, 동원산업 영업부 평사원으로 시내 백화점에 참치제품을 배달하는 등 밑바닥부터 경영을 배웠다.



“소나무는 바람이 강한 데라야 곧게 자라고, 과일은 물이 적은 곳에서 자라야 맛이 더 있으며, 벼도 일교차가 심한 지방의 쌀이 맛있는 법이다.” 평소 김 회장이 말하는 자신의 교육지론이다. 그는 “사람도 고생을 해 봐야 제대로 인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주기 싫어도 반드시 줘야 하는 게 고생”이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동원그룹을 차남인 김남정 동원엔터프라이즈 부사장에게, 한국투자금융그룹을 장남 김남구 부회장에게 물려주는 후계 구도를 짰다. 장자에게 모태기업을 물려주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점에 비춰 보면 좀 이례적이다. 어떤 뜻이 있었을까?



“금융업이란 게 나이가 들어서는 안 되겠더군요. 젊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사업이란 말이죠. 그래서 일찍 큰애에게 금융분야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렇게 된 거, 빨리 떼줘야겠다는 생각에서 비교적 분리를 서두른 거죠. 계열분리를 할 때는 조그마했는데 큰애가 잘 키워낸 것 같아요. 지금 한국투자금융그룹 시가총액이 동원그룹의 3배 정도 될걸요.”



김남구 부회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내내 김 회장의 표정이 밝았다. 자식이 기대에 부응하는데, 어떤 아버지가 대견해하지 않을까.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손주들 자랑도 꺼냈다. 그 모습이 이웃에서 볼 수 있는 ‘할아버지’와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큰손자가 올해 열아홉 살인데 참치를 먹어서 그런지 키가 아주 크고 미남이에요. 이 녀석이 축구를 잘해요. 중학교 때 보니 코너킥을 바나나킥으로 차서 골을 넣더라고요. 그런데 3년 전에 갑자기 영국 축구유학을 가겠다고 졸라대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가 썩 안 내켜서 ‘헤딩하면 머리도 나빠지고 활동기간도 얼마 안 된다. 넌 공부만 잘하면 네 아버지가 하는 금융업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달랬지요. 그랬더니 이 녀석이 ‘우리 할아버지는 베컴(영국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 수입이 얼만지도 모르시나 봐’라고 했대요, 글쎄(일동 파안대소). 녀석이 계속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영국에 보냈는데, 가서 몇 달간 해 보더니 자신이 없는지 다시 공부로 돌아섰어요(웃음). 지난번에 보니 자기 학교서 수학을 제일 잘했다고 표창장하고 장학금을 받는다고 하던데 어쨌든 공부로 돌아서서 잘하고 있으니 다행이죠. 말 나온 김에 우리 외손녀 자랑도 좀 할게요. 미국 사는 외손녀가 얼마 전 예일대와 하버드대 입학허가가 동시에 났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 애가 한국에 들렀다 갔는데 양쪽을 저울질해서 선택할 거라며 아주 자신감이 넘치더군요.”



- 동원그룹의 경영이념이 적힌 액자.



 노사화합의 ‘무대경영’으로

 일등 원양기업 일궈

“제가 예전부터 “식품산업은 첨단산업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사람 입맛이라는 것이 얼마나 빠르게 변합니까? 그러니 거기 맞추려면 첨단일 수밖에요. 그래서 핵심사업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현재 M&A(인수합병)를 여러 건 검토하고 있어요.”

강 회장 | 회장님은 동원산업 창업 당시부터 경영이념을 세우신 것으로 압니다.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인데요. 부의 추구만을 앞세우는 기업인들이 적지 않은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김 회장 | 저는 젊은 시절 남다른 경험을 좀 많이 해 본 편입니다. 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해상생활을 하는 동안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겪었고, 또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경쟁력의 기초단위는 기업이고, 이 기업들이 건전하게 발전해야 나라가 튼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기업가란 모름지기 성실하게 사업을 이끌어 흑자경영을 해야 하고, 동시에 사회정의 실현에도 보탬이 돼야 기업도 국가도 더불어 발전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죠. 그래서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기업경영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 실현’이란 사시(社是)를 정하게 된 겁니다.

강 회장 | 동원그룹은 노사화합이 잘되는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노사문화의 비결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 회장 | 제가 사람 복이 많아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죠(웃음). 사실 가장 중요한 비결은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모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저는 창업 초창기부터 선장이나 기관장은 무조건 출항 전에 한 달 정도 본사에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교육기간 동안에는 이 배 가격이 얼마인데 1년간 어떻게 배를 운영할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게끔 했어요. 처음에는 회사가 값싼 중고선을 사서 운영해 틀림없이 이익을 많이 남겼을 거라고 생각들 하는데, 직접 사업계획서를 짜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많이 남지 않는다는 걸 본인들 스스로가 알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에게 ‘경영마인드’가 생기게 됩니다. 원양선원은 월급을 적게 받는 대신 귀항하면 인센티브를 한꺼번에 받습니다. 비용을 정산하고 남은 이익으로 선주 얼마, 선원 얼마 하는 식으로 나누는 거죠. 자연히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배가 출항하고 나면 기관장이나 선장의 아들딸을 경리직원으로 채용했어요. 회사가 얼마나 버는지 직접 확인하라는 뜻에서죠. 이렇게 하니까 선원들도 회사에 대한 믿음을 갖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인센티브 시스템의 원조를 꼽는다면 아마 원양어업일 겁니다. 증권업계에서 인센티브와 스톡옵션을 처음 도입한 곳도 바로 동원증권이었어요.

강 회장 |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자기 일에 매진하는 것이 노사화합의 성공비결이었군요. 선원 한사람 한사람이 선주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한 것은 지금 보더라도 매우 혁신적인 노사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 회장 | 저는 선장들에게 회사에 오면 선원 편이 되고, 배에 타서는 회사 편이 되라고 말해 왔습니다. 노사 양쪽의 입장을 잘 설명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라는 뜻이지요.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위해서는 신뢰만 한 게 없다고 봅니다.

강 회장 | 경영학계에서는 회장님의 리더십을 가리켜 ‘무대경영’이라고 합니다. 경영학 용어로 보면 무척 새로운 개념입니다. CEO가 만든 무대 위에서 임직원들이 활기차게 일하도록 한다는 것인데요.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리더의 이상적 모습은 무엇인지요.

김 회장 | 무대경영이란 말은 오래전부터 제가 썼던 말입니다만,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설극장에서 연극하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연기가 훌륭한 사람도 무대가 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으니 연기자와 무대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또 무대를 제공하는 극단은 연기자들이 호흡을 잘 맞춰 관객을 기쁘게 할 수 있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 원리죠.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오너와 근로자가 서로 협조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무대경영론을 자주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강 회장 | 올해 동원그룹은 창립 42주년을 맞는데, 앞으로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어떤 계획들을 갖고 계신지요.

김 회장 | 제가 예전부터 “식품산업은 첨단산업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사람 입맛이라는 것이 얼마나 빠르게 변합니까? 그러니 거기 맞추려면 첨단일 수밖에요. 그래서 핵심사업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현재 M&A(인수합병)를 여러 건 검토하고 있어요.



강 회장 | 스타키스트와 견줄 만한 세계적인 기업들이 물망에 오르고 있나요.

김 회장 | 최근 들어 인수 의사를 타진해 오는 기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로 식품기업 위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 역량에 맞는 걸로 선택할 생각입니다.

강 회장 | 스타키스트 인수로 북미시장 기반은 확실하게 닦아 놓으셨는데, 이제는 유럽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김 회장 | 유럽에서 참치 가공업체로 가장 큰 곳이 프랑스의 MW브랜즈라는 회사인데, 사실 작년에 우리가 인수를 타진했다가 물러났어요(MW브랜즈는 지난해 결국 태국 참치 통조림 업체 타이유니온프로즌에 인수됐다). 동원은 참치 분야에서 이미 세계 최고 기업이라고 자부합니다. 어획량도 가장 많지만 가공량 역시 스타키스트 몫까지 포함하면 세계 최대 수준이거든요. 원양어업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아마 동원이 세계 일등일 겁니다. 참, 한국에서 농수산식품 분야 수출 1위 기업이 어딘지 아세요? 바로 동원입니다.

김 회장은 동원그룹의 위상을 이야기하면서 어깨를 으쓱할 만한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스타키스트를 인수하러 갈 때의 일이에요. 입국 수속을 밟는데 공항 직원이 방문 목적이 뭐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스타키스트 오너다. 그 회사 인수하러 간다’고 하니 그 직원이 몸을 곧추세우고는 ‘예스, 서(Yes, Sir)’라고 하지 뭡니까. 하하(김 회장은 일화를 소개하며 그때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 듯 파안대소했다).”





- 2009년 동원그룹 40주년을 맞은 날 김재철 회장(앞줄 가운데)이 주요 경영진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Tip | 금융업 진출에 얽힌 비화

하버드대 AMP서 증권업 진출 착상 얻어

김재철 회장은 1981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AMP)에 입학했다. 당시 하버드대 AMP는 국가별로 2명씩 등록 인원이 할당돼 있었다. 일본만 예외적으로 4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입학 동기는 최각규씨(제25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였다. 그 시절 김 회장은 신사업에 대한 단서를 덤으로 얻었다.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의 우수한 학생들이 어디로 가느냐를 조사해 봤더니 최고 엘리트들은 대부분 증권사나 투자은행(IB)에 가더군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증권 하면 사기꾼들이나 가는 데라는 인식이 강할 때거든요. 야, 이거 재미있다 싶더군요.”



그가 하버드대 AMP를 마치고 돌아온 후의 어느 날이었다. 신문에 한신증권 공매 소식이 났다. 시선이 확 꽂혔다. 강한 호기심이 생긴 그는 면밀하게 사전조사를  해봤다. “이거, 군사정부가 주인을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알아보니 진짜 주인이 없다고 해요. 그래도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구둣발에 채이는 거 아닌가 해서 몇 군데를 더 조사해 봤는데도 괜찮다고 해요. 그래서 응찰을 했죠. 그때 꽤 큰 재벌들도 들어왔는데 결국 우리가 되고 나니까 이게 웬 다크호스냐, 뭐하는 기업이냐 하며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지요. 당시는 동원이 100% 수출만 하고 국내에는 아무것도 안 팔 때니까 국민들도 모르던 시절이죠.”



그런데 낙찰의 기쁨도 잠시, 주거래은행 전무의 귀띔이 마음에 걸렸다. 당국이 자금출처 조사에 들어갈 거라는 소식이었다. “나중에 조사를 받으니 은행에서 돈을 빌려 갔냐, 혹시 적성자금(북한자금)을 들여온 거 아니냐며 캐묻더군요. 하지만 하나도 거리낄 게 없었어요. 사실 그때 중고 트롤선 사려고 돈을 제법 모아뒀거든요. 은행에 돈 빌릴 필요도 없었죠.”



김 회장은 마침내 한신증권을 71억여원에 인수해 증권업 진출에 성공했다. 간판도 동원증권으로 바꿔 달았다. 오늘날 한국투자금융그룹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한신증권 응찰전에서 김 회장은 불과 몇백만원 차이로 2등을 따돌렸다. 운이 따랐지만 세간에서는 엉뚱한 추측도 난무했다. “도대체 동원이 어떤 회사냐며 신문에도 많이 났습니다. 1등과 2등이 몇백만원 차이밖에 안 난 결과를 보고, (김 회장이) 하버드대 갔다 왔다는데 컴퓨터로 계산해서 가격을 썼다는 둥 별소리를 막 쓰더라고요(일동 웃음).”



 “한국인 우수한 자질,

 기업가정신으로 꽃피우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나니까 되레 배짱이 생기더라고요. 지금도 큰 꿈을 가진 사람은 늘 도전할 겁니다. 토인비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역사는 도전과 응전에 의해 이뤄지고, 소수의 창조자가 역사를 만든다고 말입니다.”

강 회장 | 평소 모험정신과 기업가정신을 강조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점차 기업가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데요, 회장님께서는 그 이유가 뭐라고 보시는지요?

김 회장 | 잘살고 풍요로워지니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기업가정신이란 바로 모험정신인데, 모험정신은 부족함이나 난관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발휘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도 처음에는 호기심에 바다로 나갔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나니까 되레 배짱이 생기더라고요. 지금도 큰 꿈을 가진 사람은 늘 도전할 겁니다. 토인비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역사는 도전과 응전에 의해 이뤄지고, 소수의 창조자가 역사를 만든다고 말입니다.

강 회장 |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하면 회장님처럼 도전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김 회장 | 젊은이들이 세계로 나가 세계를 알고 역사인식을 갖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물 안에서만 공부한 사람들에게 도전정신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제가 무역협회장 시절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배낭여행 계획을 공모해 매년 200~300명씩 아프리카, 유럽, 남미 등 세계 각지로 보냈습니다. 인재를 양성하는 왕도는 해외에 많이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도전정신이 생겨요. 따라서 모험정신이나 기업가정신을 가지라고 채근하기보다는 큰 꿈을 갖게 하면 그 꿈을 좇아 자연스레 모험정신도 발동하리라고 봅니다.

강 회장 | 대기업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할아버지’로서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에게 미래의 꿈과 인생에 관한 덕담을 한 말씀 해주십시오.

김 회장 |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명을 갖고 태어난다고 합니다만, 특히 우리 젊은이들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돋보이는 영

송창섭 기자 / 대담 :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 / 정리 : 김윤현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