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서울대학은 국내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AFP)’을 개설했다. 인문학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나온이 1기 과정에 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몰렸고, 1월18일 마감된 2기 과정에도 계획 인원의 두 배가 넘는 수강생들이 쇄도해 모처럼 인문학이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듯하다.

역사학자 이태진 서울대 인문대학장

“세종 정조 박지원은 유교문화가 선사한 대표적인 창조적 위인”

기자는 1월16일 AFP를 책임지고 있는 이태진(65) 서울대 인문대학장(국사학과)을 찾았다. 이 학장은 주변이 온통 책으로 가득한 그의 연구실에서 “정·재계 인사들이 이·공학, 경영학, 경제학 등 소위 인기 학문들만으로는 국제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는 인식 하에 인문학을 찾은 게 아니겠느냐”고 최근 인문학의 인기 배경을 설명했다. 이 학장은 이어 “튼튼한 지식체계가 창조 경영의 기반이 될 것”이라며 “이제야말로 대학 및 중·고등학교 등 학교에 적극 투자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한국사 학자인 이 학장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리더십을 되찾아야 할 때”라며 “(정치가나 기업가들이) 세종, 정조, 박지원 등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에 대한 진면목을 제대로 알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즉 창조적인 정치 내지 경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인문학이 죽어야 인문학이 산다’는 역설적인 표현처럼 지난해는 인문학 위기선언과 함께 인문학이 되살아나는 한 해였던것 같습니다. 먼저 인문학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주변에선 ‘인문학의 위기가 과연 정확한 표현인가’라는 문제 제기를 많이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문학 교육의 위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시스템과 가르치는 사람들의 한계로 지적한다면 어느 정도 말이 되겠지만 인문학 자체가 위기일 수는 없다는 얘기죠. 저는 이런 관점에서 ‘인문학이 비상 걸렸다’고 고쳐 말하고 싶어요. 컴퓨터와 인터넷 발달로 지식체계화의 필요성 등 인문학의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죠.

그러면 뒤이어 인문학이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이유는 무엇 입니까.

우리나라가 뒤늦게 경제개발을 시작하다보니 즉효성 있는 학문 예컨대 과학·기술, 경제·경영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믿고 그쪽으로 쏠렸는데 그것 자체가 비정상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제 경쟁력 차원에서 그 학문들만 갖고는 안 된다고 깨닫게 된 것이죠. 따라서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인 무엇인가를 찾다보니 선진국에서 이미 다 하고 있는 인문학을 찾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경제개발사의 특수성, 시대적인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 차원에서 같이 겹쳐서 인문학을 얘기하는 것이죠. 사실 해외에서도 인문학의 비인기성은 있지만 우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지난해 시작한 서울대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에 대한 인기가 대단한 것으로 압니다.

지난해 인문학 위기가 고조되면서 저는 인문학도 사회와 국가 발전에 직접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통로로 최고과정을 만들어 본 것입니다. 이 순간까지도 안하면 인문학이 영 기회를 잃는 게 아니냐고 걱정했었죠. 하지만 처음 해본 것이라 한편으로 불안감이 들었어요. 절차, 진행 기술상의 미숙성이라든지, 정작 수강자들의 무엇을 바라는지 잘 몰랐거든요. 하지만 다행히도 1기 과정에 참여한 기업인들의 평가는 좋습니다. 그리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는데 17주의 강의는 너무 짧다고 해서 2기부터는 20주로 늘렸고, 강사의 연령도 조금 낮췄습니다.



지난 최고지도자 1기 과정에는 당초 계획 인원의 두 배나 되는 지원자가 몰렸다고 한다. 기업 경영자들은 물론 정계와 관계의 지도자들이 앞 다퉈 수강을 신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당초 강사로 초빙된 이계안 전 민주신당 의원과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프로그램 내용을 보고 아예 수강생으로도 등록했을 정도다. 1월18일 마감된 2기 과정에도 1기 때처럼 지원자가 정원(40명 내외)의 두배에 달했다.

이번 최고지도자 과정에서 얻은 성과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많이 있겠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해외 답사에서의 현장 강의를 위해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중간쯤 읽다가 고종이 박지원을 통해 개방선진문화수용론을 받아들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고종은 아버지의 섭정을 중단시키고 친정을 선언하면서 일본과의 국교 수립,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등을 맺는가 하면 일본에 서양 문물 수입 실태 시찰단 보내는 등 다방면에서 개화정책을 펴고 선진 문명을 수용했습니다. 고종은 “서양기계문명과 우리의 기술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기독교가 온다고 해서 이걸 안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런 고종의 옆에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가 우의정으로 있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황제의 국익을 위한 행동을 보고받은 충격을 <열하일기>에 상세히 기술했다. 청조의 건륭제는 저항세력인 준가르부 통제를 위해 라마교의 성지 라사의 포탈라궁을 본 딴 (소)포탈라궁을 열하에 짓고 달라이 라마(제5대)를 초대하는가 하면, 제2인자 반센 라마를 초빙하고 그가 거주할 거대한 행궁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건륭제는 조선 사신에게 반센 라마를 직접 만나 볼 것을 권유하는 한편, 각국 사신들 앞에서 반센 라마를 평등례로 접견했다. 천상, 천하의 지고한 존재로 알았던 청황제가 라마승을 평등례로 맞는 광경이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 사신들을 경악하게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 같은 <열하일기>에 영향을 받아 박지원이 실용성을 높이 평가했던 중국식 벽돌집으로 집옥재(서재 겸집무실)를 짓게 했고, (라마승에 대한 청황제의 평등례영향을 받아) 대한제국과 대청제국이 동등한 독립국으로 한·청조약을 체결하게 됐다는 게 이 학장의 주장이다. 이와 함께 이 학장은 1880년대에 펼쳐진 고종의 제1차 근대화 운동에는 개방화정책을 펼쳐온 박지원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학장께서 ‘고종 구하기’에 나선 역사학자로 평가하고 있는데요.

고종만큼 불운한 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노력을 많이 했는데 역부족으로 나라를 빼앗긴 것이죠. 그래놓고 일본이 (고종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투입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버린 겁니다. 정보와 지식 전달의 독점이 빚은 대표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사진 등 사료를 보면 고종의 개화를 위한,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 엿보입니다. 대표적인 게 덕수궁 앞 방사성 도로의 6거리 체계인데 이는 전국국토개발계획에 따라 황성을 근대적 도시로 바꾸기 위해 워싱턴 백악관 앞 광장을 모델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다녔던 전차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일본 사람들이 해준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저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역사바로알기의 시발이고, 이 시대를 잘 못 알면 일본 사람들이 주장했던 식민지 근대화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10월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실시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의 반응은 어떻든가요?

돈을 받는 것은 아니고 참가 희망자들을 인터넷으로 신청 받아 했는데 1기 강의(10회) 때 5000명 넘었다고 합니다. 강의를 한 서울 역사박물관의 정원이 350명인데 매회 때마다 항상 넘쳐났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인문학에 대해) 난리죠? (웃음)

이 학장께서도 4월에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하는데 주제가 눈길을 끕니다. ‘21세기 역사학, 우주과학과의 만남’인데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제목이 시선을 끌게 되어있죠. (웃음) 화성과 목성 사이에 태양계가 생성될 때 발생한 돌이 엄청나게 많다고 합니다. 크기가(지름이) 10킬로미터나 되는 큰 유성들이 있다고 하는 데 그런 유성들이 지구에 많은 충격을 가했습니다. 그 때마다 기상이변이 생기는 등, 장기 대재난이 일어났죠. 큰놈(유성)이 충격을 가하면 생태계가 바뀌고 작은 게 오면 인류 의식에 큰 변화를 미칩니다. 그러니까 인류역사의 모순은 대재난에 있다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조선왕조실록>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장기간에 걸친 하늘(천문, 즉 외계)의 움직임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거든요. 우리나라에 250년간 장기 대재난이 있었는데 기록을 읽다가 분석하면서 외계충격설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과학자들이 말하지 못한 역사적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교시대에는 대자연 재난이 지속돼서 하늘에 대한 외경심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가짐을 보듬는 예(禮)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천재지변의 산물인 셈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창조적 인물을 꼽는다면 누굴 들겠습니까.

고려시대까지는 기록이 적어 구체적인 평가 대상에 넣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서 찾아야 할 텐데…. 사실 조선시대에 대해선 일본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아졌어요. 당시 일본인들이 ‘당쟁만 일삼았다’, ‘유교망국론’ 등을 내세워 자기 비하심을 갖도록 조선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사람 문제를 생각한 훌륭한 정치를 한 왕과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굳이 (창조적인 인물을) 꼽자면 세종과 정조, 박지원을 들고 싶습니다.

세종을 얘기하면 한글 창제라는 단편적인 지식밖에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세종은 농업 발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세종은 하삼도의 선진 농업기술을 조사해 농서를 편찬해 이를 경기도 이북 지역에도 적용하게 함으로써 전국을 같은 수준의 농업지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경복궁 후원에 뙈기밭을 마련해 새 농서에 적힌 대로 손수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경기도 지역의 일반 농가보다 ‘몇 배’의 소출을 냈어요. 일반 왕 같았으면 국민을 탓했을 텐데 세종은 그 이유를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이 농민들을 부역에 너무 자주 동원해 농민들이 농시(農時)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인 것을 알아내고 연간 부역 일수를 10일로 제한했죠. 이는 왕 스스로가 현실을 직시를 해서 왕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왕정시대에 이는 그야말로 극적인 대목입니다. 모든 방면의 지도자들이 되새겨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조와 박지원은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쌍두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소민 보호와 내치(內治)를, 박지원은 눈을 밖으로 돌려 우리보다 앞선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당시로선 대단히 창조적인 발상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세종, 정조, 박지원을 전통 유교문화가 남긴 대표적인 위인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요즘 기업들마다 창조 경영을 찾는다고 난리입니다. 해법이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경영 규범에 나오는 것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통한다는 거 아닙니까.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올 때 ‘따라할 것이냐’, ‘창조적으로 할 것이냐’, 고민이 많았습니다. 창조는 새로운 생각과 방법을 찾아내는 원천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지식의) 샘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것은 토대가 클수록 좋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에서 국가 경영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세종은 여기서 ‘우리 토대를 창조해서 유교정치를 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며 여러 가지를 참조했습니다.

이제 우리 경제는 창조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따라서 이것의 힘이자 국제 경쟁력인 지식체계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대학 등 각급 교육기관에 투자를 하는 것이죠.

짧은 역사의 미국이 지금 잘 나가고 있는 것은 19세기에 대회사들이 대학에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입니다. 중소 자산가들도 대학 운영 및 설립에 돈을 많이 집어넣었습니다.

약력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학사.

196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국사 전공) 석사.

200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문학박사.

1977년~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

2006년 8월~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장.

2001년~현재 국제역사학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2003년 9월~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이창희 기자 / 사진 : 이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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