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의 전반부를 대표하는 성군이자 개혁 군주하면 누구나 ‘세종대왕’을 쉽게 떠올린다. 또 후반부를 대표하는 성군이자 개혁 군주하면 ‘정조대왕’이라고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세종시대와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을 꼽으라 하면 많은 사람들은 ‘세종시대=황희’, ‘정조시대=?’라는 답을 내놓는다. 이 ‘정조시대=?’라는 물음표를 채워 주는 인물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번암 채제공이다.

정조는 즉위 12년이 되는 1788년 전격적으로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다. 채제공의 발탁을 전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전 80여 년 동안 노론 당파 출신이 아닌 인물이 정승의 자리에 오른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은 곧 정조대왕이 본격적으로 노론 세력의 권력 독점을 혁파하고 남인 당파를 개혁의 중심 세력으로 등용하겠다는 신호탄이었다. 선왕인 영조시대에 조정을 완전 장악한 노론 세력은 정조가 어렸을 때 사도세자(정조의 아버지)를 자신들 당파와 노선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모함해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이 때문에 정조는 즉위 과정은 물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한동안 집권 세력인 노론 당파의 정치적 저항으로 인해 자신의 개혁 의지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간 정조는 즉위 중반 이후부터 ‘왕권 강화를 통한 체제 개혁’을 정치 노선으로 삼은 남인 당파를 조정 내부로 흡수하여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 첫 단추가 채제공의 우의정 발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조가 남인 당파를 개혁의 중심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첫 조치로 채제공을 정승에 발탁한 이유는, 당시 채제공이 남인 세력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 영수였기 때문이다. 채제공의 개인문집인 <번암집>을 국역한 남만성씨는, 그가 이황, 정구, 허목과 홍우원, 윤휴, 윤선도의 정치사상을 이어받고, 이익, 강박, 오광운의 학문을 전수한 남인 당파의 중심인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학문과 사상의 계보를 통해서도 채제공이 노론 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 속에서 개혁과 실학사상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발탁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채제공은 일찍이 노론 당파의 정치적 모함으로 영조와 사도세자가 불화를 거듭할 때 온 몸을 던져 둘 사이의 화해를 모색하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것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정조가 보기에 채제공은 개혁사상과 함께 임금에 대한 충직함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이렇듯 군신 간의 의리와 강직한 성품 덕에 정조 즉위와 동시에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용됐으나 그만큼 노론 당파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우의정에 발탁되기 이전 8여 년 동안 한양 주변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채제공은 젊었을 때부터 남인 학자들의 진보적인 학문과 실학사상을 익히고, 100여 년 가까운 서인(노론) 세력의 권력 독점이 낳은 폐단을 지켜보면서 조선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왕권 강화와 체제 개혁’이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의정으로 발탁된 이후 정조와 더불어 개혁 세력을 총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자신의 개혁 의지와 구상을 하나 둘씩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채제공의 경제사상과 정책의 핵심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신해통공’과 ‘경제 신도시 화성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사 최초의 시장 자유화 조치

1791년(정조 15년) 조선의 상업 및 시장사에 한 획을 긋는 발표문이 한양의 중심가와 4대문에 일제히 내걸렸다. 그 발표문은 ‘시전 상인들이 사상인(私商人 : 개인 상인)의 상업 활동을 단속, 금지할 수 있도록 허용한 금난전권에 대해 육의전을 제외하고 모두 혁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시전을 설치하고 그곳의 상인들에게 독점적인 상업 특권을 주는 대신 궁중과 관청의 수요품이나 명나라에 보낼 진상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그런데 양대 전란을 전후하여 시장경제의 발달로 시전 상인이 아닌 사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크게 활기를 띠게 되자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조정에 사상인들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허용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대체적으로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획득한 최초 시기는 선조 말년에서 인조시대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 조정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재정적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정적인 조세 자원이 절실했다. 이 때문에 시전 상인들은 국가 부역을 부담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금난전권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금난전권을 행사한 시전의 숫자가 점차 불어나 18세기 영·정조시대에 들어와서는 시전 상인들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물품을 독점하고 개인의 소소한 상업 활동까지 단속, 금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시전 상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행사한 금난전권은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폐단을 낳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도시민의 증가로 생겨난 상품 매매 및 유통에 대한 거대한 욕구를 억압해 시장경제의 발전을 억압하는 해악을 가져왔다. 또한 소상품 생산자 곧 농민과 수공업자의 시장 참여를 가로막고, 백성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제약했다. 그리고 상권을 장악한 시전 상인들이 매점매석 행위로 폭리를 취하는 탓에 백성들은 큰 경제적 고통을 짊어져야 했다.

이렇듯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은 상업 활동의 자유 및 시장경제의 발달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민생을 해치는 ‘사회악’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금난전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깊숙하게 결탁했는데, 당시 집권 노론 세력의 막대한 정치 자금원은 다름 아닌 이들 시전 상인이었다. 백성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민생을 해치며 얻은 이익을 시전 상인들과 집권 노론 세력이 나누어 먹었던 셈이다.  

일찍부터 ‘상업 및 시장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던 채제공은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이 낳은 사회·경제적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상의 반열에 오르자마자 이 문제를 ‘경제 개혁의 최대 화두’로 삼았다. 채제공이 신해통공을 실시하기 훨씬 이전부터 ‘조선의 상업 및 시장 발전’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박제가의 <북학의>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북학의>는 박제가가 1778년(정조 2년) 채제공을 수행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다녀온 직후 저술한 책이다.

판서 채제공은 “지금 종루의 북쪽 거리는 비좁다고 할 수 있다. 이 거리를 넓혀 상점들을 나란히 정비하고 시장 사람들이 제각각 가게의 이름을 달고 큰 글자로 이렇게 써 붙이도록 한다. ‘본 상점에서는 경상도의 면포를 판매합니다’, ‘본 상점에서는 남원과 평강의 선지(扇紙)를 판매합니다’. 그리고 흥인문에서부터 숭례문까지 시장 제도를 새롭게 바꾼다면, 어찌 통쾌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 박제가, <북학의> 내편 ‘시정(市井)’

조선의 상업과 시장 문제에 남다른 포부를 지녔던 채제공은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이야말로 상업과 시장의 발달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라고 여겼다. 그는 “요즘처럼 물가가 치솟은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그 폐단의 원인을 따져 보면 시전 상인들이 자유로이 상업 활동을 하는 난전(亂廛 : 개인 상인)을 너무 심하게 단속, 금지하기 때문이다. 육의전에서 다루는 물품은 마땅히 금난전권을 지켜야 하지만, 그 밖의 물품에 대한 매매를 단속, 금지하는 폐단은 일체 혁파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익을 얻는 사람은 많고 물가도 마땅히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제공은 섣불리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시전 상인과 노론 세력들의 원성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뻔한 상황에서 그것을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책과 힘을 갖추지 못한 채 괜히 벌집만 쑤셔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를 기다리던 채제공은 우의정에 오른 지 3년이 지난 1791년 1월 마침내 정조에게 ‘금난전권을 혁파하라’고 건의하기에 이른다. 그는 정조에게 ‘백성들이 입는 폐해로 말한다면 시전 상인의 매점매석 행위가 첫 번째이므로, 만약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한다면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아뢴다.

채제공의 예상대로 노론 세력은 즉각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자신들의 최대 정치 자금원을 봉쇄당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노론은 당시 호조판서인 김문순을 중심으로 “수백 년 동안 유지해 온 시전의 뿌리가 튼튼하고 또한 국가 부역의 부담을 지고 있는데, 금난전권을 혁파한다면 시전은 장차 모두 망하고 말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하며 채제공의 건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때문에 ‘금난전권 혁파’는 자칫 미궁 속으로 빠질 뻔했으나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에 대한 금난전권 폐지’라는 해결책을 찾아 시행될 수 있었다.

이로써 채제공은 ‘상업 및 시장의 자유로운 발달을 통한 경제 개혁’이라는 자신의 포부를 현실 정치 무대에서 실현하게 되었다. 신해통공은 1894년(정조 18년) 갑인통공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조치는 이후 조선의 상품 유통과 화폐 경제 발달에 거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또한 이후 시전 상인에서 사상인 계층으로 상업 및 시장 권력과 경제적 부가 대대적으로 이동하는 일대 계기가 되었다.

   

경제 신도시의 건설

화성은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적 계획도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화성은 건설 당시부터 자립형 경제 신도시로 계획되었다. 정조는 1894년 2월, 채제공을 총지휘자로 하고 정약용이 작성한 <성설(城說)>을 설계 지침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애초 10년을 예상한 공사였는데, 불과 2년6개월 만인 1896년 8월에 완공을 볼 수 있었다. 공사 기간을 이토록 단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자신들의 과학기술 및 경제 정책의 총역량을 이곳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성은 설계→공사 및 인력 동원→완공→완공 이후의 도시 기능에서 이전 조선의 대도시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설계와 공사비용을 경제적으로 예측해 계산한 다음 노동력 비용을 절감하고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각종 과학기술 기기(거중기, 녹로, 유형차)를 개발해 현장에 투입했다.

또한 기존의 성곽 축성에서 널리 사용하던 돌을 대신해서 벽돌을 사용했는데, 이 역시 노동력 비용의 절감과 공사 기간 단축의 효과를 낳았다. 아울러 백성들을 동원해 실시한 이전의 대규모 역사(役事)와는 다르게 전국에서 모여든 빈농들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급가모군(給價募軍)’의 방법으로 노동력을 충원했다.

당시 화성 건설에 나선 사람들은 하루 2전5푼의 임금을 지급받았다. 공사 진행 도중 재정상의 문제로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는 방식이 논의되었으나 채제공은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대가를 주고 고용하여 쓴다는 사실을 듣고 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지금에 와서 다시 백성들을 징발해 양식을 싸가지고 부역에 나오게 하면 눈을 흘겨 서로 돌아보지 않는 백성이 얼마나 되겠는가?”하며 적극 반대했다. 결국 백성들을 강제 징발하는 문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사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력을 충당했다. 이것은 당시 조선 사회 곳곳에 퍼져 있던 임금 노동 및 상품 화폐 경제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화한 획기적인 경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설계 및 건설 과정에서 보여준 새로운 경제사상 및 경제 정책의 흔적은 화성을 자립적인 경제 능력을 갖춘 도시로 계획한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채제공은 성곽 축성과 동시에 화성이 대규모 인구 수용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천 준설과 도로(십자가로, 신작로) 건설을 시작했다. 또한 화성 주변에 대규모 저수지를 여러 개 쌓아 안정적인 농업 기반과 생계 수단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북문 밖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쌓은 만석거(萬石渠) 공사로 자갈밭이나 척박한 풀이 무성한 지대를 백성들의 생계를 도모할 수 있는 둔전(屯田)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만석거(1795년)를 시작으로 만년제(1798년), 축만제(1799년) 등의 대규모 저수지가 잇달아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농법과 농사기술이 실험되었는데, 당시 쌓아 놓은 토대 덕분에 오늘날에도 수원(화성)은 농업을 선도하는 도시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화성 완공 이후에도 정조와 채제공의 ‘경제 신도시 구상’은 멈추지 않았다. 공사를 완공한 그해 9월부터 곧바로 ‘화성 건설 종합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종합 보고서가 바로 <화성성역의궤>다.

이 책에는 성곽과 각 건물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상세하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사와 관련한 공식 문서와 참여 인원, 소요 비용 및 물품, 건축 설계 및 이용 도구, 예산 및 결산에 관한 보고,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에 이르는 기술자들의 명단까지 직종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에 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석공이나 목수, 미장이와 기와장이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또 임금의 하루 반나절 분까지 세밀하게 계산해 지급한 다음 기록해 놓은 점이다.

이처럼 채제공이 총책임자로 나서 진두지휘한 화성 건설 현장 곳곳에는 변화하는 사회 경제 현실에 발맞추어 조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한 그의 정책적 고민과 노력이 깊게 배어 있었다.

      

채제공의 경제사상 1 시장주의(시장과 상업의 자유화)

채제공은 허목, 유형원, 이익을 잇고 다음 세대인 이가환, 정약용에게 남인의 개혁 및 실학사상을 물려주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보통 실학파의 역사를 뒤져보면, 남인 출신들은 ‘중농학파’ 즉 농업 문제(토지 개혁)를 중심으로 사회 경제 개혁을 기획하고 구상했다고 나온다. 이 때문인지 역사학자들은 채제공의 사상 역시 상업 문제보다는 농업 문제를 더 중심에 두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남인 출신의 다른 실학자들과 달리 사상과 이념보다는 행정과 정책의 입장에서 경제 개혁 문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정치가 혹은 행정 관료로서 채제공의 경제사상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조선이 ‘대동법을 둘러싼 경제 대논쟁의 시대’였다면 18세기 조선은 ‘통공(通功)을 둘러싼 경제 대논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시전 상인과 사상인 간의 상업 및 시장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컸고, 시전 상인의 매점매석 행위로 국가 경제가 왜곡되고 백성들의 삶이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상에 오른 이후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서 채제공은 당연히 ‘상업 및 시장 문제’를 경제 개혁의 최대 화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기에 시전 상인들의 시장 독점과 매점매석은 백성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행위였고,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하는 일은 백성들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 경제 개혁이었다.

채제공은 신해통공의 주요 목적을 무엇보다도 소상인과 소상품 생산자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 및 시장 참여와 도시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한 물가 안정에서 찾았다. 특히 독점적 상업 특권을 누린 시전 상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소상인이나 소상품 생산자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롭게 상업 활동에 나서고 시장경제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처음 통공 정책이 실시되었을 때 이에 크게 반발한 시전 상인들이 입궐하는 채제공의 행렬을 가로막고 ‘통공 정책을 폐지하라’고 시위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채제공이 시전 상인들을 향해 한 말은 ‘시장 및 상업의 자유화’ 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성 안에서 사는 사람과 도성 주변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나라의 백성이다. 행상이든 점포를 갖추고 있는 상인이든 또 물품이 많든 적든 장사하는 일은 모두 떳떳하다. 그럼에도 시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자신의 물건을 가지고 매매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내쫓아 도성 안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든다. 참으로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이 사람도 백성이고, 저 사람도 백성인데 어찌 차별을 둘 수 있겠는가!

- 채제공, <정조실록>1793년 3월10일

이렇듯 채제공은 조선의 백성이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상업 활동에 나서고, 시장경제에 참여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또 유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자유로운 시장 및 상업 활동 곧 시장주의는 그의 경제사상과 통공 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채제공의 경제사상 2 반도고론(反都賈論 : 반독점론)

시장주의자답게 채제공은 상업과 시장을 독점하는 특권 상인을 가장 큰 ‘경제적 해악’으로 보았다. 신해통공을 시행하기 이전 가장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독점 상인은 금난전권을 행사한 한양의 시전 상인이었다.

채제공은 정조에게 올린 건의문에서, 이들 시전 상인이 금난전권을 악용해 생활필수품을 개인 상인들로부터 싼값에 매점한 후 백성들에게 독점 가격을 매겨 큰 이익을 남기려 하기 때문에 물가가 치솟고 나라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주장했다.

요즘에는 무뢰배들까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시전을 조직하고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필수품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크게는 말과 배에 실은 물품에서부터 작게는 행상(行商)이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물품까지 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싼값에 강제로 사들입니다. 만약 물품의 주인이 자신들이 부르는 가격에 팔지 않으면 난전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손발을 묶은 다음 관아에 넘겨 버립니다.

따라서 물품의 주인은 밑지더라도 눈물을 흘리며 팔지 않을 수 없고, 물품을 싼값에 사들인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가게에서 몇 곱절의 이득을 붙여 백성들에게 팔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물품을 사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사지 않을 수 없을 경우에는 시전 상인 외에는 달리 물품을 살 곳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3배 혹은 5배까지 이릅니다. 최근 들어서는 그 행위가  더욱 심하여 채소나 옹기까지도 매점매석하는 시전이 생겨나 어느 누구도 사사로이 물품을 판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소금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고, 제사 음식을 사지 못해 제사조차 받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채제공, <번암집> ‘시전의 독점 상인을 폐지하기를 청하다’ 

금난전권이 철폐되면서 이와 같은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특권과 매점매석 행위는 시장에서 급격하게 사라졌다. 그런데 통공 정책이 실시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전 상인들의 시장 상권을 급속도로 잠식한 이른바 ‘사상도고(私商都賈 : 개인 독점 상인)’들이 또 다른 ‘경제적 해악’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강 주변을 무대로 활동한 사상도고인 경강 상인들의 매점매석과 시장 독점 행위가 극심해지자 채제공은 사상도고들의 ‘시장 독점과 매점매석’을 법으로 강력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한다.

채제공은 시전 상인이든 사상인(사상도고)이든 특정 세력의 상업 및 시장 독점은 첫째 이익만을 좇는 풍속이 유행해 백성들의 인심이 나빠지고, 둘째 제 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 활동이 위축되며, 셋째 독점 상인을 제외한 일반 상인들은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할 수 없고, 넷째 상업 활동에 나서는 백성들이 줄어드는 만큼 저자 거리가 번성할 수 없는 폐단을 낳는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채제공은 나라 경제가 발달하고 백성들이 경제적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독점 상인들을 엄하게 다스려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채제공의 경제사상과 정책의 핵심에는 자유로운 상업 활동 및 시장 참여를 보호해야 한다는 ‘시장주의’와 더불어 특정 상인들에 의한 상업 및 시장 장악을 반대해야 한다는 ‘반독점론’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채제공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채제공은 1799년 1월18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년5개월 후인 1800년 6월22일 정조 또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은 순조를 대신해 권력을 틀어쥔 사람은 수렴청정에 나선 대왕대비 정순왕후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동시에 정조 재위 기간 내내 숨죽이며 지낸 노론 벽파 세력들이 권력의 전면으로 부상했다. 정순왕후가 노론 벽파의 핵심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복귀한 노론 벽파 세력은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문제를 빌미삼아 정조시대 개혁 세력의 중심을 이룬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인다. 이 정치적 대숙청이 바로 신유사옥(신유박해)이다. 당시 수많은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채제공의 뒤를 이어 남인의 리더로 기대를 모은 이가환(이익의 종손)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또한 정약용과 함께 촉망받는 관료였던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 역시 파직과 함께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남인들을 대숙청한 노론 벽파 세력은 그 후 정조와 채제공의 개혁을 뒤집는 대반동 정치를 실시한다.

채제공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남인들이 신유박해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배객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뜻 역시 온전히 전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채제공이 물꼬를 튼 ‘시장과 상업의 자유화’ 정신은 이후 조선의 시장과 상업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면면히 이어졌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채제공의 업적을 논하면서 “모든 백성들이 처음에는 (금난전권을 혁파한)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했으나 법을 시행한 지 1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물품과 재화가 모여 하루가 다르게 일상생활품이 넉넉해지자 크게 기뻐했다. 비록 예전에 원망하고 저주하던 자들조차 채공(蔡公)이 훌륭하다고 했다”고 기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