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을

    가장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밝혀

개의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걸출한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일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러한 인물을 가장 잘 소개하는 표현이 독자들에게는 때로 매우 상투적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고서 굳이 정약용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자면 아마도 ‘조선사 최고의 개혁 경세가(經世家)’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약용이 ‘조선사 최고의 개혁 경세가’가 되기까지에는, 또 다른 걸출한 역사적 인물 두 사람과의 인연과 만남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성호 이익과 정조대왕이다. 

정약용이 성호 이익의 실학(경제학)과 조우한 시기는 그의 나이 16살 무렵인 1777년이다. 물론 정약용은 생전에 이익의 가르침은커녕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났는데, 이익은 그 다음해인 1763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약용과 이익은 ‘사숙(私淑;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배우다)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이 이익의 학문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사람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다. 정약용의 매형이기도 한 이승훈은 이때 자신의 외삼촌이자, 이익의 종손(從孫)인 이가환을 소개해주었다. 이가환은 당시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성호학파’의 중심인물이자 대학자였다. 이가환과 성호학파의 지식인 그룹을 통해 이익의 실학(경제학) 세계를 접한 정약용은 비로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 사회개혁에 대한 구상을 통한 경세치용(經世致用), 서양의 과학기술 및 신문명을 수용하는 열린 마인드를 갖출 수 있었다. 이가환과 성호학파 지식인과 함께 토론하고, 또 이익이 남긴 <성호사설> 등의 유고(遺稿)들을 공부하면서 정약용은 ‘조선사 최고의 개혁 경세가’의 기틀을 잡아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자신의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스스럼없이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고 말했다. 맹자가 공자를 사숙해 유학의 ‘아성(亞聖)’이 되었듯이, 정약용은 성호를 사숙함으로써 ‘실학의 최고 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조선사 최고의 개혁 경세가

이처럼 치기 어린 유생에 불과했던 정약용에게 실학의 정신과 방법을 새겨주어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의 큰 꿈을 품게 한 사람이 성호 이익이라면, 그와 같은 큰 꿈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지원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정조대왕이었다.

정약용은 나이 22세(1783년) 때 소과(小科)에 합격한 유생들이 임금에게 사은(謝恩)하는 행사가 열린 창경궁 선정전에서 정조대왕을 처음 만났다. 당시 정조대왕은 정약용보다 10살 많은 32세였다. 이때 정조대왕은 정약용에게 얼굴을 들라 하며 나이를 묻는 등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훗날 정약용의 후손인 정규영(鄭奎英)은 이날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일컬어 ‘최초풍운지회(最初風雲之會)’라고 표현했다. 여기에서 ‘풍운지회’란 <주역>의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나오는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운종룡 풍종호 성인작이만물도)’에서 비롯된 말인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르듯이 성인이 일어나면 온갖 사물이 그 덕을 보게 된다’는 뜻으로 명군(明君; 용)과 현신(賢臣; 호랑이)의 역사적인 만남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다.

명군의 자질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재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이다. 그런 점에서도 정조대왕은 뛰어난 명군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정약용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관심과 애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왕의 특별한 관심과 각별한 애정에도 정약용은 대과(大科)에는 합격하지 못해 벼슬길에 나서지 못했다. 수차례 실패를 맛본 끝에 28살(178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과에 합격해 조정에 출사(出仕)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출사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정조대왕은 곧바로 ‘개혁 인재 양성 코스’인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그를 발탁했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을 통해 숱한 젊은 관료들을 직접 가르치고 길러냈는데, 즉위 6년이 되는 1781년부터 사망한 1800년까지 20여 년 동안 초계문신을 거친 관료들이 138명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이들 문신 관료들 중에서 정조대왕이 가장 총애하고 신뢰한 ‘최고의 개혁 인재이자 관료’였다.

정약용은 이렇듯 정조대왕과의 만남을 통해, 성호 이익을 사숙하면서 품은 큰 뜻을 현실 속에서 하나둘 실현해나가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정약용은 평생 정조대왕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큰 스승이라고 여겼다. 그는 항상 ‘임금님의 부지런히 가르치신 뜻을 저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삶’을 살았다. ‘이익을 사숙하면서 품은 큰 뜻’과 ‘임금님의 부지런히 가르치신 뜻’은 정조대왕 사후 머나먼 유배지에 내동댕이쳐진 채 끝없는 좌절과 실의 속에서 헤매 다닌 정약용을 다시 일으키고 세워준 힘이자 에너지였다. 정약용은 평생토록 정치·경제·인문·자연·과학기술의 전 분야에 걸쳐 무려 500여 권에 이르는 분량의 책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은 18년(1801~1818년) 유배 생활 동안 집필한 것이다. 그는 훗날 당시를 “임술년(1802년) 봄부터 즉시 저술하는 일에 몰두하여, 붓과 벼루만 곁에 두고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작업했다. 이 때문에 왼쪽 어깨가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이 될 지경에 이르렀고, 시력이 아주 나빠져 오직 안경에만 의지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정약용은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유배객의 삶을 살면서 보통 사람의 정신적·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도록, 이렇게 집필 및 저술 활동에 미친 듯이 매달렸던 것일까? 타고난 지식 욕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실학(實學)의 학문적 성과를 이론적으로 집대성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분명 이러한 욕구·열정·사명감이 정약용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 나름의 생각으로는, 보다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이유가 또 다른 곳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정조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더불어 꺾여버리고 또 유배형에 처해진 후 현실의 정치무대에서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정약용 자신의 큰 꿈과 뜻, 곧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의 의지와 구상을 비록 학문의 영역에서나마 실천하고 완성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현실에서는 이미 좌절당한 큰 꿈을 미래의 개혁 세대를 위해 준비해놓는 일은 성호 이익과 정조대왕을 통해 배우고 익힌 큰 뜻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정약용의 저술은 단순한 기록과 문헌이 아니라, 그가 성호 이익과 정조대왕의 가르침을 좇아 이루고자 했던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안을 집대성해 완성하는 작업임과 동시에 미래 조선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가 정치·경제·행정·법제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조선 사회를 위한 청사진이라고 한다면, 그가 유배형에 처해지기 직전에 완성한 <문헌비고간오>나 유배생활 동안 저술한 유학의 각종 경전과 역사서에 관한 해설 서적들은 학문 및 정보·지식 시스템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었다. 또한 <마과회통>류의 집필은 과학기술, 특히 의학 분야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고, <아언각비>나 <이담속찬>류의 저술은 문자와 일상생활 속의 언어 및 풍속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경세유표>는 1799년에 발표한 <전론(田論)>과 더불어 조선의 사회경제에 관한 총체적인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17세기 이래 면면히 이어져온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지개혁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제사상과 토지개혁론을 주창했다.

중농주의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하고 완성하다

반계 유형원 이후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은 토지겸병(대토지 소유)과 지주-소작 관계의 확산에 따른 사회경제적 폐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이 즉각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균전론(均田論), 한전론(限田論), 둔전론(屯田論) 등은 모두 이러한 와중에 나온 대표적인 토지개혁론이다. 그런데 이들 토지개혁론은 비록 제한적인 수준이지만 모두 지주적 토지 소유의 잔존과 농민이 아닌 사람의 토지 소유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1799년 <전론>에서 최초로 주장한 토지개혁론인 ‘여전론(閭田論)’은 일체의 토지 사유(私有)를 허용하지 않고 또한 농사짓는 사람에게만 토지 점유권과 경작권을 준다는 점에서 이들 토지개혁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특히 정약용은 여기에서 유형원과 이익 등 이전 세대의 경제학자들이 제기한 토지개혁론의 문제점과 실현 가능성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자신의 토지개혁론(여전론)을 펼쳐 보임으로써 중농주의 경제학의 수준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먼저 정약용은 모든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이 이상(理想)으로 삼은 고대 중국 정전제(井田制)의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제도가 한전(旱田: 밭)이나 평전(平田: 평지의 논밭)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이미 수전(水田: 논)이나 산과 계곡을 개간해 경작지로 삼은 조선의 현실에는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장차 정전제를 시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정전제는 시행할 수 없다. 정전이란 한전이다. 수리시설이 이미 되어 있고, 메벼와 찰벼를 이미 맛있게 먹고 있으니, 어찌 수전을 버릴 수 있겠는가? 정전이란 평전이다. 산의 벌목에 힘써서 산과 계곡이 이미 개간되었는데, 평지의 논밭을 제외한 산과 계곡의 나머지 토지를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 정약용, <여유당전서> ‘전론 2(田論二)’ 중에서

아무리 이상적인 제도라고 할지라도 이미 변화한 현실에 맞지 않다면 채택할 수 없다는 정약용의 ‘실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정약용은 반계 유형원의 ‘균전론’ 역시 인구 및 가구 수의 변동 혹은 토지의 질과 비옥도의 차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토지개혁론이라고 비판한다.

“장차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균전제는 시행할 수 없다. 균전이란 토지 외 인구를 계산하여 이를 균분(均分)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구의 증가와 감소는 달마다 다르고 해마다 변한다. 그러므로 올해에는 갑율(甲率)로써 분배하고 내년에는 을율(乙率)로 분배해야 하는데, 그 터럭과 같은 차이는 교묘하여 살필 방법이 없다.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의 구별 또한 밭두렁마다 일정하지 않은데, 어찌 균등할 수가 있겠는가?”

   - 정약용, <여유당전서> ‘전론 2(田論二)’ 중에서 

그럼 이익이 주장했던 ‘한전론’은 무엇이 문제인가? 정약용은 토지 사유제를 허용하면서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토지 거래를 제한하는 방식은 현실에서는 온갖 편법과 탈법을 낳아 시행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즉 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토지를 몰래 소유하는 이른바 ‘차명(借名) 거래’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한전론’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장차 한전제(限田制)를 시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한전제는 시행할 수 없다. 한전이란 토지를 매각함에 있어 일정한 한도에 이르면 더 이상 팔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내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서 토지를 한도 이상으로 늘인들 누가 알 것인가! 또한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빌어서 토지를 한도 이하로 줄인들 누가 알 것인가! 그러므로 한전제는 시행할 수 없다.”

- 정약용, <여유당전서> ‘전론 2(田論二)’ 중에서 

이렇듯 정전제, 균전론, 한전론 등의 토지개혁론을 차례차례 비판적으로 살펴본 다음, 정약용은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고 농민을 ‘여(閭: 촌락)’ 단위로 집단화하여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하고 각자의 노동량에 따라 수확물을 분배하는 ‘여전론(閭田論)’이라는 새로운 토지개혁론을 주창한다. 이렇게 할 때에만 지주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발생하는 국가 재정의 곤란과 농민의 궁핍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대토지 소유와 지주-소작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당시의 농업 경제체제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토지 공유제와 자영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농촌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완전히 새로운 경제 발전 전략이었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를 개척하다시피 한 김용섭 교수는 “그때까지 나와 있는 여러 가지 토지개혁론 중 가장 합리적이고, 개혁 방안으로서 가장 철저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중농주의 경제학파가 이상적인 제도로 여겼던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을 여전론만큼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반영한 토지개혁론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토지개혁의 이상과 원칙에 철저했던 만큼 여전론은 그만큼 실행에 옮기기 곤란한 난제(難題)였다. 특히 정조대왕 사후 세도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정치적 상황은 지주들의 이익을 훼손하는 어떤 토지 정책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권력을 장악한 세도 가문들이 직접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정약용은 유배 생활 중이던 1817년에 저술한 <경세유표>에서 앞선 <전론>에서 주장한 여전론과는 다른 ‘정전론(井田論)’을 제시했다.

정전론은 현실적으로 지주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되, 전국의 토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하고, 이 아홉 구획으로 나눈 정전(井田) 중 8/9은 사전(私田)으로 하고, 나머지 1/9은 공전(公田)으로 삼아 국가에 세금을 바치도록 하자는 방안이었다. 이때 국유지나 특정 지역의 토지는 즉시 정전제를 실시하지만, 부호나 지주가 소유한 토지는 정전으로 편입될 공전 1/9 부분만 국가에서 사들인다. 또한 부호나 지주가 소유한 토지를 국가가 점차적으로 사들여 정전으로 편입해 빈농(貧農) 혹은 무전농(無田農)들에게 분배하여 경작하도록 하는 한편 국가에서 사들이지 못한 지주 소유의 토지에 대해서는 소작농들이 골고루 소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병행했다. 이와 같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부호나 지주의 토지 소유를 줄여 나가고, 빈농·무전농·소작농의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면서 점차 독립 자영농으로 육성해 궁극적으로는 토지개혁의 이상인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을 완성해나간다는 것이 ‘정전론’의 대강이다.

이렇듯 정전론은 정약용이 관료 시절 <전론>을 통해 주장한 ‘여전론’보다 크게 후퇴한 토지개혁론이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개혁의 큰 꿈과 뜻을 함께 한 정조대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개혁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관료 정약용과 머나먼 유배지에서 ‘실현 가능한’ 사회개혁의 청사진을 모색한 유배객 정약용이 처했던 입장과 상황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물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전론이 여전론보다 뒤늦게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이 ‘후퇴했다거나 현실과 타협했다’고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섣부르다. 오히려 김용섭 교수의 지적대로 “여전론은 정전론을 넘어서는 이상적 개혁사상이었다고 하겠으며, 정약용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한 것도 여전론으로써 개혁되는 경제사회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여전론이야말로 17세기 이후 등장한 여러 토지개혁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을 가장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구현한 중농주의 경제학의 ‘집대성이자 완성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정약용의 경제사상    여전론 :

“토지의 주인은 국가와 농민뿐이다.”


농업 경제를 주요 기반으로 한 봉건 왕조체제에서 토지 소유에 관한 문제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지로부터 나온 생산물에 의해 나라의 재정도 백성의 삶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양대 전란 이후 체제 개혁을 부르짖은 학자나 사상가들은 모두 토지 소유 문제, 특히 토지겸병(대토지 소유)과 지주-소작 관계의 폐단을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로 다루었다. 그럼 정약용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을까? 이 문제는 그의 경제사상이 출발하는 시작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신(臣)이 일찍이 생각해보건대, 토지에는 오직 두 사람의 주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 하나가 국가(임금)이고 다른 하나는 농민입니다. ---(중략)--- 이 두 사람 이외에 또 누가 감히 토지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부호와 지주들이 멋대로 토지를 겸병(兼倂)하여, 나라가 거두는 세금 이외에 사사로이 토지에서 조세(租稅: 소작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토지의 주인이 셋이 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정약용, <여유당전서> ‘호남 여러 읍의 소작농이 조세 바치는

풍속을 엄격하게 금지하기를 청하려던 차자(箚子)’ 중에서

정약용이 형조참의로 벼슬살이하던 1799년에 발표한 <전론>은 이처럼 ‘토지의 주인은 국가와 농민뿐이다’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약용의 경제사상이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라는 ‘토지 공유’와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갖는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가 <전론>을 통해 세상에 밝힌 여전론에는 이러한 기본적인 토지사상이 철두철미하게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정약용이 주창한 여전론은, 여(閭)라는 마을 단위의 확정→모든 토지의 공유화→공동 노동 및 경작→공동 수확→투하 노동량 및 노동 기여도에 따른 공동 분배의 과정 및 절차로 이루어진 토지개혁론이다. 특히 정약용은 여전론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농사를 짓는 사람만 토지를 얻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얻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럼 ‘여전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여(閭)’는 산골짜기와 시내 언덕의 지세(地勢)에 따라 경계 구역을 정하고 30호(戶)를 기본 단위로 해서 설치한다. ‘여’의 모든 토지는 공유화(국가 소유화)해서 마을 백성의 공동 소유로 만든다. 그리고 ‘여’에 소속된 농민들은 여장(閭長: 우두머리)의 지시에 따라 토지를 공동 경작하고 수확한다. 그럼 공동으로 경작하고 수확한 생산물은 어떻게 분배될까? 이에 대해 정약용은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제안한다.

“매일 여의 농민들이 일할 때마다 여장은 노동일수와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해둔다. 그리고 곡식을 거둘 때 그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창고로 운반한 다음 양곡을 분배한다.

이때 먼저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계산하고, 다음에는 여장의 녹봉(봉급)을 제한 다음 그 나머지를 가지고 기록해 둔 장부에 의거하여 노동일수와 노동량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한다.”

- 정약용, <여유당전서> ‘전론 3(田論三)’ 중에서    

여의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하고 수확한 다음 국가에 바치는 세금과 여장의 녹봉을 제외한 나머지 곡물을 각자의 노동량과 노동일수에 따라 공동 분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여전론은 공동 소유-공동 노동-공동 분배의 원칙에 입각한 농촌공동체론으로, 당시 토지 사유-대토지 소유-지주·소작 관계에 의거한 봉건지주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토지개혁론이었다.

 정약용의 경제사상    정전론 : “전국의 모든 토지를

공전 1구획과 사전 8구획의 정전으로 개혁한다.”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지 15년째 되는 해인 1817년 정약용은 <경세유표> ‘전제(田制)’를 저술해 이전에 자신이 주장한 여전론과는 사뭇 다른 ‘정전론’이라는 토지개혁론을 내놓는다. 이 정전론은 예전에 자신이 비판한 중국 고대의 정전제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는 토지개혁론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론이 지닌 급진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점진적인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다.

“반드시 수백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하되, 절대 굽히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토지의 수용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하되, 그 선후(先後)의 순서를 따라 시행한다면 정전제의 이상(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약용, <경세유표> ‘정전론’ 중에서

이전 여전론에서는 토지의 사적 소유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모든 토지를 공유화하기 때문에 부호(富豪)나 지주 소유의 토지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작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적 소유의 토지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 정전론을 시행하자면 가장 어렵고 곤란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다름 아닌 부호나 지주 소유의 토지를 어떻게 정전제로 편입·수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난제에 대해 정약용이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국유지나 새롭게 개간되는 토지에서는 지주-소작 관계를 철폐하고 즉시 정전제를 실시하면 된다. 또한 정전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자영농 소유의 토지 역시 정전제를 시행한다. 이때 정전에 편입되는 농민은 사전 8구(區)를 경작하는 자영농민이 되고, 공전 1구만 공동 경작해 그 수확물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친다. 정약용은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나라와 임금이 먼저 스스로 토지개혁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강제적으로 소유권을 빼앗아 정전에 편입시킬 수 없는 부호나 지주 소유의 토지는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해 정약용은 초기 정전으로 구획되는 부호나 지주 소유의 토지 중 1/9에 해당하는 공전만 나라에서 돈을 주고 사는 방법을 구상했다. 이때 나라에서 매수하지 못한 토지의 소유권은 여전히 부호나 지주들이 갖는다. 마찬가지로 향후 정전으로 편입되는 부호나 지주 소유의 토지 역시 공전을 제외한 나머지 사전 8구에 대한 소유권이나 그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에 대한 지배권과 소작료 징수 권한은 그들이 갖게 된다. 단 정전 내에서의 지주-소작 관계에서는 부호나 지주들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가 견제되기 때문에, 소작농은 지주로부터의 일방적인 지배-예속 관계에서 벗어나 일정하게 자유를 누리는 독립농의 지위를 가질 수 있다.

정약용은 지주-소작농의 봉건적 예속 관계나 고율의 소작료 착취를 해체시키고, 소작농민을 정전제의 사전 8구와 공전 1구를 경작하는 독립자영농민으로 점차 육성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정전제를 시행하면 비록 당장에 토지개혁의 이상은 실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대토지 소유와 지주-소작 관계의 만연으로 피폐해진 나라 재정을 튼튼하게 하는 한편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은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약용은 이러한 부호나 지주 소유의 토지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수백 년에 걸쳐서라도 점진적으로 나라에서 사들이거나 혹은 헌납·기증을 받아 정전의 본래 목적 곧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의 경제사상    상업적 농업론 : 농민의 경제적 안정과 부의 축적을 위해 상업적 농업을 적극 권장하다.

정약용은 비록 토지개혁을 주요하게 여긴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계보를 이었지만, 당시 크게 발달한 시장 및 상품-화폐경제에 대해서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만 그의 상업관은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한 유수원이나 박제가와 같은 중상주의 경제학자와는 사뭇 달랐다. 즉 중상주의 경제학파가 상업과 상인을 중심에 둔 상업관을 펼쳤다면, 정약용은 농업과 농민을 중심에 둔 상업관을 펼쳤다. 정약용은 농촌의 상업 활동과 상업적 농업을 경영하는 농민에 초점을 맞춰 상업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는 상업적 특권을 누리고 매점매석을 일삼는 부상(富商) 혹은 도고(都賈)들의 상업 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정약용의 상업관은 중농(重農)의 취지와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업 옹호론이었고, 국가(관청)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시장 질서를 다스리고 상업적 특권과 독점적 이익의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업 통제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장과 상업 활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성호 이익과 시장경제와 상업 활동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유수원과 박제가의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약용은 농업 경영의 개선과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관련해 ‘상업적 농업’에 관심을 두었는데, 여기에서는 자급자족이나 생계유지 수단으로써의 곡식이나 작물 재배를 넘어선 상업적 이윤 추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더욱이 매우 전문적이고 특화된 상업적 농업 경영을 권장하면서 고용 노동력을 이용한 상업 이윤의 추구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모시·삼·참외·오이 등과 온갖 채소와 약초를 심어서 잘만 가꾼다면, 한 고랑의 밭에서 얻는 이익은 헤아릴 수 없다. 도성 안팎과 큰 도시의 파·마늘·배추·오이 밭 등은 10묘의 땅에서 얻은 수확이 돈(錢) 수만을 헤아린다(10묘는 논 4마지기이고, 돈 1만은 100냥이다). 서도(西道)의 연초 밭, 북도(北道)의 삼밭, 한산(韓山)의 모시 밭, 전주(全州)의 생강 밭, 강진(康津)의 고구마 밭, 황주(黃州)의 지황(地黃) 밭 등은 모두 최고 등급의 논과 비교해도 그 수확의 이익이 10갑절이나 된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삼을 또 밭에다 심어서 그 남는 이익이 혹 천만이나 되는데, 이것은 논밭의 등급으로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중략)--- 무릇 이와 같은 종류의 작물들을 해마다 심고, 직업으로 삼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토지의 비옥함 혹은 메마름과는 관계가 없다.”

- 정약용, <경세유표> ‘전제 11(田制十一)’ 중에서

이렇듯 정약용은 농촌을 둘러싼 시장 및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중농의 취지에서 자영농민의 경제적 안정과 부의 축적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정약용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주-소작 관계의 봉건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신분의 자영농민이야말로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의 토양이자 자양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이 비록 봉건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들이더라도 봉건적 지주-소작 관계의 해체와 독립 자영농민의 육성을 지향했다는 그 개혁론의 성격 때문에 근대의 징후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은 19세기 후반 이후 ‘반봉건과 근대화’의 기치를 내건 정치세력이라면, 반드시 봉건적인 지주-소작 관계의 해체와 토지개혁을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토지개혁사상 중의 하나가 바로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 정약용이 주창한 토지개혁론의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입은 정치 세력을 찾는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그들은 동학(東學)과 갑오농민군이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비록 실패와 좌절로 끝났지만 ‘밑으로부터의 반봉건과 자주적 근대화’를 모색한 대표적인 역사적 경험으로 평가받는다. 이때 갑오농민군이 내건 ‘반봉건과 자주적 근대화’의 핵심 강령은 다름 아닌 ‘농민(토지) 혁명’이었다. 봉건적인 지주-소작 관계를 해체하고 모든 토지를 고루 나누어 경작한다는 것이 그들이 내건 핵심적인 가치였다. 이러한 갑오농민군의 토지혁명 강령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던 것이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북한의 역사학자 최익한이 저술한 <실학파와 정다산>이라는 책에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정약용이 현재 전해오는 <경세유표>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성향을 띤 별본(別本) <경세유표>를 비밀리에 써서 초의선사에게 전했는데, 그 책이 전봉준과 김개남 등 갑오농민군의 지도자들에게 들어가 ‘농민(토지)혁명의 강령’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다.

“(전라남도) 강진지방의 야사에 의하면 정약용의 저서로서 현행본 <경세유표> 이외에 별본이 있었던 것 같다. <강진읍지> ‘명승초의전(名僧草衣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초의는 정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도교(道交; 학문적 동지)다. 다산이 유배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하생 이청(李晴)과 초의에게 주어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그 일부는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당한 남상교·남종삼 부자 및 홍봉주 등에게 전해졌고,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 윤세현, 김병태, 강운백 등과 해남의 주정호, 김도일 등을 통해 갑오년에 기병한 전녹두(전봉준), 김개남의 수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다. (갑오년) 전쟁 끝에 관군은 정다산 비결이 전봉준 일파의 비적(匪賊)을 선동하였다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 백련사, 대둔사 등 사찰들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다산의 실학에 대한 간단한 재론’ 중에서

별본 <경세유표>가 실제 존재했는가에 대한 논란을 떠나 이러한 얘기가 민간에 널리 퍼진 까닭은 정약용의 경제사상이 그만큼 갑오농민군의 ‘농민혁명’에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갑오농민군이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을 목표로 삼은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을 이은 계승자였음을 입증해준다.

한정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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