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실학과 경제학의 거두였던 성호 이익을 한 마디로 요약해 표현한다면 어떤 말이 가장 적합할까? 그는 끊임없이 퍼내도 오히려 청량(淸凉)한 물을 더욱 많이 뿜어내는 ‘마르지 않은 실학(實學)의 샘’이고, 자신의 호(號)처럼 무수한 학문의 별들을 품어 길러낸 ‘별들의 호수(星湖)’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체제 꿈꿔

이익은 유학의 경사(經史)는 물론 경제, 풍속, 문화, 천문, 지리, 문학, 종교, 음악, 과학기술 등 학문의 전 분야에 걸쳐 아주 다양하고 풍부한 저술과 기록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백과전서(百科全書)적인 학풍은 18세기 실학과 경제학의 발전에 깊고 넓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활동한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이익 학문의 ‘샘물’을 마시면서 실학의 세계관과 개혁론을 다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마르지 않은 샘’ 혹은 ‘별들의 호수’

이익의 학문적 영향을 받아 18세기 실학의 대스타가 된 인물들은 크게 그의 집안사람들, 제자들 그리고 그가 사망한 후 사숙(私淑;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배우다)으로 제자가 된 사람들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집안사람들로는 이중환·이가환을 들 수 있고, 제자들로는 윤동규·안정복·신후담·권철신 등이 있고, 사숙한 제자로는 정약용을 꼽을 수 있다. 또한 북학파 실학자였던 박지원과 박제가 역시 이익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후대 학자들은 이익을 일컬어 자신의 호(號)처럼 수많은 실학의 스타들을 담아 길러낸 ‘별들의 호수’라고 했던 것이다.

이익의 학문이 이토록 18세기 실학과 경제학의 ‘산실(産室)’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익은 26살 되던 1706년, 입신양명의 꿈을 완전히 접고 경기도 안산의 첨성촌에 거처하면서 죽음을 맞는 83살 때까지 오로지 독서와 사색 그리고 저술과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이 첨성촌이 이익 학문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첨성촌에 삶의 터전을 잡은 배경에는 숙종 시대를 휩쓴 당쟁의 피비린내와 그의 집안의 불행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익의 집안은 남인의 명문가였는데, 그의 아버지 이하진은 숙종 집권 시절 남인이 대거 숙청당한 경신대출척 때 평안도 운산군으로 귀양을 갔다. 이익은 아버지가 귀양살이하고 있던 곳에서 태어났고 또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이익이 태어난 다음해 6월 이하진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선대 때부터 집안의 터전이 되어 온 첨성촌으로 돌아온 이익은 입신양명에 뜻을 두고 주류 유학(성리학)과 과거 공부에 매달렸다. 이때 이익에게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둘째 형 이잠이었다. 그러나 이익이 26살 되던 해, 임금에게 상소한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잠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아버지에 이어 자신이 가장 존경한 둘째 형마저 당쟁의 칼바람 앞에 무참하게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이익은 정치의 냉혹함을 절실히 깨닫고 입신양명의 뜻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이때부터 이익은 주자 성리학과 과거 급제를 위한 학문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와 인간 그리고 사회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더 넓고 깊은 학문의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익의 집안에는 선대(先代) 특히 선친인 이하진이 1678년 청나라 사신 길에서 돌아올 때 사온 수천 권의 장서가 있었다. 이익은 죽음을 맞는 1763년까지 무려 57년간이나 수천 권의 장서를 읽고 사색하며 저술하는 한편,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제자들과 토론하고 문답하며 ‘성호 실학’의 힘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실학과 경제학의 백과전서 <성호사설>

숙종 때 노론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남인들은 권력의 핵심부에서 배제당한 채 벼슬살이를 하거나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와 같은 정치 상황 때문에 어느 당파보다 남인 계열에서 비판적인 현실 인식과 사회 개혁론이 많이 나왔고, 또한 주류 유학(성리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서양의 과학 기술이나 신문물 그리고 천주교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상황 이외에 실학파 중 남인 계열의 인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로는 단연 이익의 활약(?)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은 모두 이익이 닦아놓은 학문과 사상을 먹고 자랐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익의 학문 및 사상 세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류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리학의 틀에 안주한 채 사대부 권력을 옹호하고 사회 현실을 외면하기보다는 나라의 부강함과 백성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실제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익이 자신의 조카이자 제자인 이병휴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는 이미 실학(實學)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실무에 뜻을 두고 헛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 것이나 80세 되던 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사람과 만나 대화할 때 일찍이 유술(儒術; 유학의 학술)을 갖고 말하지 않았네.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이네’라고 한 것만 보아도 그가 추구하는 학문이 주자 성리학과는 크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탓에 이익은 ‘조선이 개국한 이후로 시무(時務)를 안 사람은 아무리 손꼽아 봐도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두 사람’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부국강병 및 사회 개혁론이야말로 이익이 추구하는 실제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정통성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익의 학문 세계는 서학(西學), 즉 서양의 천주교와 과학 기술에 대해서도 아주 개방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훗날 남인 계열에서 서학 혹은 천주교에 매혹당한 학자들이 다수 나온 배경에는 이러한 이익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학풍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자 성리학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익의 학문 세계는 경제, 풍속, 문화, 천문, 지리, 문학, 종교, 음악, 과학 기술 등 학문의 전 분야로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또 자신의 직전(直前) 제자들이나 후대에 자신을 사숙한 제자들에게 ‘지식과 정보, 문헌과 기록의 무궁무진한 보고(寶庫)’를 남겨줄 수 있었다. 그 보고가 다름 아닌 <성호사설(星湖僿說)>이다.

이익은 4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책을 읽거나 사색하면서 느낀 점 혹은 제자들과 묻고 답한 내용을 기록해두었는데, 그가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집안의 조카들이 이것들을 정리해 편찬한 책이 <성호사설>이다. 당시 이익은 이 책에 스스로 지은 서문(序文)을 썼다.

“<성호사설>은 성호 노인의 희필(戱筆; 자신의 글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성호 노인이 이것을 지은 것은 무슨 뜻에서일까? 특별한 뜻은 없다. 뜻이 없었다면 왜 이것이 만들어졌을까? 성호 노인은 한가로운 사람이다. 독서의 여가를 틈타 전기(傳記), 제자백가서, 문집, 문학, 해학이나 혹은 웃고 즐길 만해 두고 열람할 수 있는 것을 붓이 가는대로 적었다. 이렇게 많이 쌓였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처음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권책에 기록하게 되었는데, 훗날 제목별로 그대로 나란히 늘어놓고 보니 다시 두루 열람할 수 없어서 다시 문별(文別: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 등)로 분류해 드디어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이에 이름이 없을 수 없어서 ‘사설(僿說)’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이익, <성호사설> ‘자서(自序)’

비록 이익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도 ‘자질구레하고 번잡한 글’이라는 ‘사설(僿說)’을 책의 제목으로 삼았지만 실제 이 책은 당시의 학문, 사상은 물론 사회 현실과 실생활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는 ‘백과전서(百科全書)’였다. 이익의 학문 및 사회 개혁론이 완숙한 수준에 이른 40세부터 죽음을 맞이하기 3년 전까지 저술한 글들이 모두 담겨 있는 만큼 18세기 조선 실학과 경제학의 ‘종합 보고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책에서 이익은 반계 유형원의 ‘농업 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한 중농주의’ 사회 개혁론을 계승한 자신의 경제사상을 드러냈는데, 그것은 크게 ‘한전론과 상공업 억제 그리고 화폐 철폐’로 요약할 수 있다.

유형원이 주장한 균전론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익의 한전론은 기본적으로 대토지 소유의 폐해를 개혁하기 위한 토지제도라는 진보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유형원이 상공업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고 더욱이 화폐 유통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반면 이익은 화폐 유통과 상공업의 발달을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파괴하는 원인으로 보고 대단히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이렇게 본다면 유형원이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 토지 개혁론이 이익에 이르러 한발 더 나아갔지만 상공업 발달 및 화폐 유통에 관한 인식은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겠다.

이익의 경제사상 중농주의 |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체제

이익의 경제사상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체제’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 그는 국가의 경제 시스템이나 백성의 생활 경제의 목표를 기본적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에 두었다. 여기에서 국가와 백성이 의존해야 할 부(富)와 재물은 모두 토지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토지 문제’는 나라를 다스리고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가치가 된다. 이익은 ‘토지’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개인적인 토지 소유가 모든 혼란과 분쟁의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올바른 정치란 경계(經界; 토지를 나누고 도랑과 두둑의 한계를 정하는 것)를 바르게 하는 것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고르지 못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상황이 다르다면 어떻게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 사람(대토지 소유자)의 토지를 빼앗아 저 사람(토지가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없는 것은, 각자 자신이 점유(占有)하고 있는 토지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익, <성호사설> ‘균전(均田)’

이익은 천하의 모든 토지는 임금의 소유, 즉 국가 소유일 뿐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개인이 사사로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단지 국가 소유의 토지를 한때나마 강점(强占)하고 있는 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무릇 천하의 토지는 모두 임금의 땅이다. 백성들이 제각각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한 것은 임금의 땅을 한때 강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 본래 주인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아버지의 집기(什器)를 자식들이 나누어 점유해 많이 소유하기도 하고 또 적게 소유하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고루 나누어 가지라고 명령함에 이르러서는 감히 제멋대로 점유하지 못하는 일과 같다.”

- 이익, <성호사설> ‘균전(均田)’

이렇듯 이익은 토지의 국가 소유가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체제’의 대의(大義)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이미 권문세가와 지방 토호(土豪)들의 대토지 소유가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부자들이 소유한 토지를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주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토지 개혁 정책이라고 보았다. 이익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 말기 신(新)왕조를 세운 왕망(王莽)을 사례로 들어 이러한 토지 개혁론을 비판했다.

“왕망이 한 일은 그 뜻이야말로 컸다. 마침내 천하의 토지를 왕전(王田; 국가의 토지)이라고 이름하고, 무릇 토지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 뒤 부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주려고 했다. 만약 그 뜻이 이루어졌더라면 또한 성인(聖人)이 후대에 남긴 은혜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세가와 호족(豪族)들이 참고 있었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대개 이로움을 좇고 해로움을 피하는 법이다. 이에 천하가 소란스러워졌고, 왕망 역시 패해 죽임을 당했다.”

- 이익, <성호사설> ‘균전(均田)’

그럼, 이익은 어떻게 토지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모든 토지가 국가의 소유여야 한다는 전제를 간직하면서도 스스로 말한 것처럼 ‘부강(富强)한 자들의 마음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토지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여겼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의 토지 소유 특히 대토지 소유로 인한 폐해를 없애기 위해 토지 개혁을 실시하되 부유한 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의 토지 개혁은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구상을 좇아 나온 토지 개혁론이 다름 아닌 ‘한전론(限田論)’이다.

이익의 경제사상 토지 개혁론 | 한전론

이익은 모든 토지의 국가 소유를 전제로 한 정전제(井田制)를 ‘농업 중심 경제 체제’의 이상으로 삼았고 또한 대토지 소유로 인한 국가 재정의 약화와 백성들의 피폐해진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자는 대토지를 점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관청의 부역과 부호(富豪)의 빚에 찌들려 파산지경에 이르고, 마침내 자신의 토지까지 잃고 만다.”

- 이익, <성호사설> ‘결부지법(結負之法)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권문세가나 부유층의 세력을 무시한 토지 개혁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농민들이 소유할 수 있는 일정한 면적의 토지, 곧 영업전(永業田)을 정하는 한편 권문세가나 부유층의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해 빈부 격차를 줄여나가면서 점차적으로 균일(均一)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이익의 토지 개혁론에서 영업전은 일체의 매매 행위가 금지된다. 그리고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자유롭게 매매하되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정해 대토지 소유로 인해 발생하는 폐단을 억제하고자 했다. 이렇듯 이익의 토지 개혁안은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농민들이 먹고 살 수 있고 나라에 세금을 바칠 수 있는 생계 기반을 확보하는 한편 양반 사대부 혹은 지주 계층의 토지 강탈이나 편법 취득을 통한 대토지 소유를 막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해서 ‘한전론(限田論)’이라고 불린다.

한전론의 토지 개혁에서는 영업전의 기준선을 초과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강제로 빼앗지 않고 또한 그 기준선에 미달한다고 해도 토지를 더해 주지 않는다. 즉 이익은 대토지 소유자의 땅을 빼앗아 농민 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는 토지 개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익이 <성호사설>에 기록한 ‘균전론(均田論)’의 요점을 간추려보면, 그가 빈부 갈등과 분쟁을 야기하는 급진적인 방식의 토지 개혁보다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점진적인 방식의 토지 개혁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매우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예전에 균전론을 지었는데, 그 대략은 이렇다. 토지 몇 마지기로 한계를 정해 한 사람의 농민의 영업전으로 만들되 노력에 따라 많이 점유한 자의 토지를 빼앗지 않고 없는 사람을 추궁하지 않는다. 또 한계로 정해놓은 몇 마지기 이외의 토지는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게 한다. 단 토지를 많이 가진 자의 토지 가운데 다른 사람의 영업전이 몇 마지기라도 들어 있으면 반드시 장부를 빼앗아 불사르고 다시 돌려준다. 다만 관청에서 토지 장부를 보관하여 함부로 팔 수 없게 하면 토지가 없는 사람들이 간혹 조금씩이나마 토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업전의 한계에 들어 있는 토지만 위의 사례에 따라 하되 그 이외의 토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무릇 토지를 파는 자는 가난한 법인데 만약 가난해도 토지를 팔 수 없다면 겸병(兼幷: 대토지 소유)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 또 영업전을 경작해 수입만 있고 지출이 없다면 가난한 사람 역시 망하지 않을 것이다. 토지가 많은 부자에게는 토지 파는 일을 허용한다면 그 자식들이 나누어 점유한 경우에 못난 자들은 반드시 토지를 팔게 된다. 그러면 점차로 토지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 이익, <성호사설> ‘균전(均田)’

이익은 한 가구가 소유할 수 있는 토지는 50묘(1묘는 대략 200평) 정도로 한계를 두어도 되지만 권세가나 부자들의 토지 매수를 경계해 차라리 100묘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100묘의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한 다음 토지를 파는 사람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토지를 못 팔도록 금지한다면 토지겸병(대토지 소유)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는 토지를 늘리고 재산을 일으킬 수 있는 반면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자라고 하더라도 자식이 많으면 그들에게 토지가 나누어지고 또 그 중 못난 자식은 토지 소유 상한선(영업전) 이외의 토지를 팔아 치울 것이기 때문에 불과 몇 세대 만에 일반 농민과 다름없게 된다고 예측했다. 이렇게 해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는 점차 줄어들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토지 소유의 상한선 이내에서 자급자족하는 농업 경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이익의 ‘점진적인 방식의 토지 개혁안’이었다고 하겠다.

이익의 경제사상 반(反) 상업주의

이익은 18세기 경제학자 중 상공업 발전과 화폐 유통을 가장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이상으로 삼았던 그의 시각으로 볼 때 상업의 활성화나 상품 화폐 및 시장 경제의 발달은 곧 농업 경제의 황폐화를 뜻했다.

“농민은 한 해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하다. 그런데 상업은 교묘해 상인은 하루만 애써도 닷새를 먹을 수 있다. 백성들이 나라의 근본인 농사를 싫어하고 상업을 숭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이익, <성호사설> ‘선금말작(先禁末作)’

천하의 부와 재물은 모두 토지로부터 나온다고 여겼던 이익은 상인이 교묘한 상술로 하루 만에 벌어들인 닷새 치 식량 또한 농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업이란 부와 재물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로부터 강탈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익은 나라의 부강함과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농사를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그는 “백성이 농사에 힘쓰게 하는 일은 상업을 억제하는데 있다”고 단언했다.

또한 이익은 ‘시장’을 사치와 낭비 그리고 백성의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는 온상으로, 화폐 유통을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근원으로 보았다. 이에 그는 화폐 유통을 철폐하고 시장을 축소하는 한편 시장을 여는 날도 대폭 조정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익은 당시 매일같이 열리는 지방 시장은 백성들이 농사일을 멀리하고 게을리 놀며 시간이나 허비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면서 같은 날 시장을 열게 해 한 달에 6일 동안만 시장에 나오고 나머지 날은 농사에 전념하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관점은 물론 당시 실학자나 경제학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도, 이익의 ‘상업관과 화폐관’은 분명 퇴행적인 측면이 있다. 화폐 유통을 철폐하고 상업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는 이익의 경제관은 분명 양대 전란 이후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던 조선의 사회·경제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시대 역행적인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익의 ‘근검절약론’ vs. 박제가의 ‘소비론’

천하의 모든 부와 재물이 토지로부터 나온다는 이익의 경제사상에서 볼 때 경제의 최고 덕목은 ‘근검과 절약’이었다. 그는 “농사를 지어서 재물을 모으고, 검소함으로 재물을 절약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이 부유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사치와 낭비’야말로 경제의 최대 적(敵)이라고 주장했다. 이익은 사치와 낭비를 부추기는 근원은 다름 아닌 상업 활동과 화폐 유통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상업이 활발해지고 화폐가 범람하게 되면서 백성은 모두 이익에만 골몰해 농사를 버리고 상업에 매달리게 되고 또한 돈의 편리함에 빠져 화려한 복식과 사치스러운 물품을 구입하는데 온통 정신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보았다. 즉 상업과 화폐 유통의 발달은 백성들의 사치와 낭비를 부추겨 부와 재물을 허투루 쓰게 해, 나라와 백성이 모두 가난해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익의 ‘근검절약론’은 지난 3월호에서 소개한 박제가의 ‘소비론’과 정반대의 경제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박제가는 활발한 소비가 활력 넘치는 생산 활동을 불러온다면서 소비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는 조선은 오히려 근검절약 때문에 반드시 쇠퇴하게 될 것이라며 소비야말로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재물을 우물에 비유해 퍼내면 퍼낼수록 가득하게 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말라버리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이상으로 삼은 이익의 입장에서 보자면 단연 근검절약이 최고의 미덕일 수밖에 없다. 반면 상품 화폐 및 시장 경제의 활성화를 이상으로 삼은 박제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단연 소비와 사치가 최고의 미덕이다.

이것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와 상품 화폐 및 시장 경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근대 자본주의의 우군(友軍)에 가까운 사람은 이익이라기보다는 박제가다.

이익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익은 생전은 물론 사후에까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서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예를 들면 유학의 이병휴, 천문과 문장의 이용휴, 예학의 이삼환, 실학의 이가환·윤동규, 인문지리의 이중환, 역사의 안정복, 서학의 권철신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유형원에서 시작해 이익 계보를 이은 중농주의와 토지 개혁의 경제사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익의 사후 그를 사숙한 정약용에 의해 계승,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이 이익의 학문 세계와 조우한 시기는 그의 나이 16살 무렵인 1777년이었다.

이익의 사후 14년이 지난 뒤였다. 정약용은 이때부터 이익의 제자들과 그가 남긴 여러 유고(遺稿)들을 통해 경세치용과 서양의 과학 기술 및 신문명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자신의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스스럼없이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정약용은 <경세유표>를 비롯한 여러 저술에서 토지 개혁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다듬을 때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경제사상을 면밀히 검토하고 분석했다.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중농주의 경제사상의 계보에 대해서는 지난 4월호 ‘유형원’ 편에서 간략하게나마 다루었고 또한 이익과 정약용의 학문적 관계에 대해서는 이후 정약용을 다룰 때 다시 언급할 계획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겠다.

한정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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