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통해 부국 지향한 조선사 최초의 경제학자

유수원과 박제가의 ‘양반 상인론’에 대해 지난 3월호와 5월호에서 자세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실제 양반 사대부 출신이면서 상업 활동에 나선 상인이 있었을까? 16세기 조선의 문헌과 기록을 뒤지다 보면, 훗날 박제가와 유수원이 ‘양반 상인론’의 실제 모델로 삼았을 법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다름 아닌 <토정비결>의 저자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이다. 이지함이 탁월한 상업 수완으로 막대한 재물을 모은 대상인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이지함이 몸소 상인이 되어 막대한 재물을 축적했고 또한 백성들에게 생업(生業)을 가르쳤다고 전하고 있다. 유몽인은 이지함이 사망할 때 이미 20세의 나이였고, 또한 이지함의 집안인 한산 이씨와도 매우 절친한 관계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당시의 상황을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지함은) 손수 상인이 되어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맨손으로 생업에 힘써 몇 년 안에 수만 석에 이르는 곡식을 쌓았다. 그러나 모두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준 다음 소매를 펄럭이며 떠나가 버렸다. 바다 가운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그 열매가 수만 개나 되었다. 그것을 갈라서 바가지를 만들어서 곡식을 사들였는데, 거의 1000석에 이르렀다. 이 곡식을 한강변의 마포로 운송했다.”                 - 유몽인, <어우야담>

특히 이지함은 육지는 물론 바다와 강을 자유롭게 이용한 상업 활동을 펼쳤는데, 이것은 해상 및 수상 교통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아주 선진적이고 획기적인 상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지함의 주요 활동 무대는 해안가인 충남 보령과 강변인 서울의 마포로 알려져 있다. 마포는 당시에도 물산의 집산지로 상업과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렇듯 이지함이 평생 거처로 삼았던 지역이 뱃길을 활용하기 쉬운 상품 유통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해로(海路)와 수로(水路)를 이용한 상업 활동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이지함이 사망한 후 200여 년이 지난 1778년 <북학의>을 저술한 박제가는 당시(18세기) 조선이 수레를 이용하는 이로움을 포기하고 배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오로지 이지함만은 상선(商船)을 이용할 줄 알았다고 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일찍이 외국의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하여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식견은 탁월하면서도 원대했다고 하겠다. <시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옛 사람을 그리워하네. 진실로 내 마음을 알고 있으니.’”

- 박제가, <북학의>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뱃길을 자유자재로 이용한 이지함의 상술은 당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매우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전설과 설화를 만들어냈다.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싣고 네 모퉁이에 표주박을 묶어서 제주도에 세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풍랑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는 <어우야담>의 기록 역시 배와 뱃길을 다루는 이지함의 뛰어난 능력과 능숙한 솜씨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다고 하겠다.

더욱이 이지함은 자신의 탁월한 상재(商才)와 뛰어난 상술을 축재(蓄財)에만 쓰지 않고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는 일에도 십분 활용했다. 이지함은 가난을 구제할 때도 반드시 일정한 생산 능력을 갖추도록 가르친 다음 생산한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했다. 이때에도 이지함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맞게끔 기술을 가르치고, 생산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특별히 노력했다. 일종의 공장제 수공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진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해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려고 한 이지함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지함은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며 다 헤진 옷에 음식을 구걸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겼다. 이에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큰 움막을 짓고 거처하도록 하고, 수공업을 가르쳤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일정한 직업을 선택하도록 설득한 다음 직접 얼굴을 맞대고 귀에다 대고 일일이 타일러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각자 그 의식(衣食)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능력이 뒤떨어진 사람에게는 볏짚을 주어서 짚신을 삼도록 했다. 몸소 그 작업의 결과를 따져서 하루에 열 켤레를 만들어내면 짚신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했다. 하루의 작업으로 한 말의 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이익을 헤아려서 옷을 만들도록 했다. 이렇게 하자 두어 달 동안에 사람들의 의식(衣食)이 모두 넉넉해졌다.”

- 유몽인, <어우야담>

이지함이 살았던 조선의 16세기는 이제 막 지방 장시와 시장 경제가 번성하면서 민간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와 농본상말(農本商末)의 국가 정책 탓에 상업과 상인은 여전히 천대받고 멸시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지함은 나라와 백성과 개인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면 마땅히 상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여기고 몸소 상인이 되어 막대한 재물을 축적하는 상재와 상술을 보여주었다. 그는 몇 백 년을 앞서 상선과 뱃길을 이용한 선진적인 상업 방식과 공장제 수공업 생산이라는 선진적인 경영 방식을 조선 사회에 도입한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이었다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이지함과 이이 : 16세기 경세지학의 양대 거두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조선사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이었지만, 또한 임진왜란 이전 16세기 조선을 대표할만한 대학자이자 경세 사상가이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대학자들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화담 서경덕(1489~1546년), 퇴계 이황(1501~1570년), 남명 조식(1501~1572년), 율곡 이이(1536~1584년)가 모두 이때 활동했다. 토정 이지함(1522~1578년)의 행적과 연보를 살펴보면, 그가 퇴계 이황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서경덕은 이지함이 23세 되던 때 학문을 배운 스승이었다. 그는 주자성리학의 세계를 벗어난 유학자로서,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중시하는 이지함의 경세지학(經世之學)에 사상적 밑거름을 놓아주었다. 조식은 이지함이 남방(南方)을 유람할 때 만났다는 기록이 허목의 <미수기언>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때 조식은 이지함에게 “일찍부터 자네의 풍골(風骨)을 들어서 잘 알고 있네”라고 하면서 높이 칭찬하고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조식과 이지함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산림처사의 삶을 살면서도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자신의 뜻과 포부를 펼쳤다는 기질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교분을 나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훗날 사헌부 대사헌 이명관은 이지함의 ‘시장(諡狀)’에서 “토정 이지함의 뜻은 화담 서경덕의 고명한 조예(造詣)와 남명 조식의 확고한 입지(立志)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지함이 부국안민을 위한 경세지학을 함께 나눈 사상적 동지를 꼽는다면, 단연 율곡 이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지함이 이이와 교분을 나누기 시작한 시기는 그의 나이 35세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니까, 이이의 나이 21세 때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평생토록 사상적 동지 관계를 유지했다. 이이는 34세 때 지은 ‘시무구사(時務九事)’를 시작으로 ‘동호문답(東湖問答. 34세)’ ‘만언봉사(萬言封事. 39세)’ ‘걸변통폐법답(乞變通弊法答. 46세)’ ‘만언소(萬言疏. 47세)’와 마지막 ‘상소(48세)’에 이르기까지 무려 15년에 걸쳐 줄기차게 조선의 정치·경제·국방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창했다.

당시 이이가 올린 상소문의 기본 사상은 ‘안민지책(安民之策)’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이이는 ‘백성을 위해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 민생(民生)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정치·경제·국방 개혁의 신조로 삼았다.

이때 이이는 재용(財用)의 생산을 통한 안민(安民)이 나라의 최고 과제라면서, 훌륭한 정치란 백성이 힘을 제대로 펼 수 있게 해 생산의 길을 열어주고, 백성의 삶을 부유하게 해 선량한 마음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이의 ‘안민지책’은 이지함이 주장한 ‘부국안민’과 사상적 맥락을 함께 했다. 즉 그의 사상은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조선의 정치 및 국방 체제와 경제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이지함과 이이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앞서 16세기 조선을 ‘부국안민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경세지학(經世之學)을 펼친 대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리고 이지함은 ‘상공업을 발전시켜 농업을 보완해야 한다’는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과 ‘자원 경영·인재 경영·공동체 경영의 세 가지 정책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3대부고론(三大府庫論)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세지학을 세상에 펼쳐 보였다.  

이지함의 경제사상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 :

상공업을 발전시켜 농업을 보완해야 나라와 백성이 부유해진다.


조선은 개국 때부터 농업을 근본으로 하고 상공업을 말업(末業)으로 하는 경제 정책을 국시(國是)로 삼았다. 이때 국가의 근본이 되는 농업 경제 시스템은 토지의 국가 소유, 즉 국유제를 원칙으로 하되, 수조권(收租權; 경작한 곡물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누어지는 과전법(科田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상공업은 공무역(公貿易)과 관영 수공업을 통해 통제되면서 민간의 자유로운 상공업 활동을 억제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는 과전법 체제가 붕괴하고 지주-소작인 관계와 대농장 경영이 크게 확산되면서 거대한 사회·경제적 변동이 시작되었다. 즉 자영 농민층과 일부 중소 양반 계층이 몰락한 반면 양반 관료와 대지주 등은 막대한 부(富)를 집적하게 되고, 농민층의 분해로 인해 토지에서 탈락한 계층의 출현과 부의 집중에 따른 사치 풍조가 만연하면서 민간에서 상공업이 발달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민간에서 광산을 개발하고 또 사무역(私貿易)과 지방 장시들이 출현해 크게 활기를 띤 것도 이 시대 사회 현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때문에 ‘전국의 백성 가운데 9할이 말업을 좇고 1할이 본업(本業: 농업)을 행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당시 조정 관료와 유학자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의 급격한 변화가 농본말상(農本末商)의 경제 시스템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상공업을 억제하는 것을 국가 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즉 상공업이 발달하면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해 나라 경제가 황폐화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거나 사치 풍조가 만연해 사회 기강을 크게 무너뜨릴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지함은 이러한 당시의 주류적인 시각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농업(토지)이 아닌 상공업과 어업이나 광업에서 나오는 재물 또한 나라와 백성에게 이로움을 주고 부유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본업과 말업의 어느 한쪽도 폐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말업으로 본업을 보완해야 한다’는 이른바 ‘본말상보론’을 주창했다.

“대개 덕(德)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근본이라고 할 수 있고, 재물은 말단 지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과 지엽은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습니다. 근본으로 지엽을 견제하고 또한 지엽으로 근본을 보충한 다음에야 사람의 도리가 궁색하지 않는 법입니다. 재물을 생산하는 일에도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농업이 근본이라면 소금을 굽거나 철을 주조하는 일은 말단입니다. 그래서 근본인 농업으로 말업인 상공업을 통제하고, 말업인 상공업으로 근본인 농업을 보충한 다음에야 온갖 재용(財用)이 궁핍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 이지함, <토정집>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문’

이지함은 자신의 경세지학, 즉 부국안민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국부(國富)의 창출과 확대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새로운 국부를 창출하고 확대하는 데 있어서 ‘농본말상’의 경제 체제와 ‘사농공상’의 사회 질서는 근본적인 장애가 되었다. 오히려 상공업을 억제하고 상인과 수공업 장인을 천시하는 풍조 탓에 나라 전체와 백성의 삶이 가난과 곤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지함이 이러한 사회·경제적 난제(難題)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내놓은 경제 시책이 바로 ‘상공업을 발전시켜 농업을 보완해야 나라와 백성이 부유해진다'는 본말상보론이다. 여기에서 이지함은 상공업은 물론 어업, 광업 등을 활성화시켜 육지·바다·산·강의 전 국토에서 새로운 재용(財用)을 개발하고, 새로운 국부를 창출해 부국안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국안민에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경제적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또한 앞서 소개한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문’에서 이지함은 자신의 새로운 국부 창출 구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전라도 만경현에 양초도(洋草島)라는 섬이 있습니다. 나라와 개인이 소유하지 않은 섬이므로, 이 섬을 임시로 포천현에 소속시켜 고기를 잡아 팔아서 곡식을 사들인다면 몇 년 안에 수천 섬의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황해도 풍천부 근방의 초도(椒島)에 염전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섬 역시 나라와 개인이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이 섬을 임시로 포천현에 소속시켜 소금을 구워 팔아 곡식을 사들인다면 몇 년 안에 수천 섬의 곡식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 이지함, <토정집>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문’

어업과 염업을 개발하고 또한 상업 활동에 나서 백성들의 가난과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는 곡식을 마련하겠다는 이지함의 뜻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이렇듯 이지함은 일찍이 몸소 상업 활동에 뛰어들어 큰 재물을 모은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경제 철학을 구체적인 경제 정책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도 탁월한 혜안을 보여 주었다. 본말상보론을 통해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할 명분과 기본 원칙을 세운 이지함은 또한 국부를 축적하기 위해 나라와 임금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세 가지 경제 정책, 즉 자원 경영·인재 경영·공동체 경영을 주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삼대부고론(三大府庫論)’이다.

이지함의 경제사상 ② 삼대부고론(三大府庫論) :

세 가지 부고책(府庫策)이 경제를 발전시킨다.


삼대부고론은 이지함이 독창적으로 주창한 ‘조선의 국부론(國富論)’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함은 임금(지도자)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에는 상·중·하의 세 가지 곳간(창고)이 있다고 말했다. 삼대부고론 역시 앞서 소개한 이지함이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문’에서 자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먼저 부국안민의 상책(上策)은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人心)을 올바르게 하는 대책이다. 이지함은 ‘도덕지부고(道德之府庫)’란 그 크기가 끝이 없고 온갖 재물이 들어 있어서, 만약 임금이 법칙을 세운 다음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이 쓸 수 있을 만큼 아낌없이 베푼다면 백성들 역시 자신의 창고를 손수 열어서 임금이 세운 법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보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재물을 더불어 모으고 나누어서 한 고을의 백성만이 아니라 온 나라의 백성이 배불리 먹고 풍요롭게 사는 ‘대동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해석해본다면, ‘상생과 나눔의 경영’ 즉 더불어 잘사는 공동체 경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지함이 이 대책을 상책(上策)으로 삼은 것만 보아도 그의 경제 철학이 특정 사회 계층의 희생을 감수하는 일방적인 경제 성장이 아닌 더불어 발전하고 함께 잘 사는 균등한 경제 성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지함은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고 적재재소에 배치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 경영을 부국안민을 위한 경제 대책의 중책(中策)이라고 보았다. 아무리 좋은 경제 대책을 세워도 지도자가 어질지 못하고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이 현명하지 못하다면 무용지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온 세상의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대해(大海)를 이루듯 천하의 어질고 현명한 인재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인재지부고(人才之府庫)’를 활짝 열어 두어야 한다. 이지함의 평소 주장과 행적을 통해서 볼 때, 인재의 창고를 활짝 연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뛰어넘어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발탁하고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배치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상공업을 활용해 새로운 국부를 개발할 때 평생 서책만을 들여다 본 양반 사대부 출신이 인재일지 아니면 평생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해 온 상인과 수공업 장인이 인재일지는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국안민을 위한 경제 대책의 하책(下策)이란 육지와 바다를 이용해 온갖 재물을 생산해 저장하는 창고를 여는 것이다. 특히 이지함은 당시의 정치 현실에서 상책인 ‘도덕지부고’나 중책인 ‘인재지부고’는 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 하책만은 적극적으로 실시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생산하고 간직하는 창고이기 때문에 이것에 의존하지 않고 일찍이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못 박았다. 그리고 진실로 이 재물을 개발하고 생산해낼 수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이로움이 끝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비록 농업이 민생의 근본이고, 상공업과 어업이나 광업이 사사로이 재물을 탐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면 성인(聖人)이 행하는 권도(權道; 상황 변화에 따라 행하는 대책)이므로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했다. 재물을 탐하고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는 욕망을 나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부국안민에 도움이 된다면 비록 하책(下策)일지라도 나라 정책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당시 시각으로는 대단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재물을 생산하고 부(富)를 축적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는 새로운 경제사상의 단초를 읽을 수 있다. 실제 삼대부고론의 세 가지 대책 중 이지함이 가장 힘써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하책인 ‘육지와 바다를 이용한 재물의 개발과 생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풍조와 특히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는 명분을 무엇보다 중요시했기 때문에, 재물을 생산하고 간직하는 창고를 형식상 가장 낮은 하책으로 삼은 듯 하다.

여하튼 이지함이 부국안민을 위해 제시한 경제사상인 삼대부고(三大府庫)란, 바다와 육지의 재물을 적극 개발·생산하는 ‘자원 경영’,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인재 경영’,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잘 사는 ‘공동체 경영’이라고 하겠다. 이 삼대부고론은 오늘날에도 국가의 경제 성장과 균등 분배 정책의 원칙으로 삼아도 될 만한 경제 철학을 담고 있다.    

이지함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보통 18세기에 만개(滿開)한 실학의 선구자로는 <지봉유설>을 저술한 이수광(1563~1628년)을 꼽는다. 그러나 현재 많은 역사학자와 경제사학자들이 토정 이지함의 사상을 실학의 개조(開祖) 혹은 첫 선구자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이지함의 경제사상은 유수원과 박제가처럼 양반 상인이나 해외 통상을 적극 주창한 중상주의 경제학자들에게는 ‘사상의 원천’이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제가는 자신이 직접 쓴 <북학의> 서문에서 “어렸을 적부터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했다”고 했는데, 그 까닭은 우리나라의 풍속과 체제를 개혁해 중국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려고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박제가는 우리나라를 개혁하여 중국 수준으로 올리고자 노력한 사람은 오로지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 두 사람뿐이라고까지 칭송했다. 중봉 조헌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다 장렬하게 전사한 ‘700의총’의 의병장인데, 토정 이지함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고 또한 스승의 뜻을 가장 잘 계승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박제가가 칭송한 조헌의 체제 개혁론은 이지함의 유지(有志)를 계승한 것이나 다름없다.

조헌은 스승 이지함이 사망하기 4년 전인 1574년 질정관(質正官)의 신분으로 중국 연경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는 귀국 후 임금에게 ‘동환봉사(東還奉事)’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앞서 소개한 이이의 상소문과 이지함의 상소문에 담겨 있는 시무책(時務策) 곧 개혁 정책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박제가는 이처럼 중국의 선진 문물을 보고 돌아와 부국안민을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 조헌의 뜻을 높이 평가한 것인데, 그것은 또한 조헌의 스승인 이지함을 높여 칭송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박제가의 <북학의>에 담겨있는 부국강병론은 이지함이 주창한 ‘부국안민론’의 상공업 발전과 해외 통상론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또한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이 저술한 최대의 실학 백과전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반계 유형원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이지함의 해외 통상론을 크게 평가한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토정 이지함은 18~19세기 북학파 등 중상주의를 지향한 실학자와 경제학자들에게는 큰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모두 이지함의 전례(前例)를 좇아 상공업의 발전과 해외 통상을 통해 조선을 부국강병과 부국안민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토정 이지함은 조선사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임과 동시에 중상주의를 통해 부국을 지향한 조선사 최초의 경제학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