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원은 18세기 조선의 경제학(실학)에 끼친 사상적인 공적과 학문적인 영향력에 비해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그는 20세기 중·후반까지 실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나 학자들에게도 낯선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수원은 중상주의 경제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우서(迂書)>를 저술해 18~19세기 수많은 실학자들을 매료시킨 중상주의 경제학 이론을 개척하다시피 한 선구자였다. 이토록 위대한 학자였던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아니 잊혀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불운한 정치 역정과 관련되어 있다.

柳壽垣

맬서스 <인구론>의 맹점을

60년 앞서 비판한 재야 경제학자

유수원은 17세기의 막바지(1694년)에 태어나 18세기 중반(1755년)에 대역 죄인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숙종-경종-영조로 이어지는 이 시대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시대’였고 또한 정치적, 사회적인 격동기였다.

유수원의 집안은 소론 명문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당파적 이해관계에 얽혀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간원 정언으로 재직하던 29세 때 소론의 영수인 영의정 조태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 당했던 사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이 있은 이듬해 다시 지방 고을의 현감으로 복직되었으나 10여 년 간 중앙 조정에 발을 딛지 못하고 지방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나 10여 년 동안의 지방 생활은 유수원이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격변하는 조선의 사회·경제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해서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대대적으로 수술할 사회적, 경제적 개혁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나이 40세를 전후해 저술을 완성한 <우서>에는 바로 그러한 개혁을 향한 열망과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최초의 중상주의 경제학자

유수원의 <우서>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당시 뜻있는 관료와 지식인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특히 박문수 등 몇몇 조정 신료들이 <우서>를 영조대왕에게 소개하면서 힘써 천거하는 바람에 유수원은 다시 중앙 관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그는 스스로 호(號)를 귀머거리를 뜻하는 ‘농암(聾菴)’ 혹은 ‘농객(聾客)’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여러 가지 병과 심한 귀머거리 증상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결국 관직에 나가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다가 50세를 전후해 벼슬살이를 완전히 청산하고 초야에 파묻혀 지냈다.

그러나 당쟁의 소용돌이는 초야에 묻혀 산 병들고 늙은 한 지식인에게 편안한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노론 당파에 의해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윤지 등 소론 세력이 계획한 반역 사건인 나주 괘서 사건과 이후 소론의 반역을 토벌한 공로를 축하하기 위해 치른 과거시험에서 나타난 변서(變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결국 62세의 나이로 처형당하고 만다. 그의 집안 또한 몰살을 당했는데, 이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과 행적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더욱이 정조대왕이 집권한 십 몇 년간을 제외하고 조선이 멸망하기까지 노론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유수원은 정치적 복권은커녕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우서> 또한 19세기 이후 편찬 문헌에서는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몇몇 필사본만이 현재 남아 전해올 뿐이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공간에서는 읽히지 못하고,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서나 읽히고 전해진 지하 서적의 신세를 면치 못한 셈이다. 이 때문에 1970년을 전후해서야 비로소 <우서>가 유수원이 저술한 서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서>가 지하 서적의 신세를 면치 못하면서도 면면히 전승되어온 것만 보아도 유수원이 조선의 개혁과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서(迂書)>-중상주의 경제학의 고전

<우서>는 조선의 학자나 지식인들이 저술한 서책 중에서 가장 독특한 구성을 갖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문답(問答) 형식을 통해 조선의 현실과 제도를 중국의 그것과 철저하게 비교·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문답 내용은 설명적이기보다 지나칠 정도로 논쟁적이다. 보통 조선시대의 서책들을 보면 맨 앞머리에 저술 혹은 편찬의 뜻과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서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우서>의 맨 앞머리에는 서문 대신 ‘책을 저술하는 근본 취지’가 아주 논쟁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혹왈(或曰) : “그대가 이 책을 쓴 것은 과연 세상에 시행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답왈(答曰) : “병이 들어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세상에 시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혹왈(或曰) : “그렇다면 이 책을 무엇 때문에 저술한 것인가?”

답왈(答曰) : “세상의 모든 일은 이치가 있으면 반드시 그 이치를 드러내는 말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생각해볼 때, 세상사에는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있으므로 스스로 말할 뿐이니, 시행될 수 있거나 혹은 시행될 수 없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옛 사람들이 어찌 시행될 수 있고 없음을 계산해 그토록 수많은 서적을 저술했겠는가! 나를 두고 ‘공연히 스스로 고통을 겪고 있을 뿐 누가 알아주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항상 그와 같은 사람들의 간악한 마음과 누추하고 졸렬한 생각을 미워했다. 그래서 그들과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대가 다시 이와 같은 질문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우서> ‘이 책을 쓰는 근본 취지(記論撰本旨)’

이처럼 독특한 구성 때문에 <우서>는 그 어떤 서책보다도 저자의 주장과 논리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 유수원이 비록 세상에서 시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밝혀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의 ‘부국(富國)’과 백성의 ‘안민(安民)’을 위한 체제 개혁 이론과 정책이었다. 곧 이 책에서 유수원은 나라가 허약하고 백성이 가난한 근본적인 원인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부국안민을 이룰 수 있는 기본 방향과 구체적인 방법을 찾았다.

크게 보아 <우서>는 체제 개혁의 방향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 및 차별을 철폐하는 ‘사회 개혁’과 상업적 농업 및 상공업의 발전을 꾀하는 ‘경제 개혁’에서 찾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유수원은 사회 개혁과 경제 개혁을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다. 즉 조선 사회의 신분 질서와 시스템을 개혁하지 못한다면 경제 발전은 불가하다고 보았다. 그는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 및 차별이 개인의 능력 개발과 직업의 분화 및 전문성을 억제해 백성들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고, 백성의 직업이 안정되지 못하고 빈곤하기 때문에 나라 역시 허약하고 빈곤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반드시 신분제 철폐라는 사회 개혁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경제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서>에서 다루고 있는 경제 개혁의 방안은 뒷날 북학파를 중심으로 한 중상주의 경제학자들의 논리와 주장을 선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유수원은 이 책에서 기존의 농업경제 시스템과 ‘농본상말(農本商末)’의 경제 마인드를 바꾸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구상은 상업적 농업과 상공업 발전을 중심으로 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한편 농사 기술과 농기구의 개선으로 토지 생산성을 높여 기존 농업 체제의 체질 또한 개혁한다는 것이었다.

<우서>의 경제 개혁안은 박제가의 <북학의>와 유사한 점이 많다. 물론 <우서>가 <북학의>보다 40여 년 가까이 앞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북학의>가 <우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어도 반대로 <우서>가 <북학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누구를 계승했고,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원조 논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유수원의 <우서>에는 <북학의>에는 나타나지 않은 아주 급진적인 개혁사상이 숨어 있다는 사실만은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박제가를 비롯해 18세기에 개혁을 부르짖은 여러 실학자나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억제·폐지하거나 또한 양반 사대부 역시 상공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지만 <우서>에서처럼 신분 질서의 타파를 경제 발전의 전제 조건으로까지 다루지는 못했다. 이 점에서 <우서>는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시민’과 ‘직업의 자유 선택 및 전문적 분업화’를 전제로 탄생한 근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원리를 가장 잘 포착한 혁명적인 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수원의 경제사상 ① 직업의 자유 선택 및 전문적 분화

개인의 취향에 따라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개인의 능력 및 특성에 따른 전문적 분업화는 명백하게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이자 직업윤리고 도덕이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는 아버지가 양반이면 자식도 양반이고, 아버지가 백정이면 자식도 백정이고, 아버지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였던 것이 경제 원리이자 직업윤리였고 도덕이었다. 이 때문에 공자나 맹자와 같은 사람도 ‘제왕은 제왕답고, 제후는 제후답고, 대부는 대부답고, 백성은 백성다운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체제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유수원은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 차별이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빈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직분을 찾을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나라와 백성은 부국안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학문에 관심도 없고 실력도 없는 양반 사대부들이 유생(儒生)이라고 자처하면서 온갖 편법과 협잡으로 벼슬자리를 구한 다음 권력과 세도를 부려서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이러한 사회 현상은 양반 사대부는 양반 사대부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는 살려고 하지 않는 사회·경제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학문에 취미가 없거나 혹은 학문이 아닌 이재(理財)에 밝다고 하더라도 양반은 사회적 지위와 체면 그리고 상업을 멸시하는 사회 풍토 때문에 평생토록 ‘양반’으로 산다. 개인은 물론 국가 경제적으로 볼 때 다른 직업을 택하면 훨씬 큰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평생 양반으로 벼슬자리나 탐하고 권력이나 부리는 일에 몰두해 나라와 백성에게 모두 해로움을 끼치는 것이다.

유수원은 이러한 현상이 조선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어서 “상인은 장사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장인(匠人)은 공업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농민은 농사일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선비는 선비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나라 전체에 직분을 지키는 사람은 없고 또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권력 다툼이 날이 갈수록 심하고, 고을에서는 포악함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해결책은 오직 한 가지로 ‘사민평등(四民平等)’이다.

“사농공상은 모두 똑같은 사민(四民)이다. 만약 사농공상이 모두 한 가지로 행세하고 살게 한다면, 신분의 높고 낮음도 없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물고기는 강과 바다에서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리와 기술에서 서로를 잊듯이 결국 이런저런 다툼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 <우서> ‘문벌의 폐해를 논함(論門閥之弊)’

유수원이 볼 때 사농공상의 구분은 신분 질서나 계급 차별이 아닌 단지 직분과 능력에 따른 직업인으로의 차이일 뿐이다. 이렇듯 그는 봉건 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제 원리와 직업윤리 및 도덕을 전파한 경제학자였다는 점에서 단순히 토지 개혁이나 상공업 발전을 주장한 실학자나 경제학자들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 경제사상에 접근한 인물이었다.



유수원의 경제사상 ② 양반상공인론

18세기 조선의 경제학자들 중 ‘양반도 상공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이른바 ‘양반상인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창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유수원과 박제가였다.

유수원은 양반 사대부 가운데 빈둥빈둥 놀고먹는 자, 학문에 재주가 없는 자,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는 자 등은 모두 농업이나 상업 혹은 공업 중에서 자신의 생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반 사대부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상공업에 나서지 않는 사회·경제적 원인을 두 가지 차원에서 보았다. 하나는 신분적 특권이고, 다른 하나는 상공업 천시였다.

먼저 양반 사대부의 신분적 특권은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문벌 지상주의와 더불어 요행(僥倖)으로라도 벼슬자리만 얻으면 된다는 심리를 만든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오로지 “양반 사대부가 되는 것만을 영광으로 여겨 밤낮 없이 미치광이처럼 날뛰고,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못하는 짓이 없다. 나라의 제도가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하도록 해 죽기를 무릅쓰고 너나없이 다투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더욱이 상공업 천시는 단순히 상인이나 장인(匠人)들에 대한 차별을 뛰어넘어 양반 사대부들이 상공업에 아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사회 구조와 심리를 만들어 놓았다. 유수원은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일찍이 양반 사대부가의 자손들이 농업 혹은 상공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금지한 적이 없다. 그들이 스스로 하지 않았을 따름이 아닌가?” 그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양반이 천업(賤業)인 농상공(農商工)에 한번 종사하면 후손의 벼슬길이 영원히 막히는데, 이것이 금지하는 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만약 선비가 농상공에 종사한다면 교류와 혼인에 어찌 장애가 없겠는가. 양반 사대부들이 저놈은 이미 상민(常民)이 되었다고 하면서 비루하고 천박하게 여겨 만나지도 못하게 할 텐데, 이보다 더한 금고(禁錮)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라에서 명목상으로 양반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손발을 묶고 굶주림 속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며 자연의 도리겠는가. 더욱이 양반이 농상공에 종사할 수 없어 생기는 피해는 국가 재정에까지 미친다. 양반은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아서 애초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나라에서 세금을 징수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예부터 모든 나라에는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가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양반을 우대한다는 헛된 명분에 사로잡혀 국가의 재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처럼 양반들에게 이미 세금을 징수하지 못하는데 중서인(中庶人)이라고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려고 하겠는가. 이에 나라 경제는 날이 갈수록 잘못될 수밖에 없다.”

- <우서> ‘사민총론(四民總論)’

이처럼 유수원은 농상공을 천시하고 기피하는 양반 사대부를 우대하는 조선 사회의 헛된 명분이 나라 경제와 재정의 뿌리를 흔드는 심각한 폐단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이와 같은 폐단을 구제할 개혁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조선의 백성은 모두 녹아 소멸되고 말 것이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개혁책이란 다름 아닌 양반 사대부라고 하더라도 벼슬자리를 얻지 못한 자라면 반드시 농상공 중에서 일정한 직업과 생계 수단을 찾아야 한다는 ‘양반상공인론’이었다.

유수원의 경제사상 ③ 중상주의 국가론

유수원은 경제사상의 전략적 목표를 ‘부국안민’으로 삼았다. 그는 이 전략적 목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려면 당시 조선의 경제 시스템을 ‘중상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국가 경제 시스템의 핵심을 농업에서 찾은 농본(農本)국가였다. 이 때문에 관청을 제외한 민간의 상공업 활동은 철저하게 억압당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민간의 상품 유통과 시장경제가 활발해지자, 이지함과 김육처럼 상공업의 발전을 억제하기보다는 국가 경제에 보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와서는 다양한 계층과 학자 그룹에서 나라와 백성이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국강병과 부국안민을 이루려면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상품 유통과 소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경제 시스템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농업을 근본으로 삼고 상공업을 억압해야 한다는 초기 단계에서 농업과 상공업이 상호 보완을 이루어야 한다는 중간 단계를 거쳐 마침내 상공업의 발전을 국가 경제 시스템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큰 흐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유수원은 국가 경제 시스템의 핵심을 상공업의 발전에서 찾아야 한다고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른바 ‘중상주의 국가론’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지난 시절 잠곡 김육(金堉)이 상소한 사례까지 들면서, 교역과 상품 유통의 사회적 인프라를 적극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육로와 수로를 개척하고 선박과 수레의 이용을 적극 장려해 교역과 상품 유통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상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나라의 풍속과 제도가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게만 된다면, 서로 앞을 다투어 수레와 선박이 모여드는 역참을 세워 운송 이익을 얻고, 또한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또 사들이고 유통시켜 큰 이익을 얻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경제가 크게 활성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수원은 이렇게 되면 대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료를 거두는 이익에 몰두하던 지주(地主)나 돈과 곡식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챙기는 고리대금업자들도 상공업에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상점을 개설하고 물품을 유통시키는 일에 큰 자본을 투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렇듯 유수원의 이론에는 경제 제도와 시스템의 ‘중상주의’로의 전환을 꾀하는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유수원의 경제사상 ④ 인구와 빈곤

유수원은 18세기에 활동한 그 어떤 경제학자들보다 훨씬 더 독창적인 경제사상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우서>의 맨 앞부분인 ‘사민총론(四民總論)’에 나오는 ‘인구와 빈곤의 문제’를 살펴보면 유수원이 얼마나 독창적인 경제사상의 소유자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영국의 고전학파 경제학자인 맬서스가 1798년에 <인구론>을 출간한 이후 근대 경제학은 오래도록 ‘인구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다. 맬서스는 이 책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날 뿐이어서 과잉 인구로 인한 식량 부족은 피할 수 없고, 이에 따라 빈곤과 죄악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았다. 잘 알다시피 맬서스 인구론의 경제 원리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우리나라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런데 유수원은 <우서>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서>가 <인구론>보다 60여 년 앞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유수원은 현대의 경제학자들이 20세기 말경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깨달은 <인구론>의 맹점과 잘못을 이미 200여 년 전에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유수원이 살던 당시 대다수 지식인들은 “백성이 점차 가난하고 궁핍해진 이유는 인구가 크게 불어났기 때문이며,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 날로 살림살이가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맬서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한 유수원의 반론은 이렇다.

“세상에는 그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말은 참으로 근거가 없는 논리다. 우주가 존재하면서부터 사람이 존재했고, 사람이 있으면서부터 의식(衣食)이 존재했다. 이것이 천지자연의 이치다. 어찌 땅이 좁고 사람이 많다고 살림살이가 궁핍하고 가난하겠는가. 옛날을 살펴보더라도 백성이 정전제(井田制) 하에서 살아서 모두 농토를 지니고 살았다. 그리고 전쟁도 없고 전염병도 나돌지 않아 태평한 세월을 수백 년이나 누렸다. 이에 백성이 모두 천수(天壽)를 다하고 자손이 크게 번성했다. 그러나 천하의 농토는 늘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백성들은 9년분의 식량을 저축할 수 있었다. 아직껏 그들이 농토가 좁고 사람이 많아 곤란을 겪고 궁핍한 생활을 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 <우서> ‘사민총론(四民總論)’

유수원은 땅이 좁고 인구가 많은 것이 빈곤의 원인이 아니라 생산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경제 제도와 시스템이 빈곤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기름진 땅과 의식(衣食)의 자원이 결코 부족하지 않는데도 나라와 백성이 제대로 힘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겼다. 만약 모든 백성이 사농공상의 직업에 따라 분업화하고 전문화한다면 오히려 사람이 많을수록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부유해진다는 것이 유수원의 생각이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을수록 농지는 늘고 곡식 산출량은 많아질 것이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물자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곤의 원인을 자연과 인구가 아닌 경제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노동 의욕에서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수원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 간 독창적이고 탁월한 경제사상가였는가를 알 수 있다.



유수원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유수원의 경제사상은 그가 죽고 난 후 활동한 북학파나 개화파 지식인들의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상업적 농업의 장려, 농사 기술의 개선과 농기구의 개량,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육로와 수로의 운송망 건설, 상공업 진흥론, 양반상인론 등 유수원의 주장은 대부분 박지원과 박제가 그리고 박규수에게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북학파와 개화파 지식인들이 유수원의 사상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얼마든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유수원이라는 이름 석자는 북학파나 개화파 지식인들이 남긴 서적이나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유수원과 그들 사이의 사상적 유사성은 억측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한정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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