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경영대학원 리처드 S. 테들로우 교수가 쓴 앤디 그로브의 이야기. 앤디 그로브는 1968년 인텔 창업의 주역으로 등장해 1987년에서 1998년 CEO를 역임하면서 시장 가치를 43억달러에서 1976억달러로 높였다. 이것은 연평균 42%의 성장률, 창업 당시와 비교하면 거의 4500%의 성장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앤디 그로브는 어떻게 무일푼의 헝가리 이민자에서 20세기 미국 기업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을까? 산업계의 표준이 된 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가지고 회사를 지휘했고, 1997년에는 <타임>의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탁월한 경영자이자, 집필가이자, 전립선암과 파킨슨병과 맞서 싸운 전사, 앤드 그로브. 인텔의 내부 문건과 자료를 토대로 한 그의 성공과 삶을 조명한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21세기 비즈니스 세계에 대한 도전과 야망, 그리고 비전을 배워보자.

Andy Grove

The Life and Times of an American!

저자 리처드 S. 테들로우(Richard S. Tedlow)

발행일 2006년 11월

리처드 S. 테들로우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경영관리학과 교수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포춘> 등에 수많은 글을 써 왔으며, (한국어 번역판 <사업의 법칙 1·2·3>)와 의 저자이기도 하다. 테들로우 박사는 예일대와 콜롬비아 대를 졸업했으며, 비즈니스 역사(歷史)와 경영자 교육 프로그램 분야의 권위자다.

이 책의 웹사이트는 www.richardtedlow.com 이다.

앤디 그로브는 1936년 9월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그의 이름은 안드라스 이슈트반 그로프(Andras Istvan Grof). 그의 집안은 중산층의 유대인이었다. 앤디의 아버지 조지(George)는 중소 규모의 낙농업자였다. 어머니 마리아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다.

1939년 9월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로프 가족도 곧 일어날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앤디 그로브가 5살이던 1942년,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군대에 징집됐다. 유대인이었던 까닭에 아버지 조지 그로프는 러시아 군대 전방에서 길을 청소하고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등 온갖 힘든 일을 하는 대대에 배치됐다. 1943년 봄, 마리아 그로프는 조지 그로프가 ‘사라졌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모든 노력에도 남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독일이 공식적으로 헝가리와 합병한 1944년 3월19일, 수십만 명의 유대계 헝가리인들이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앤디와 마리아는 운 좋게도 친구들의 도움과 여러 가지 기지를 발휘해 아우슈비츠와 포로수용소를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 말살정책이 시작되려 하자 고향인 부다페스트를 떠났고 나중에 안전해지면 되돌아오려고 했다. 그들은 훗날 역사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유럽에서 가장 참혹한 점령지 중 한 곳”이라고 설명한 ‘부다페스트 전투’를 견뎌냈다.

전쟁 때문에 앤디의 초기 학교 교육은 산발적이었고 꾸준하지 못했지만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했기 때문에 교육이 문제되지는 않았다. 다만 앤디가 성홍열을 앓았을 때, 그 당시 일반적인 연쇄상구균에 의한 감염 치료 방식, 즉 의사가 귀 뒷부분의 뼈 일부를 ‘파내는’ 것이 문제였다. 6주간의 입원 치료 후 집에서 아홉 달 동안 요양하면서 건강을 회복했지만 앤디 그로브의 청력은 성홍열 병치레로 인해 영원히 큰 손상을 받게 됐다.

1945년 9월, 조지 그로프는 고통스러운 러시아 포로수용소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엄청난 사디즘과 잔악성을 목격했고 노출과 기아, 그리고 미흡한 치료로 고통을 받았다. 모든 고생을 뒤로한 채 그로프 가족은 다시 예전처럼 지내길 원했지만 전후 헝가리에서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45년 후반, 인구 1000만 명인 헝가리에 100만 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조지 그로프가 가축을 키우는 정부 소유 회사의 관리인으로 임명됐을 때는 그로프 가족의 형편은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삼촌이 신문 편집인이라는 이유로 한밤중에 체포되자 조지 그로프는 곧바로 해고당했고 전 급여의 4분의 1 이상을 받는 직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신흥 러시아 리더의 파워가 부상하자 헝가리 정부는 대부분의 정치범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어림잡아 이는 100만 명의 수감자 중 4분의 3에 해당했으며, 조지 그로프의 삼촌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불안감과 불확실성이라는 배경과 반대로 앤디 그로브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다페스트에 있는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앤디 그로브가 베오그라드대학 2학년이 되자 온 나라에 소란이 일었다. 평화롭게 시작된 반소련 시위는 러시아 군대의 시민 학살로 끝을 맺었다. 대학은 문을 닫고, 앤디는 부모님과 함께 오스트리아로의 도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러시아군은 시위 혐의로 젊은 사람들을 현장에서 체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앤디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헝가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56년 12월, 앤디 그로브는 부모에게 작별을 고하고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당시 국경을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처음 앤디는 나라를 떠나려는 다른 세 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국경과 15마일 떨어진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탄 다음 숲으로 사라졌고, 러시아 경비대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도록 도움을 주는 지하조직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 그들을 잡으려는 엄청난 위험에 맞서 숨바꼭질을 하는 긴장된 며칠이 흐른 후 그들은 오스트리아 어딘가에 있는 농장을 발견했다. 국경을 지나자마자 오스트리아 경찰에게 체포된 그들은 차가운 학교에서 머무르게 됐지만 경찰이 떠나자마자 앤디 그로브는 그곳을 떠나 비엔나로 향했다.

부모에게 안전하다는 전보를 보낸 후 앤디 그로브는 국제난민구호(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라 불리는 기관을 찾아갔다. 이 기관은 처음에는 앤디의 미국행을 꺼렸지만 곧 앤디의 설득에 그를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개조한 군대 수송선을 탄 앤디는 대서양을 건너 1957년 1월7일, 1715명의 다른 헝가헝가리 난민들과 함께 마침내 뉴욕 브루클린에 도착했다.

뉴욕에 도착한 헝가리 난민들은 한때 전쟁 포로수용소였던 캠프 킬머(Camp Kilmer)로 안내됐다. 하지만 운 좋게도 앤디는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삼촌 라조스와 숙모 렌케와 연락이 닿았고, 그들은 앤디를 환영하며 캠프 킬머에서 그를 데려와 브롱스에서 함께 지내도록 했다. 앤디 그로브는 다시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브루클린대학(Brooklyn College)이나 브루클린 과학기술대학(Brooklyn Polytechnic Institute)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 자금으로 운영되어 학비가 무료인 뉴욕시티칼리지(City College of New York)에 등록했다.

인생 대부분의 일에서 그러했듯 앤디는 즐겁게 공부에 몰두했다. 일반적인 풀타임 과정은 16학점이었지만, 영어를 잘하지 못했음에도 그는 21학점을 수강할 수 있도록 학과 상담원을 설득했다. 그는 화학공학을 전공했으며 물리, 화학, 그리고 수학 과목을 수강했다. 그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에 적응하는 동안 몇 개의 F를 받았지만 일단 적응하게 되자 뉴욕시티칼리지에서 공부하는 동안 거의 모든 과목에서 A와 B를 받았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앤디는 누구도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끊임없이 짜증이 났다. 쉽사리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때 앤디의 공학적 본능이 빛을 발했다. 그는 안드라스 이슈트반 그로프라는 이름을 발음이 비슷한 앤드류 스티븐 그로브(Andrew Steven Grove)로 바꿨다. 몇 년간 앤디 그로브는 학기 중에는 수업을 듣고 여름방학에는 돈을 벌기 위해 뉴햄프셔 리조트에서 웨이터 조수로 일하면서 규칙적이며 생산적인 패턴의 삶을 살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이 시기 오스트리아 이민자인 에바 캐스턴(Eva Kastan)과 1958년 6월8일 결혼했다.

뉴욕은 그에게 모든 것을 제공했지만 앤디 그로브는 그곳을 정말 좋아하진 않았다. 그는 뉴욕의 날씨를 싫어했고 도시가 우울하고 불길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대학을 마치자 앤디는 새 신부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부모님을 돕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모아야 했지만 앤디 그로브는 버클리에 있는 공립대학인 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앤디와 에바 그로브는 1960년 초여름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그는 버클리의 대학원 과정에서 유체역학을 공부했다. 같은 해 민주당에서는 공화당 후보인 부통령 리처드 닉슨을 상대할 후보로 매사추세츠의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을 후보로 임명했다. 5월25일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새 대통령은 임기 동안의 주요 과제로 우주 탐사를 천명했다. 공학도에게는 좋은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앤디가 버클리에 있기 4년 전 ‘자유언론 운동(Free Speech Movement)’이라 불리는 것이 시작되어 그는 학생운동 등을 이끌었다.

버클리에서 앤디 그로브는 논문에 몰두해서 화학공학 분야에서 최고의 학술잡지인 <유체역학저널(Journal of Fluid Mechanics)>에 실릴만한 특별한 것을 발견해냈다. 이로 인해 그는 원한기만 하면 학문과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앤디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사회로 나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리고 평생 대학에 남기보다는 ‘실질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교수 한 명은 앤디에게 이제 걸음마 단계인 ‘고체 물리학 분야’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다.

어쨌든 앤디 그로브의 시작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구직 시장에서는 그를 선호했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그의 화학공학 분야의 배경이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라고 판단 내렸다. 또한 그의 성격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은 금방 그를 좋아하거나 싫어했다.

결국 앤디 그로브의 선택은 페어차일드(Fairchild)와 벨연구소(Bell Labs), 이 두 곳 중 한 곳으로 좁아졌다. 1960년대 초반, 벨연구소는 확실히 좋은 직장이긴 했지만 사무실이 이스트코스트 뒤편에 있었고, 그는 거기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로브는 페어차일드로 진로를 결정했다. 그곳에서 고든 무어(Gordon Moore)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앤디 그로브는 1963년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입사 후, 그로브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포트란(Fortran)으로 컴퓨터를 프로그래밍 하는 방법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 일은 당시 회사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로브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기술을 갖추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초기의 성공에 힘입어, 그로브는 페어차일드의 고정관념에 도전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 전자상태(surface states)에 집중한 반면 그로브는 그들이 목격하고 있는 효과들은 표면 전자상태보다는 표면 전하(surface charges)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그로브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증명됐다. 또한 그로브는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데도 회사 연구소는 형편없이 운영되고 있다면서 이 문제에 대해 우회가 아닌 정면으로 맞섰다.

그로브는 소수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열정을 가지고 페어차일드에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그는 자신의 논문을 토대로 학문 잡지에 4편의 기사를 실었고, 고체 전자공학 분야에서 새로운 개발에 관해 단독 또는 공동 집필로 26편 이상의 기사를 실었으며, 2개의 특허를 신청했다. 또한 그는 가족을 돌보고, 버클리 대학원에서 반도체 물리학을 강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일들의 멋진 마무리로써 마침내 헝가리에 있는 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셔오기로 했다. 헝가리 정부는 노인들이 서방으로 이민할 경우 이들에 대한 연금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이민자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든지 호의적이었다. 1962년 당시 그로브의 아버지는 57세였고 어머니는 55세였기 때문에 헝가리 정부는 이민을 허락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로브의 부모는 실리콘밸리에 올 수 있었다. 앤디 그로브는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페어차일드에서 오래 일할수록 앤디 그로브는 회사의 역기능적 문제 때문에 점점 좌절을 느꼈다. 페어차일드는 집적회로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을 높이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회사에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존재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회사를 차리기 위해 끊임없이 페어차일드를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페어차일드의 제조부장 찰리 스포크(Charlie Spork)는 내셔널 반도체(National Semiconductor)사를 설립하기 위해 회사를 떠나며 그로브에게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그로브는 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고든 무어를 좋아했기 때문에 결국 회사에 남기로 했다. 그런데 1968년 5월 내지는 6월, 고든 무어가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그로브에게 털어놓았다. 고든 무어는 그로브에게 새로운 반도체 회사를 설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브는 1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고든 무어는 앤디 그로브가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새로운 회사의 주식을 준 것은 아니었다. 창립 주주들은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시(Robert Noyce), 그리고 벤처 투자가인 아서 록(Arthur Rock) 이렇게 세 명뿐이었다. 노이시와 무어는 주당 1달러에 24만5000주를 구입한 반면 록은 같은 가격으로 1만 주를 샀다. 그리고 다른 25만 주를 주당 10달러에 팔아 회사 창업 자금으로 300만달러를 조성했다. 인텔은 이렇게 1968년 7월16일 설립됐다.

고든 무어는 새로운 회사가 만들 수 있는 상품은 반도체 메모리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생각했고, 초창기의 작은 인텔 팀은 그 일에 집중했다. 1960년대 후반 반도체 메모리 생산 방식은 전통적인 ‘바이폴라(bipolar)’ 방식과 ‘금속 산화막 반도체(metal oxide semiconductor: MOS)’라 불리는 새로운 방식 두 가지가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회사는 두 방식 모두를 사용했다. 1968년 개인용 컴퓨터가 없었던 당시 인텔은 자기코어 기술을 사용한 메인프레임을 보급하여 입지를 굳혔으며, 인텔은 성공하기만 한다면 기존 시장에 있는 어떤 제품보다도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굉장한 것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더욱이 회사는 무빙 타깃(moving target; 계속 움직여서 맞추기 힘든 표적)이 됨으로써 범용화의 덫을 피하기로 결심했다. 즉, 신제품을 개발해서 프리미엄을 붙여 판매하고, 선두 주자로서 좋은 위치를 차지한 후 경쟁 업체가 범용화 상품을 만들어 가격을 내리기 전에 더 좋은 상품을 계속 계발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도전적인 목표였다.

1969년 9월, 인텔은 1101이라는 첫 번째 메모리칩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 제품은 완전한 실패작이었고, 메인프레임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다. 그리고 1970년 10월, 인텔은 1103 DRAM (dynamic random access memory: 임의접근기억장치)를 출시했는데, 당시 시장에 있는 다른 제품보다 확실히 뛰어난 것이었다. 1103은 특정 상황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등 결함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제값을 했고 꽤 잘 팔렸다. 제품 출시 2년도 되지 않아, 1103은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반도체가 되었다. 이로써 인텔은 가장 유명한 반도체 메모리 회사가 됐고 이 성공에 힘입어 1971년 공식적으로 첫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인텔은 매우 취약한 회사였다. 회사의 자체 생산능력이 상당히 초보 수준이었던 것이다. 인텔은 또한 그들이 라이선스를 허락한 회사가 제조 설비를 갖추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가장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한 번에 몇 달씩 캐나다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일단 라이선스가 만료되면 재빨리 2인치 웨이퍼에서 3인치 웨이퍼로 생산라인을 변경했다. 이로 인해 인텔은 그들이 라이선스를 허락한 회사보다 앞서서 더 저렴한 칩을 제작할 수 있었다.

초창기 인텔은 앤디 그로브에게 강렬한 교육적 경험이 됐다. 그래서 그의 실제 교육적 기초는 비즈니스의 기술적인 부분이었을지라도, 이러한 경험에 의해 그는 비즈니스 관리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브는 연구소에서 탄생한 신제품을 대규모의 생산라인과 통합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골몰했다. 또한 자아가 강한 사람들이 자신의 관심사를 제쳐 둔 채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해야 했는데 그 자체가 그에게는 사소한 도전이 아니었다.

1971년과 1972년 사이 개발된 제품에 대한 인텔의 제조 능력이 점차적으로 향상되기 시작했다. 항상 생산라인을 확장하고 있던 인텔에게 이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인 EP-ROM(erasable and programmable-read only memory; 소거 프로그램 가능 ROM)을 개발했는데, 수많은 칩의 논리 회로를 한 개로 결합한 칩이었다. 인텔이 이룩한 이 모든 것의 선두에는 앤디 그로브가 있었다.

인텔에 대한 그로브의 공헌은 1974년 이사진으로 임명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20년 전 부다페스트에서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18세 청년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앤디 그로브는 이제 세계를 이끄는 테크놀로지 기업 중 한 곳의 부사장이자 이사회 임원이었다. 이제 그는 존재 자체가 절대적인 인텔이라는 회사에서도 사실상 절대적인 사람이 되었다.

1973년, 인텔은 6500만달러의 매출에 920만달러의 이익을 냈다. 이로 인해 1974년 회사의 가장 큰 도전 과제는 인텔의 성장과 그에 따라 점차 증대되는 복잡성의 관리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1974년의 실제 도전 과제는 갑작스러운 반도체 산업의 침체였다. 그 해 말까지 인텔은 전체 직원의 약 30%인 3500명을 해고해야 했다. 1974년 회사는 매출을 1억3500만달러로 공시했지만, 1975년까지 인텔의 수익은 이전보다 감소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회사가 운영되고 있음이 확실했다.

업계의 불황에 대처하기 위해 인텔이 취한 방법은 다른 부문뿐만 아니라 R&D 부문의 투자를 늘리는 것이었다. 또한 생산 부문에서는 인원을 감축해야 했지만 인텔이 당시 설립한 마이크로컴퓨터 부문과 같은 신규 사업에는 직원을 충원했다. 메모리 제품은 인텔의 기본적인 수익 사업이었지만 사실 회사는 다른 부문으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인텔이 시도한 모든 사업이 다 잘된 것은 아니었다. 회사 초창기, 인텔은 디지털시계 제조업체인 마이크로마(Microma)를 인수했다. 디지털시계가 전자공학에 사용되어 인텔의 주력사업이 되면, 마이크로마를 손쉽게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이크로마는 소비 제품 회사였기 때문에 인텔에게는 없었던 소비재 마케팅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마이크로마에서 온 모든 훌륭한 직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났고 회사는 문을 닫았다.

1978년은 인텔이 비즈니스를 펼친 지 10년이 된 해다. 그 해 매출은 4억60만달러였고, 수익은 4430만달러였다. 직원은 1만900명이었다. 이때까지 인텔은 큰 규모의 반도체 개발 및 판매 회사였다. 당시까지 가정용 컴퓨터 시장은 인텔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고, 생산 라인도 없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서서히 그 존재가 부각되고 있었으며 배후에서는 가정용 컴퓨터 시장 진입의 필요성이 서서히 나타났다. 이 시기 앤디 그로브는 인텔의 지속적인 성장에 필요한 ‘활력’과 열정을 불어넣을 수 있는 관리자들을 모으는 방법을 생각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대다수의 기술자들이 적극적이고 모험적이기보다는 내성적이고 선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는 대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1978년, 인텔은 <포춘>이 선정하는 500대 기업에서 486위에 올랐다. 다음 해는 386위로 올랐으며 시장 자본 가치 역시 1978년 말 6억3800만달러에서 13억달러로 치솟았다. 고든 무어가 인텔의 CEO인 시기, 앤디 그로브는 인텔의 회장이자 최고운영책임자가 됐다. 이제 인텔은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회사가 아니라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exas Instruments)나 모토로라, 내셔널 반도체, 히타치와 같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회사들과 정면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모토롤라의 ‘16비트 68000’과 경쟁하기 위해 인텔은 새로운 80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선보였다.

우수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경쟁하기 위해 인텔 판매 부문 담당자들은 회사의 고객 서비스와 지원을 강조했다. 인텔의 필드 엔지니어(field engineer: 장비의 설치, 유지, 보수 등의 업무를 담당) 중 한 명이 “모든 것을 해 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인텔의 8086을 가지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는 기업인 IBM의 문을 두드렸다. 그가 IBM에 전화를 걸었을 때 마침 IBM은 개인용 컴퓨터 구상 작업이 한창이었다. 일반적으로 부품을 자체 제작하는 IBM이 컴퓨터에 8086칩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인텔은 한 해 수십만 유닛이 판매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IBM의 결정으로 연간 수백만 유닛을 판매하게 됐다.

IBM 개인용 컴퓨터에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공급하기로 한 거래는 또 다른 면에서 인텔에게 이득이 됐다. IBM은 4억달러를 투자하여 인텔 주식의 20%를 취득하고, 인텔은 경영을 유지하고 IBM에 마이크로프로세서, 메모리 분야, MOS 기술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2~3년 후 IBM은 인텔의 주식을 6억2500만달러에 매각해 인텔이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모토로라, 그리고 일본 기업들과 같은 거대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1981년 IBM이 PC를 선보이자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스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84년까지 IBM PC 판매액은 약 50억달러였으며 45초당 1대의 컴퓨터가 생산됐다. 인텔의 매출은 약 16억달러로, <포춘> 선정 500대 기업에서 226위를 차지했다. 1984년 인텔의 세후 수입은 1억9820만달러였는데 갑자기 수요가 주춤해졌다. 그래서 1985년에는 매출은 14억달러였지만 순수익은 급감하여 150만달러를 기록했다. 갑자기 회사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심각한 시장의 외면에 대응하기 위해, 인텔은 32비트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1986년 인텔의 매출은 13억달러로 곤두박질쳤고 회사는 1억73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기업공개 후 처음 맞는 적자였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났던 1986년 초, 앤디 그로브는 인텔을 떠나 안식휴가 중이었다. 예정했던 12개월의 휴식이 끝날 참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일본은 반도체 업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뛰어난 제품을 시장에 선보였고, 공장에서는 적은 운영자금으로 엄청난 양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또한 인텔이나 다른 메모리 생산업체의 가격보다 10%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공격적인 마케터였다. 앤디 그로브는 공공연하게 그들의 위협이 인텔의 사업에 ‘위협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일본의 도전은 인텔 내부에서 많은 분쟁을 일으켰다. 일부 사람들은 거대한 공장을 지어 일본에 정면으로 맞서길 원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성장세에 있고 어쨌든 수익이 나기 때문에 회사가 여기에 더욱 중점을 둬야 한다고 여겼다. 이런 일이 일어나자 앤디 그로브는 말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우리는 죽음의 계곡에서 방황하고 있다.”

1985년 중반, 그로브가 무어에게 물었다. “우리가 나가고, 새로운 CEO가 취임하면 그가 무슨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어는 즉각 대답했다. “아마도 메모리 분야를 떠나겠지요.” 이 대화는 인텔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메모리 분야에서 벗어나는 것!

지금 생각하면 쉬운 결정처럼 보이지만 인텔로서는 속을 쥐어짜는 고통이었다. 메모리 공장의 문을 닫고, 메모리 소비자들에게 인텔이 다른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변화를 위해 직원들을 적응시키기까지 약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인텔의 뛰어난 재능을 메모리칩이 아닌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에 투여하는 것은 그로브에게 특히 힘든 과제였다.

1987년 4월23일, 앤디 그로브가 인텔의 CEO직을 맡게 되었을 때 컴퓨터 업계에서는 여전히 IBM이 초소형 컴퓨터의 메인프레임과 디지털 컴퓨터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해 IBM의 매출은 542억달러였고 시장 자본 가치는 720억달러였다. 그에 비해 인텔의 매출은 19억달러였고 시장 자본 가치는 43억달러였다. 비록 인텔의 전체 시장 자본 가치가 1987년 한 해 IBM이 벌어들인 수익 53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비유적 표현으로 인텔은 IBM의 눈을 찌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시대에 인텔이 앞장서겠다는 앤디 그로브의 전략은 말은 쉽지만 실행은 어려운 것이었다.

새로운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 출시를 앞두고 인텔은 지금까지의 관행과 달리 칩에 대한 어떤 2차 제조업체도 두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매우 인상적인 결정이었다. 사실 이 말은 인텔이 결국에는 (칩의) 가격을 깎아먹을 수 있는 다른 제조업체들에게 라이선스를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인텔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IBM이 다른 공급업체를 구하겠다고 주장하면 모든 것이 인텔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IBM은 386칩의 구매도 서두르지 않았다. 메인프레임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PC를 미약한 수입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팩(Compaq)이 IBM 소프트웨어와 호환할 수 있는 포터블 PC를 생산하기로 결정하자 상황이 변했다. 컴팩은 인텔에서 386칩을 구매했고 1986년 9월 데스크톱 386을 소개하며 IBM의 기선을 제압했다. 당시엔 누구도 깨닫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IBM 호환 시장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1987년 컴팩은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도움으로 12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며 역사상 어떤 회사보다도 빠른 성장을 이뤘다.

지금까지 IBM이 PC 시장의 변화를 주도했는데 이제 상황이 갑자기 변했다. 인텔도 이러한 변화를 감지했다. 그로브는 재빨리 인텔을 6개의 운영 그룹으로 개편하여 각 그룹이 다음 사항을 그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① 초소형 컴퓨터 컴포넌트 그룹(Microcomputer Compo-nents Group)

② 시스템 그룹(System Group)

③ 어플리케이션 집적회로 컴포넌트 그룹(Application Spe-cific Integrated Circuit Components Group)

④ 컴포넌트 기술 및 제조 그룹(Components Technology and Manufacturing Group)

⑤ 세일즈&마케팅 그룹 (Sales and Marketing Group)

⑥ 관리 그룹 (Administration Group)

회사 운영이 점차적으로 더 복잡 정교해지면서 동시에 인텔 제품도 과거보다 훨씬 더 정교해졌다. 예를 들면,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에는 17만5000개의 트랜지스터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 20년의 개발 끝에 이뤄낸 이러한 세밀하고 정교한 개발 작업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앤디 그로브는 기술자들이 함께 팀을 이루어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력을 관리해야 했다.

386칩에 대한 인텔의 전략은 점차적으로 가격을 낮춰 더 많은 칩을 판매하고 다른 업체가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특수 시장을 위한 다양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는데 전념해서 더욱 저렴한 386칩을 만들었다. 또한 인텔은 회로기판과 완제품 PC를 판매했다. PC 시장이 수직화(한 회사가 전부 갖는)에서 수평화(PC 시장의 다양한 부분에서 다양한 회사들이 경쟁하는)로 변하면서 인텔의 사업은 번창했다. 초창기 IBM 퍼스널 컴퓨터가 20달러 정도의 인텔 칩을 사용한 사실이 좋은 지침이 됐다. 컴팩 데스크톱은 내부에 800달러짜리 인텔 제품을 탑재했다.

이러한 전략 덕택에 인텔의 매출은 1988년 28억달러에서 1989년 31억달러로 증가했다. 1989년 4월 새로운 804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출시하면서 인텔은 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486칩 개발비용이 2억달러가 넘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 비용은 경쟁 업체들이 뛰어들기에는 엄청난 자금이었다.

1990년 컴퓨터 업계의 모든 사람들이 인텔을 알고 있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인텔은 여전히 엔지니어가 다른 엔지니어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과 기업 간의 마케터였다. 이런 방식은 새로운 프로세서를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바뀌게 됐다. 이를 통해 인텔은 제조업체가 흥미를 갖고 최신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한 컴퓨터를 제조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소비자들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매우 성공적인 ‘Intel Inside’ 마케팅 프로그램의 기초가 됐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인텔은 5억달러 가까이를 광고에 쏟아 부었고, 이를 통해 인텔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가치 있는 소비자 브랜드로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앤디 그로브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인텔의 286, 386 그리고 486칩은 업계에서는 복합명령어컴퓨팅(CISC)으로 알려진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새로운 타입의 칩이 세상에 등장했다. 이 칩은 명령어축소형컴퓨팅(RISC)이라 불리는 색다른 기술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RISC 지지자들은 이 칩이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CISC보다 성능이 뛰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브는 인텔이 독점하고 있는 CISC의 개발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예전에 메모리 사업을 그만둔 것처럼 기술적으로 뛰어난 RISC 아키텍처로 바꿀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결국 인텔에서는 250명의 인력과 수년의 기간을 투자하여 기존의 486칩에 추가로 옵션을 넣을 수 있는 인텔 RISC칩을 개발해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로브는 RISC를 선택하지 않았다. 인텔이 지금까지 286, 386, 486칩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한 300억달러 이상의 금액은 현재의 CISC 아키텍처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지 RISC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텔은 조용히 RISC팀을 해산시켰고 그들을 다른 부서에 배치했다. 동시에 그로브는 회사가 CISC칩의 후속 모델을 개발하고 있으며 향후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후일, 앤디 그로브는 RISC 건에 대해 “회사를 거의 망쳐놓을 뻔했다. 신기술의 유혹에 홀렸던 모양이다”라고 회고했다).

열띤 논쟁이 사라지고, 그로브는 차세대 칩의 이름은 586이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 회사는 ‘펜티엄’이라는 이름을 소개했다. 이는 회사의 많은 기술자들과 286에서 386, 486으로 진행된 이름에 친숙함을 느끼는 업계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차세대 제품과 미래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트레이드마크를 보호하려는 인텔로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1993년 창립 25주년을 맞은 해, 인텔은 직원 3만 명을 거느리고 매출 87억8000만달러에 약 23억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다. 이제 회사는 <포춘> 선정 500대 기업 리스트에서 56위를 차지했으며, 잡지는 “인텔은 규모에 비해 세계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는 회사”로 언급했다. 그로브는 인텔의 발전을 기뻐했다. 하지만 회사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인텔이 컴퓨터 업계의 신흥 세력이 된 영향으로, 앤디 그로브는 다른 많은 회사의 CEO들과 개인적으로 만났다. 그는 IBM의 CEO인 루 거스트너(Louis Gerstner)를 만나 IBM은 반도체 제조업을 그만두고 서비스 회사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비록 그 결정이 앤디 그로브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IBM은 실제로 이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앤디 그로브는 인텔의 CEO로 빌 게이츠(Bill Gates)를 몇 번 만났다. 한 가지 유명한 일화로, 빌 게이츠가 실리콘밸리에 있는 앤디 그로브의 집에서 열린 저녁 파티에 왔다. 대화 도중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 관계에 있다고 믿는 제품에 있어 인텔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적 재산권을 사용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가 ‘법정에서 소송을 일으킬 여지가 있는’ 발언상 실수를 저지르자 앤디 그로브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말했다. “당신 지금 내 저녁 테이블에서 법적 행동을 하겠다고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두 CEO 모두가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얘기해서 그 날 저녁 내내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앤디 그로브는 훗날 그날 저녁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좀 껄끄럽긴 했지요.” 하지만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일 년에 몇 번씩이라도 만났다. 양사의 이해를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언론사들은 이들의 만남을 ‘윈텔 프랜차이즈(Wintel franchise)’라고 보도했다. 일반적으로 두 회사는 PC 업계의 왕좌를 두고 다투는 경쟁관계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보완자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사람들이 더 좋은 신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협력했고, 사람들이 더 좋은 프로세서를 구입하는데 돈을 쓰는지 아니면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구입하는데 돈을 쓰는지를 경쟁적으로 알아내려 했다. 오늘날까지도 이들의 경쟁은 매우 진지하고 격렬하다.한때 인텔은 원시신호처리(Native Signal Processing: NSP)라 불리는 기술을 개발하려고 했다. NSP는 개인용 컴퓨터 PC의 사운드를 중앙 처리 장치 CPU 본체에서 소프트웨어적으로 처리하는 기술로, 더욱 강력한 프로세서로 업그레이드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우수한 어플리케이션 개념의 내장형 소프트웨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인텔이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95(Windows 95)를 선보이자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한 인텔은 NSP 개발을 포기했다.

인텔의 성공은 안티 고객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94년 10월 새로운 펜티엄칩은 부동 소수점 유닛(floating point unit: FPU)에서 기술적 결함이 발견됐는데, 일부 격한 감정이 표면화됐다. 버그 원인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평균 스프레드시트 사용자가 2만7000년에 한 번 겪을 수 있는 문제로 추정됐다. 그 해 12월, 작은 결함은 인텔의 홍보에 엄청난 재앙으로 바뀌었다. IBM은 한 발 앞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인텔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펜티엄을 기반으로 한 IBM PC 유통을 즉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텔이 판매한 모든 상품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한 후에야 논쟁은 잠잠해졌다.

1990년대 중반 인텔은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앤디 그로브는 몇 가지 과오를 범했다. 1995년 그는 프로쉐어(Pro Share)라 불리는 인텔 화상회의 시스템을 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우선, 인텔은 700명의 인원을 투입해 상품을 개발했지만 시장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그 시스템을 이용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ISDN 라인을 각 가정에 연결해야 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적 한계는 너무도 컸다. 일반 전화선을 사용하는 프로쉐어를 재개발했을 때조차 화상회의라는 개념이 자리 잡지 않았다. 결국 그로브가 이 사업을 중단할 때까지 프로쉐어는 7억5000만달러를 까먹으며 5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개인적으로, 앤디 그로브 역시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전립선암과 싸웠고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다. 병이 재발할지 어떨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치료는 성공적이었고 병은 완치된 듯하다. 그로브는 신중하게 치료법을 선택했고 살아가는 인생의 에피소드로 여기며 희망을 걸기보다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런 문제들에도 1996년 인텔의 상황은 호황이었다. 그 해 매출액은 208억달러를 기록했는데, 전년 대비 45% 증가한 금액이었다. 시가 총액은 1110억달러로 미국 내 상위 100대 기업 안에 포함됐다. 현재 인텔의 직원은 4만8500명이다. 주식이 상장되던 1971년 인텔 주식 1만 주를 샀다면, 현재 200만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1996년 당시 세계적으로 반도체 분야가 고통스러운 침체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인텔은 그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해 7000만 대의 신형 퍼스널 컴퓨터가 팔렸고, 이들 중 80~90%에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내장되어 있었다.

지속적인 인텔의 성공과 돈 한 푼 없이 미국으로 이주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헝가리 사람이 CEO라는 사실을 언론은 놓치지 않았다. 1997년 앤디 그로브는 <타임>에서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 됐다. 또한 <포춘>은 전립선암과 맞서 투병한 개인적 이야기를 자세히 적은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Only the Paranoid Survive>를 포함한 다수의 경영 서적을 출간했다.

1997년 인텔 매출액이 250억달러로 치솟고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에서 38위를 차지했을 때 앤디 그로브는 은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는 후임자로 크레이그 바렛(Craig Barrett)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공표는 공식적으로 1998년 3월26일에 이뤄졌다. CEO에서 물러날 당시 앤디 그로브의 나이는 61세였다. 그로브는 인텔 이사회 회장으로 계속 활동했지만 회사를 운영하는 일상의 책임은 새로운 CEO에게 맡겨졌다.

인텔의 CEO로서 앤디 그로브의 유산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 그러하듯, 앤디 그로브의 유산에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우선 긍정적인 면을 보자.

첫째, 단순히 재무적 조건에서라면 그로브의 리더십 아래 인텔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준으로 따져볼 때 CEO로서 그로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둘째,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로브가 CEO가 됐을 때, 인텔은 회사의 방향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그로브는 메모리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집중해서 마침내 적절하게 일을 처리해냈다. 그는 용기와 추진력을 불러일으켰다.

셋째, 그로브는 개인용 컴퓨터가 큰 성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을 재빨리 파악했다. 이러한 빠른 인식을 통해 다른 업체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인텔이 먼저 시장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넷째, 그로브는 과감한 결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업체에게 386을 허가하지 않은 것은 과감한 결정이었다. 인텔이 기존처럼 진부하게 행동했다면, 미래는 무척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이렇게 앤디 그로브는 대담함을 보였다.

다섯째, 그로브는 인텔의 DNA를 통합해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했다. 회사는 결코 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언제나 더욱 발전된 칩을 만들어냈다. 인텔은 최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기업의 필수요소’로 여겼다. 인텔은 결코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섯째, 그로브는 항상 모든 상황에 당당하고 정직하게 맞서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텔에 규율을 주입시켰고, 그것은 실제로 하는 일을 드릴다운(drill down; 상세 정보 파악)하고 찾아내기 위해 인내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부정적인 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로브가 펜티엄의 부동 소수점 결함을 처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로브는 결정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문제를 제어할 수 없을 때까지 방치했다. 단,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광고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사람들은 인텔을 비즈니스 공급자가 아닌 소비 제품 회사로 보게 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함 문제 전체가 인텔의 엄청난 브랜드 인지도를 창출했고 문제가 불거지자 효과적인 방식으로 펜티엄칩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는 점이다.

둘째, 그로브는 독설을 내뱉고 자신의 분노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인텔 직원들의 속을 뒤집어놓기로 유명했다. 그로브는 개인적으로 똑똑하고 냉혹하며, 가끔은 경멸적인 언행을 보였다. 이러한 성격적 특징은 그를 힘들게 만들고 지나친 업무를 요구하며, 회사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런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접근법에 잘 대처하는 사람들은 자신감에 찬 사람들인 경향이 있다. 그로브는 지치지 않는 정력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로브가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이따금 직원들을 위해 고마운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점들이 반영됐는지는 몰라도 그의 성격이 인텔로 하여금 엄청난 성과를 이루도록 강한 정신력을 제공한 측면도 있다.

셋째, 초기 데이터가 시장에서 별 관심을 끌지 못했을 때도 그로브는 프로쉐어 기술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인텔은 엄청난 돈을 낭비했다.

넷째, 그로브는 법정 싸움, 분쟁, 대담함, 실행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런 특징은 인텔의 DNA가 됐다. 물론 인간적으로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사업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로브는 1984년 <포춘>의 ‘미국에서 가장 강인한 보스들’ 중 한 명으로 선정된 것을 기뻐했지만 1990년대 후반에는 ‘헝가리인 아틸라(Attila the Hungarian)’라는 제목의 기사는 피곤해했다.

다섯째, 그로브는 특별한 사업 기회를 놓치곤 했다. 인텔은 3억달러 규모의 시스코(Cisco)사 인수를 가볍게 생각했다. 인텔이 시스코를 인수했다면 주주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인텔은 인수보다는 내부적인 성장에만 관심을 가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장점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결점이다. 예를 들어 시스코의 시장 자산 가치는 2005년 1080억달러 이상이었다. 인텔이 시스코를 인수합병 했다면 결과는 매우 놀라웠을 것이다. 또한 인텔은 사내 벤처나 성공적인 자회사의 주주를 모회사 주주들에게 분배하는 일에 서툴렀다. 회사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업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앤디 그로브가 어떻게 보이든지 어려운 도전을 했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이사회의 회장이 되어 새로운 CEO의 어깨너머에서 지켜볼 것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만했다. 이는 크레이그 바렛이 어려운 일을 맡게 됐다는 뜻이었다. 바렛이 인텔의 사업을 조정하느라 분주한 동안 그로브는 회사가 나아갈 방향과 같은 좀 더 전략적인 문제를 맡게 됐다.

크레이그 바렛이 이사회 회장으로 임명되고 폴 오텔리니(Paul Otellini)가 CEO가 된 2005년 5월18일, 앤디 그로브는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그로브는 약간의 수석 고문 역할을 수락했으며 더 이상 인텔 이사회의 멤버로 활동하지 않고 있다. 이사회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에서 그로브는 세 가지 슬라이드를 보여줬다.

“이사회는 경영 판단 원칙을 신뢰해야 한다.”

이 원칙은 ‘위험을 감수하는 혁신’을 격려하기 위한 지식적 경영 판단에 있어 폭넓은 보호를 제공한다.

“이사회는 언제나 경영의 진자(pendulum)를 위해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진자가 움직이게 이끌어라. 단 속도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인텔의 가치를 따르라. 다음과 같이 노력하라.”

● 위험 감수를 격려하고 보상하라.

● 개방적이고 솔직해져라.

● 건설적으로 맞서 문제를 해결하라.

● 서로의 의향과 기대에 대해 커뮤니케이션 하라.

● 바른 일을 바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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