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농민’의 산실로 불리는 한국벤처농업대학에는 20대 젊은이로 구성된 특이한 모임이 있다. ‘독수리 5형제’, 박형용·김동진·송화준·유명수·이준기씨가 바로 그들이다. 국립한국농업전문대학교와 한국벤처농업대학의 동기이기도 한 그들은 열혈 농업인들이다.
 ‘독수리 5형제’는 벤처농업대학 설립과 운영에 가장 공이 컸던 삼성경제연구소의 민승규 박사가 지어 준 별명이다. 민 박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벤처농업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민 박사는 “이들 열혈 젊은이들이 우리 농업을 지키라는 뜻에서 독수리 5형제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고 말했다.

 요즘 농촌에서 20대 농민을 찾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기껏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대개 40대다. 하지만 20대에 농업에 뛰어들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독수리 5형제다.



 박형용

 “친환경 마을공동체 만들 겁니다”



 이제는 중견(?) 농업인을 자부하는 박형용씨(29)는 고향에서 거의 유일한 20대 농사꾼이다. 농사를 지은 지 벌써 8년째다. 박씨는 그의 아버지가 거의 30년 동안 해오던 유기농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2만7000평의 벼농사와 800평의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한학을 공부한 아버지 밑에서 농번기에는 농사일 돕고, 농한기에는 회초리를 맞아가며 글공부를 했죠. 아버지로부터 자연스럽게 생명과 노동의 소중함을 배웠고, 어른이 되면 꼭 훌륭한 농부가 돼야겠다는 꿈을 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굳히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만류가 심했지만 밀어붙였다. 그리고 2년간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뭔가 정체되는 것 같고, 이론공부에 대한 갈증을 풀기 어려웠던 게 사실. 그래서 한국농업전문학교 식량작물과에 1기로 진학했다.

 2학년 실습 때는 태평농법을 하는 경남 하동의 한 농가에서 실습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강한 자극제가 됐다고 한다. 2000년 학교를 졸업하고 부푼 꿈을 갖고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아버지가 앞으로 농장일과 주요 의사결정을 맡긴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그때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꿈을 펼쳐보기로 했다. 하지만 24살 청년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관행농법에 익숙한 농가들에게 친환경농법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안정적인 판로와 농산물 가격의 메리트가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수확량 감소와 병충해에 대한 위험요인마저 감수하는 일은 환갑도 훨씬 넘은 고령농가들에겐 모험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식적인 작목반이 있기는 했지만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웠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씨의 집마저 약간의 경영위기에 빠졌다. 작목반 운영을 위해 꼭 필요한 게 하드웨어라는 생각에 다소 무리해서 만든 도정시설이 가동률이 낮아지자, 과잉투자에 대한 화살이 융자금 상환이라는 부담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여기에다 처음으로 시작한, 당시로선 블루오션 품목이었던 흑미가 재배농가가 늘어가면서 레드오션으로 바뀌자, 판매가 주춤해지고 재고문제까지 발생하게 됐다.

 “작목 전환을 위한 빠른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과감하게 흑미 생산을 정리하고 빠르게 성장해 가는 이유식 원료로 품목을 바꿨습니다. 단가는 다소 낮았지만 판로가 매우 안정적이었고, 결제가 확실했죠.”

 주력 품종도 병충해에 강한 품종으로 전환하고, 수량 증대에 적극 나섰다.  그 결과 관행농가와 맞먹을 정도로 안전 다수확이 가능해졌고, 주변 농가에서도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2~3년 전부터 쌀 개방에 대한 위기가 한층 더 고조되고, 친환경농업이 대안으로 제시되자, 지자체 차원에서 친환경 농자재 지원도 많아졌고, 참여 농가들도 늘어났다. 2005년에는 참여 농가들이 무농약인증을 받기도 했다.

 “환경을 생각하면서 농사를 짓는 친환경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지금까지 이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쉽지 않았죠. 하지만 경제적인 안정성만 갖추면 불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김동진

“벼농사만 지을 생각이예요”



 1만4000평의 벼농사와 8마리의 한우를 키우고 있는 김동진씨(24)는 아버지를 도와 경험삼아 1년 동안 일을 도운 것이 농사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됐다.

 “처음부터 농사를 짓겠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젊으니까 한번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1년 동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적성에 맞는 것 같았어요. 사실 직업을 가진다고 해도 한 달에 80~90만원밖에 벌지 못하잖아요.”

 그렇다고 아무거나 하자는 심정으로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다. 일하면서 나름대로 앞으로 농사를 지어도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의 아버지도 김씨가 농사짓기를 바랐다고 한다.

 한국농업전문학교에 간 것도 사실 별 뜻은 없었다. 농사를 짓는다고 하지만, 너무 젊은 나이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 서로의 생각을 얘기하는 사이 농사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 실습을 간 일이 있었어요. 미국의 농업 현장을 보고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농업에도 미래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죠.”

 지금은 그의 아버지는 김씨에게 농사를 맡기고 시내에서 살고 있다. 1만4000평의 벼농사와 8마리의 한우는 고스란히 초보 농사꾼 김씨가 짓고 있다. 농사기술은 아버지보다는 윗동네 살고 있는 그의 할아버지가 가르친다. 또 인근의 젊은 농사꾼들과 서로 도우며 의지하고 있다.

 이모작을 하고 있는 김씨는 2004년에는 2600만원 정도의 소득을 올렸지만, 올해는 수입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까지 벼 수매를 하지 못했고, 갈수록 남는 게 없는 농사가 벼농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계속 벼농사를 지을 겁니다. 보통 고소득을 위해 특작물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모험할 생각은 없습니다. 벼농사만 잘 지어도 충분합니다. 앞으로 벼농사에 한우 사육을 접목시킬 생각입니다.”



 송화준

 “공원 같은 농장으로 가꿀 겁니다”



 전북 정읍시 감곡면 김제와 정읍의 경계에서 한우를 키우고 있는 송하준씨(27)는 적당히 살기 싫어 농사를 택했다.

 “그저 적당한 대학 나와 적당한 직장에 취직하고 적당히 그렇게 살아간다는 게 싫었습니다.”

 처음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송씨는 부모의 반대에도 한국농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부모를 실망시켜서 안 된다는 각오로 열심히 학교생활에 임했고, 2학년 장기 현장실습도 미국에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아직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송씨는 바로 옆 마을에서 25마리의 한우를 사육하고 있다. 2002년 학교 졸업 후 본격적인 영농생활이 시작됐는데, 후계자 자금과 부모의 도움을 받아 우사를 구입했고, 이듬해인 2003년에 한우사육을 시작했다.

 소를 키운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규모가 그리 큰 편이지만, 정읍시 한우 브랜드인 단풍미인 한우영농조합에 가입해 고급육 생산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단풍미인 TMR사료’를 급여하고 있다. TMR사료는 건초를 발효시켜 만든 사료다.

 아직은 자신을 너무나 연약한 농사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어디에서도 영향력 있는 농업 경영인이 될 것을 자신하고 있으며, 그때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그는 이를 위해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벤처농업경영학과와 충남 금산의 한국벤처농업대학에 편입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쌓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잡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송씨는 2005년 12월18일 결혼했다. 요즘 심각한 농촌총각 결혼 문제를 감안하면 운이 좋았다(?)고 할까. 신부인 박선영씨는 농사짓는 송씨를 자랑스러워한다.

 “농사짓는다는 게 무슨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왜 그리 싫어하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것 때문에 힘들다기보다는 속이 많이 상하네요.”

 그도 한 번쯤은 걱정해 보았을 심각한 농촌총각의 결혼문제다.

 “앞으로 성실히 해나간다면 별무리 없이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꾸준히 규모를 늘려 능력이 되면 멋진 관광공원 형식의 농장을 갖고 싶습니다.”

 그의 꿈은 농장을 공원 같은 농원으로 꾸미는 것이다. 요즘의 주말농장이 아니라 완전한 휴식공간으로 농장을 가꾼다는 게 엉뚱하지만 야무진 그의 꿈이다.



 유명수

 “친환경 축산물 생산이 나의 꿈”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유명수씨(29)는 농사의 ‘농’자도 몰랐던 평범한 도시의 젊은이였다. 1998년 군을 전역할 무렵 IMF 위기로 인해 그의 부모님도 하던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던 그의 아버지는 옛 고향 선배의 권유로 양돈업을 시작하게 됐다.

 젊은 시절 몇 년 동안 농장 일과 인연이 있던 그의 아버지는 용기를 내 선배가 하던 농장을 인수하게 됐고, 어미 돼지 200두로 양돈을 시작했다. 그 역시 대학 복학 전에 아버지를 도와 농장 일에 동참하게 됐고, 다니던 대학의 복학도 잊은 채 농장 일에 1년여 동안 매달렸다.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을 가지려고 했지만, 돼지 키우는 일이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짧은 경험과 지식, 기술 부족으로 인한 생산성의 저하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국립 한국농업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짧았지만 미국 인디애나 주의 양돈장에서 현장실습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의 노력으로 농장은 확장하게 됐고, 지금은 어미 돼지 420마리, 전체 4000마리의 돼지를 키우는 농장으로 성장하게 됐다. 직원도 5명으로 늘어났다. 농장이 커지자, 일은 분업했다.

 “지금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환경오염과 이에 따른 무수히 많은 질병, 면역성 악화로 인한 생산성의 저하입니다. 또 다른 농업 분야에 비해 친환경적인 환경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아 고민이 많습니다.”

 몇 차례 친환경적인 면역 증가물질과 효소제를 이용해 친환경 축산을 실현하려고 했으나 매번 실패를 했고,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도 입게 됐다. 친환경 양돈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질병이 많아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키우던 돼지를 전부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몇년이 걸리더라도 꼭 친환경 축산을 이뤄 보고 싶다는 게 유씨의 바람이다. 요즘도 그는 안전한 축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친환경 축산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사람들의 건강과 생활을 책임지는 먹을거리를 단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무수히 많은 항생제를 사용해 자기만의 이익을 챙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축산물이 언제 내 가족의 건강을 위협하는 독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누구나 안전하고 깨끗한 축산물을 먹을 수 있고, 수많은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이겨 나갈 수 있는 그런 축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작은 꿈입니다.”



 이준기

 “전국 양잠농가 하나로 잇고 싶어요”



 충북 보은에서 누에농사를 짓고 있는 이준기씨(26)가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한 것은 수능을 전후로 한참 진로를 고민하던 때였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머리에 계속 맴돌던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들의 반대는 거셌다. 하지만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국립 한국농업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아버지와는 좀 다른 작목을 하고 싶어 화훼과를 지원했다. 1학년의 기초 농업과정과 10개월간의 장기 현장실습을 마친 후, 3학년 전공 심화과정을 공부하면서 영농의 꿈을 더욱 키워 나갔다. 그는 졸업논문으로 창업계획서를 쓰면서 한층 더 자신의 앞길을 확고히 했다고 한다.

 “졸업 후 1000여평의 비닐하우스를 짓고 화훼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주 작목은 국화였고, 부수적으로 허브 종류의 분화 소품도 같이 했습니다. 지역 여건상 판매처가 멀어 판매하는 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제 전공을 살려 농사를 짓는다는 게 참 기뻤습니다.”

 기쁨만 있었던 건 아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영농에 종사하다 보니 친구들은 다들 군대에 가 있고, 일 끝나고 맥주 한 잔 같이 할 친구가 없어서 많이 외로웠던 게 사실.

 거기다 농사짓기 시작한 2년차 겨울.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너져 버린 때가 가장 힘들었다.

 “제 마음이 같이 무너졌습니다. 영농의지도 사라지고, 투자한 돈도 사라지고….”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고 노력했는데, 그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래하던 꽃집에 아르바이트를 나가게 됐다. 전공이 꽃이라 그런지 적성에도 맞는 것 같고, 그런 대로 일하는 게 괜찮았다. 몇 달이 지난 후 다시 먼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꽃집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가 경영하는 양잠업(누에)에 같이 종사하기로 했다.

 “그 후로 쭉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힘들 때는 많이 힘들지만, 저의 농장 제품을 드시고 효과가 있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참 맘이 뿌듯합니다.”

 이씨의 농장은 충북 보은군에 위치한 ‘보은토종누에농장’이다. 5000여평의 뽕밭에서 연간 50상자(1상자당 2만마리)의 누에를 기르고 있다. 생산하는 품목은 누에환, 뽕잎환 등으로, 생산 가공한 후 인터넷 등을 통해 전량 판매하고 있다. 2004년 7000만원가량 소득을 올렸고, 2005년에는 1억원을 바라보게 됐다. 요즘은 오프라인 판매망 확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충북지역의 양잠 농가를 비롯해 전국의 농가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공동판매도 계획하고 있다.

 “앞으로 꿈은 한국에서는 으뜸가는 누에농사꾼이 되는 것이죠. 이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눈을 돌려 판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신제품을 꾸준히 개발해 여건이 어려운 다른 농장들과 함께 한국 양잠산업의 지주대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