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를 반기는 직장인은 거의 없다. 직위가 낮을수록 거부감은 더하다. 의사 개진의 기회가 없고, 설사 개진한다 하더라도 묵살되기 일쑤다. 토론의 형태가 아닌 상명하달식 지시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실무선에서의 제안은 자칫 책임론을 불러올 수도 있어 말문을 닫게 한다. 최근 이 같은 회의 문화에 급속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회의 주재자가 일방통행식으로 의견을 내놓고 지시하는 형태에서 탈피해 참석자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끝장을 보는 등의 형태도 등장하고 있다.

유통업계를 비롯해 은행, 보험사, 카드사 등 금융권의 연중 최대 행사는 전국 영업·지점장 회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점장과 경영진이 만나 한 해 또는 일정 기간 동안의 실적을 평가하고 향후 경영전략과 비전을 공유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워낙 규모가 방대해 2~3일에 걸쳐 경영진과 각 지역본부의 발표가 이어진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이 같은 회의 형태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매년 똑같은 형식에 숫자만 바꾼 실적 발표가 되풀이되고 비전과 이슈를 공유하기보다는 서로의 안부인사를 나누는 단합대회 형식이 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이런 전국 규모의 회의에서 도출된 이슈들은 말단 직원에게까지 공유되기 어렵고, 다른 부서의 실적 공과도 현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비단 전국 규모의 회의뿐만 아니라 기업 단위와 소규모 부서 회의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의 한 임원은 한국식 회의의 특징을 이렇게 말했다.

“회의 참석자 대부분은 비슷한 직위를 갖고 있습니다. 또 회의 주재자가 회의를 주도하고 안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고 그에 대해 바로 평가를 합니다. 특히 주재자의 얼굴 표정, 감정 변화에 따라 회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합니다. 반대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회의 주재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회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결론은 한정돼 있다는 지적을 하고 싶어 했다. 즉 논쟁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기보다는 비슷한 직위의 사람들이 결론을 공유하기 위한 모임이라는 것이다. 또 연공서열주의에 입각한 회의 문화도 비판적으로 꼬집었다. 한마디로 회의라기보다는 이미 결정된 결론을 전달하는 자리라는 지적이었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고위직으로 근무했던 한 인사도 한국 기업의 회의 문화를 강도 높게 꼬집었다. 특히 최고 의사결정기구를 통해 결정된 정책이라 하더라도 실패하게 되면 제안자나 담당자 등에게 책임을 묻는 등 희생양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충분한 토론식 회의가 아니라 회의 주재자에 의한 지시와 평가가 이뤄졌던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반증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어 그가 덧붙인 골드만삭스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전 골드만삭스는 거액의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이후 회수일을 앞두고 대우그룹으로부터 상환을 늦춰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홍콩 본부에서 회의가 열렸죠. 상환 연기 요청을 받은 골드만삭스 담당 직원은 대우그룹 인사와 친분도 있었습니다. 회의 결과는 요청을 받아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대우그룹은 부도 처리되고 말았습니다. 자금 회수도 당연히 물 건너갔죠.”

친분이 있던 대우그룹 인사로부터 회수일 연기를 요청받아 이를 회의 안건으로 올려 요청 수락을 주장했던 골드만삭스 담당 직원은 어찌되었을까.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회의 결과가 잘못된 것이었지요.”

골드만삭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담당 직원에게 전한 말이었다.

결론 나지 않을 경우 밤샘 토론도

외국인의 눈에까지 일반화된 왜곡된 한국 기업의 회의 문화가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최근 서서히 변하고 있다.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이 올해 처음 실시한 리더십 미팅은 전국 단위 대규모 영업점 회의의 대표적 사례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도를 벤치마킹한 리더십 미팅은 지난 9월7~9일 353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기도 화성 롤링힐스에서 실시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참석 대상자와 발표 주제. 전국의 팀장 및 지점장급 이상 간부와 경영진 뿐 아니라 일선에서 직접 업무를 맡고 있는 1~3년차 사원급 직원들이 모두 참석했다. CEO에서 말단 직원까지 회의에서 제기된 전략과 비전, 이슈들을 모두 공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발표 주제도 이제까지의 천편일률적인 실적 발표에서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로 불리는 우수 사례 발표로 전환했다. 실제 업무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례들을 서로 공유해 전사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높이자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대학 강의처럼 각 영업본부별로 반을 편성해 돌아가면서 우수 사례에 대해 듣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자신의 업무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이들이 어려움을 헤쳐 나갔던 사례를 공유한 직원들의 공감도와 친밀도가 더욱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마지막에는 CEO가 회사의 경영 현황과 비전에 대해 설명하고 조별 모임을 통해 경영진과 말단 사원들의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행사를 주관한 진석현 인력개발팀장은 “상명하달식의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직접 자신이 발표를 하고 상하 제약 없이 열린 토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2004년 6월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원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여부와 관련해 노대통령을 겨냥해 “계급장을 떼고 치열하게 논쟁을 하자”는 발언을 했다. 계급장을 뗀 논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정치권에 커다란 파문으로 확산됐던 이 발언은 기업의 회의 문화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난 7월 신은철 대한생명 부회장은 1박2일간의 실무자 토론회에 참석해 ‘대고객 서비스 혁신 방안’의 추진을 결정했다. 콜센터의 ARS 운영시간 확대 등 고객 편의 시스템을 한층 신속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한 것이다.

이날 신 부회장이 참석한 실무자 토론회는 ‘워킹 투게더(Working Together)’로 불리는 대한생명의 신개념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아이디어 공유를 통한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한 제도로 주제와 관련된 모든 실무자들이 참석해 말 그대로 ‘계급장을 떼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토론을 통해 문제 해결 방안을 도출해 내고 있다. 특히 빠른 정책 결정을 위해 결론이 나지 않을 경우 밤샘 토론도 마다하지 않아 사내에서는 ‘끝장 토론’이라는 다소 험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실무자와 함께 워킹 투게더에는 지난 7월 신 부회장과 같은 최종 결정권자인 ‘스폰서’를 참석시키는데 토론 내용 전체를 지켜본 스폰서는 토론에서 도출된 내용들에 대해 평가하고 시행 여부를 그 자리에서 결정한다.

대한생명 관계자는 “중요한 정책 변경 등의 경우 보다 집중적이고 속도 있는 정책 결정으로 회사 운영 전반에 속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워킹 투게더와 같은 신속한 정책 결정으로 이어지는 회의 문화는 그동안의 회의에 대한 통념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국내 대부분의 회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안제도를 보자. 많은 기업들이 임직원으로부터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아이디어 제안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사실 유명무실한 전시행정의 표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시행 초기에는 그럴 듯하게 제안 내용에 대한 검토와 결과가 공표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유야무야 되고 만다.

회의 역시 마찬가지다. 회의를 마치고 회의장을 나서는 참석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무엇을 토론했는지, 또 그 결론은 무엇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시행될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왜 회의를 하는지,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한다.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회의 많은 회사치고 실속 있는 회사 없다’, ‘회의 많은 회사는 망한다’는 말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기업의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보증기관들도 회의가 많고, 회의 시간이 긴 기업은 부실 징후가 높은 것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회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수록 회의가 잦고 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산은행이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임원·팀장급 회의마다 반드시 성과물을 얻기 위해 ‘워크 아웃제’를 적용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무의미한 회의를 없애자는 의미다.

실질적인 효율로 이어지기 위한 회의 방식은 그간 여러 선진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많이 소개됐다. 그러나 문제는 ‘실천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타임벨’, ‘시테크’ 등 회의 횟수는 물론 일정한 시간까지 정해 놓고 회의를 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지만 오히려 시간에 쫓겨 충분한 토론을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고 참석자들은 말한다.

적합한 개선 방법 찾아 지속 추진 중요

이와 관련 국무조정실로부터 회의 문화 우수사례로 선정된 LG전자의 ‘111 회의 문화’는 회의 집중도는 물론 효율성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LG전자가 지난해 7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111 회의 문화’는 회의 자료는 최소 1시간 전까지 공유하기, 회의 시간은 1시간 이내로, 회의 결과도 1시간 이내 공유하기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디지털 디스플레이 사업본부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 캠페인은 현재 전사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지난 5월4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가진 국무조정실 300여 명의 직원들이 참석한 혁신워크숍에 소개됨으로써 공무원 사회로까지 전파됐다.

‘111 회의 문화’를 주도한 LG전자 경영지원팀 TDR(Tear Down & Redesign : 혁신 활동) 리더인 박경수 과장은 “회의 문화 개선은 조직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며 “회의 문화에 대한 진단을 통해 조직에 가장 적합한 개선 방법을 찾고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