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중국 심천(深川)에 위치한 푸틴(福田)지구에 위치한 나의 일터다. 중국 대륙의 남단으로 홍콩 섬과 가까운 이곳은 중국의 개방정책의 1번지로, 가장 먼저 경제특구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지 불과 한 달 여. 중국 취업에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전자장비를 생산하는 ‘컴파스시스템’이라는 곳이다. 우리 회사가 생산·판매하는 제품은 디바이스프로그래머(또는 롬라이터)라고 부르는 장비다. 반도체에 어떤 프로그램을 깔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입력시켜주는 기기가 필요한데, 그 기기가 바로 디바이스프로그래머다. 우리 회사는 이 기기를 생산, 반도체를 이용해 핸드폰 등을 생산하는 전자업체에 판매를 한다. 한국 본사는 구로동에 있고, 홍콩에 해외법인이 있다. 내가 심천에 와 있는 이유는 중국 현지법인 설립과 생산설비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중국법인의 직원은 단출하다. 모두 7명으로, 한국인은 본사에서 파견된 과장님 한 분과 나 2사람뿐이고, 나머지 직원 5명은 조선족과 한족이다. 현재 회사는 법인 설립인가와 현지 생산설비를 계약한 뒤 등록 중에 있다. 내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사수’인 과장님과 함께 법인 설립과 설비 설치에 관련된 대부분의 업무를 진행하는 한편, 경리업무에 영업도 겸하고 있다. 법인을 설립하는 단계라 바쁘긴 하지만, 회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다 보니 배우는 것이 많다. 바쁘고 정신도 없지만, 배우는 것이 많고, 무엇보다 오래 전부터 내가 꿈꿔 왔던 현장에 내가 서 있기 때문에 하루하루 보람을 느낀다.



 ‘중국 비지니스’는 오랜 꿈이자 희망

 내가 중국 취업에 성공해 심천 땅을 밟은 건 불과 한 달 전이다. 2005년 12월16일, 나는 간단한 옷가방을 들고 심천공항에 첫 발을 내딛었다. 대학생 시절, 그리고 이전 회사에 다닐 때 동료들과 여행 삼아 2번 중국 땅을 밟아 보긴 했지만, 중국을 일터로 첫 발을 내딛는 감회는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했다. 모든 게 이제 막 중국 땅에 첫 발을 내딛는 나를 고향처럼 푸근하게 받아 주는 느낌이었다면 과장일까. 나는 있어야 할 곳에 비로소 왔다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중국 현지에 취업하기 전, 나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제조업체에서 회계·경리 업무를 보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은 내가 나고 자란 고향으로 모든 것이 익숙하고 편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대학생시절부터 품고 있던 중국에 대한 꿈이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몰랐다. 충북 청주시에 있는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내 꿈은 ‘중국 전문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어중문학과를 택했고, 공부도 제법 열심히 했다. 학사장교로 또래들보다 긴 3년 4개월의 군복무를 마친 뒤 진로를 선택할 때도 내 꿈은 중국 비즈니스였다. 고향인 이천에 위치한 제조업체에 취업을 한 것도, ‘장차 중국 비즈니스를 확대할 계획’이라는 회사 측의 비전 제시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의 중국 진출 계획은 좀처럼 구체화 되지 않았고, 나는 회계와 경리라는, 다소 꿈과는 거리가 먼 업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꿈을 좇아 과감하게 회사 문을 박차고 나오기보다, 안정적인 직장과 월급이 주는 평온한 일상에 나도 모르게 젖어 있었다.

 직장생활이 2년 차에 접어들자, 애써 접고 있던 꿈이 다시 되살아났다. ‘스물아홉이란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는 것이 늦은 일은 아닐까’, ‘아니야, 지금이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이 좋아.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몰라’, 번민 속에 시간은 흘렀고, 내 마음은 후자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도 있잖아!’

 회사 일을 하며 나는 점차 희미해져 가던 중국 진출의 꿈을 되살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일단 중국에 취업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중국 전문가 양성교육기관에 수강생을 위탁교육시키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해외취업지원제도’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이었다. 국가가 수강료를 내주고, 취업할 회사까지 알선해 준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내가 한정된 수강생 모집에 합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중국어를 전공했지만, 사회경험은 다른 분야에서 쌓은 데다가 나이도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이 꺼림칙했다. 그러나 일단 응모하고 볼 일이었다. 일단 수강생 모집에 뽑히면 회사는 미련 없이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전문가 양성교육기관이 서울에 있는 이상, 이천에 있는 회사를 다니면서 수강을 할 수도 없고, 국비수강생에 뽑힌다면 강의와 공부 때문에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이력서 응모와 면접 끝에 수강생 선발에 뽑혔다는 연락을 받은 나는 2005년 5월,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이미 새로운 계획을 회사에 보고하고 사의를 밝혔기 때문에 회사에도 미안한 마음이 덜했다.

 위탁교육을 받을 곳은 ‘씨에씨에’라는 명칭의 중국 전문가 양성기관이었다. 서울 강남역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강남역 근처 고시원을 숙소로 정했다. 이천인 고향을 떠나 청주에서 오랫동안 자취생활을 했던 덕분(?)에 고시원생활은 새삼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나와 같은 기수로 국비수강생으로 선발된 인원은 모두 50명에 달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어렸고,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목표도 뚜렷했고, 실력도 쟁쟁했다.

 지향하는 목표도 같고, 동기부여도 충분한 집단이다 보니 전국에서 모여들었음에도 수강생들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끼리끼리 스터디그룹을 만드는가 하면, 서로가 가진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 다른 수강생들에 비해 나이도 비교적 많고, 사회생활 경험도 가진 나였지만, 중국으로 취업을 가기엔 여러 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중국어를 전공한 덕분에 일상 회화엔 문제가 없었지만, 무역이나 협상에 필요한 전문지식이나 전문용어에는 취약했다. 수강기간 6개월로 부족한 공부를 다 메우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지만 중국 현지 경험이 풍부한 강사진과 수강생들의 열성적인 수업분위기가 취약한 공부를 메워 주었다. 강의가 끝난 뒤에도 서로 모르는 분야를 나눠 공부한 뒤 발표하는 식으로 메워나갔다. 돌이켜 보면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이고, 유익한 프로그램이었다. 풍부한 현장경험을 가진 강사들의 수업은 실전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수강 초기의 아찔하고 창피했던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첫 프레젠테이션의 아찔한 기억

 중국 전문가 양성과정답게 모든 강의의 80% 이상이 중국어로만 진행됐다. 그 중 어느 강의는 학생들에게 주제를 주고 수강생 앞에서 발표를 하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프레젠테이션에 익숙치 않은 나는 첫 발표를 앞두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 강단에 오른 순간, 나를 바라보는 100여개의 눈동자 앞에서 내 머릿속은 하얀 백지상태가 되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첫 발표를 마치고 강단을 내려오기까지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첫 프레젠테이션의 홍역을 치른 뒤, 프레젠테이션 강의에도 이력이  붙어 나중에는 프레젠테이션 자체를 즐기기에 이르렀다. 현장에 투입되고 보니 당시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진행했던 강의가 그 자체로 제품설명회이고, 투자설명회라는 사실에 새삼 강의의 효용성을 실감하고 있다.



 10년 후 통상전문가가 내 꿈

 연수과정을 밟으며 나는 일찌감치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중국 비즈니스 전문가가 되기 위해 어떤 업종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나는 IT 업종을 택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서는 다양한 업종이 세계시장을 이루고 있는데, 나는 한국이 강한 IT 업종이라면 중국 현지에서 일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수강생들이 많아 우리는 함께 관련 업종의 전문용어도 공부하고, 비즈니스 트렌드에 대한 정보도 서로 교환했다.

 6개월의 연수과정이 끝나갈 무렵, 수강생을 대상으로 중국 진출업체의 인력 모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IT 업체들도 구인에 참여했고, 나 역시 연수가 끝나기 전에 응모를 했다. 나이가 많다는 점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제조업체에서 2년간 경험을 쌓았던 점을 높이 사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연수가 끝나기 전에 지금의 회사에 취업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일을 하게 되었다니, 축하한다.”

 고향의 부모님에게 취업 소식을 알리자, 부모님도 함께 기뻐해 주셨다. 학창시절부터 중국에서 꿈을 펼치는 것이 소원이란 걸 아셨던 부모님은 고향에서 꿈을 접은 채 직장생활을 하던 자식이 내심 안타까웠다고 하셨다. 본사에 출근해 인사를 하고, 나는 출국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중국 현지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던 터라 중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합격의 기쁨을 느긋하게 즐길 형편이 아니었다.

 오늘이 1월16일이니까 오늘로 중국에 온 지 정확하게 한 달이 지났다.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경우가 많고, 평일에도 숙소에 돌아오는 시간은 9시를 넘기는 게 보통이다. 본사에서 파견 나온 ‘사수’인 과장님과 회사 근처에 아파트를 얻어 살고 있는데, 숙소에서는 잠자고 씻기만 하고, 밥은 전부 근처 식당에서 사 먹는 신세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곳의 음식은 제법 내 입맛에 맞는다. 어떤 한국 사람은 중국에서도 한식만 고집한다는데, 나는 아직까지 한국 음식 한 번 먹지 않아도 잘 버티고 있다. 중국 남부에 위치해 있지만, 광동요리를 비롯해 북경요리, 사천요리 등 중국 전역의 요리를 다 맛볼 수 있는 곳이 이곳 심천이다. 요즘은 중국식 샤브샤브 요리인 ‘후어구어’ 맛에 빠져 있다.

 아직 중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심천의 물가는 중국에서도 1위일 정도로 비싸다. 택시 기본요금이 한화로 1500원정도인데, 한국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다. 심천을 벗어나기만 해도 물가가 절반으로 떨어지니, 심천의 물가가 얼마나 비싼지 상상이 갈 것이다.

 심천은 선진국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도시환경이 잘 발달한 지역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IT 업계만 하더라도 삼성전자를 비롯해 노키아, 모토로라 등 글로벌 브랜드의 법인이나 현지공장이 심천에 몰려 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을 넘어 그 자체로 세계시장이라는 점을 눈으로, 귀로 실감하고 있다.

 2006년 내 목표는 회사의 중국법인 설립과 설비 가동을 순조롭게 해나가는 것이다. 아울러 기회가 되면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제품을 보다 많은 업체에 팔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10년 후까지 이뤄낼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비즈니스에만 능한 전문가가 아니라 중국의 문화·사회에 두루 통달한 통상전문가가 되는 게 내 궁극적인 목표다. 물론 앞으로의 10년이 목표를 이루는 데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돌을 옮겨 산을 이룬다는 고사를 지닌 중국이 아닌가. 뒤늦게 잡은 기회인 만큼, 전력투구할 작정이다.

정리 오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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