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삼성, LG만 갖고는 어렵다. 선진 경제에 진입하기 위해선 ‘허리 라인’을 키워야 한다. <이코노미플러스>는 한국 경제의 ‘중산층’인 중견기업 육성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열전! 중견기업 오너들’ 코너를 마련, 두 번째 순서로 왕화식 템피아 회장을 찾아갔다.

히트펌프 냉난방기로 ‘대박’ 신화

“남들이 안가는 길을 가라”

‘3년 전 100㎏에 육박하던 거구를 현재 67㎏의 날렵한 몸매로 바꾼 남자.’

냉난방기 전문회사 템피아(tempia.co.kr)의 창업주 왕화식(45) 회장 얘기다. 30㎏ 감량은 ‘경영자 왕화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하루에 2갑씩 태우던 담배, 주량이 말술이라는 술도 끊은 지 3년째다. 템피아를 국내 히트펌프 냉난방기 시장의 마켓리더로 키워낸 그의 사업도 ‘미친 X’ 소리까지 참아가며 일궈낸 ‘결단’의 연속이었다. 그는 남들이 다 안 된다는 이른바 ‘히트펌프’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냉난방기에 구현한 주인공이다. 덕분에 왕 회장은 ‘틈새 상품’이 아닌 ‘신규 시장’을 창출한 기업가로 불린다.

그가 개발한 히트펌프는 수입 화석연료를 사용하던 기존 냉난방기와 달리 공기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쉽게 말해 공기를 에너지로 만든 셈이다.

템피아 냉난방기는 화석연료 대신 공기를 사용, 에너지 절약과 함께 환경오염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상품.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에 수요가 높아지는 제품이다. 템피아가 세상에 나와 ‘히트’를 치자 삼성, LG도 뒤따라 시장에 뛰어들었다.

매출액은 올해 약 100억원어치의 수출을 포함, 1000억원대를 넘본다. 2000년 7월 설립 후 불과 7년 만에 히트펌프 냉난방기 분야 국내 최강자로 우뚝 선 비결도 남들이 쳐다보지 않은 ‘블루오션’을 개척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월급 350만원만 갖고 가는 오너’

3월19일 오전 10시 충남 천안에 있는 템피아 본사 5층에 있는 회장 집무실서 만난 왕화식 회장은 기업관부터 얘기를 풀어나갔다.

“회사는 돈 버는 수단이 아닙니다.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해야지 기업을 해선 안 되죠. 기업가는 책임의식이 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익을 내야 하는 것이죠. 회사가 망하면 그건 범죄행위예요. 다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템피아는 현재 사회 공헌 활동 중 하나로 중국 길림성 성도인 장춘에 있는 조선족 학교인 녹원초등학교에 도움을 주고 있다. 템피아 CEO인 김용민 대표가 녹원초등학교의 당연직 교장이다)

특히 그는 “창업주나 오너들이 회사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풍토가 문제”라고 쏘아붙였다.

“돈을 부을 때 자기 맘대로 붇는 것은 자유겠죠. 그런데 가져갈 때도 내 맘대로 가져간다면 그걸 배임, 횡령이라고 하는 겁니다. 회사는 창업자 개인의 재산이 아닌데도, 왜들 그러는지….”

그는 자신도 “매달 월급만 갖고 간다”고 말했다. 회사 지분 35%를 쥔 중견기업 오너가 월급만으로 산다는 말에 얼른 수긍을 못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집무실 책상 서랍에서 몇 개월 치 월급봉투를 갖고 나왔다.

2007년 2월 월급명세서엔 세전 421만원, 세후 350만9890원이 적혀있었다. 그는 “안산에 부모님과 함께 살다 3년 전 분가했다”며 “지금도 수원 영통에 26평짜리 아파트에 세 들어 산다”고 말했다. 전셋값도 템피아 이사회 의장(대주주)으로서 배당을 받아 마련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러면서 뒷주머니에서 만원짜리 지폐 5개가 전부인 지갑을 꺼내 보여줬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지 않고 사업가의 길로 나선 왕화식 회장. 1989년 원보종합건설을 창업, ‘건축업’을 하던 그는 어떻게 ‘생판 다른 업종’인 템피아를 창업하게 됐을까. 사업 기회를 본 건 우연이었고 기회를 포착한 건 필연이었다. 1980년대 말 그는 식사를 하고 나오다 식당 밖 에어컨 실외기의 뜨거운 바람을 맞고는 호기심이 발동됐다. ‘안은 시원하고 밖은 뜨거운데, 실내기와 실외기를 바꿔놓으면 어떨까.’

그게 바로 ‘히트펌프’ 기술이다. 세계적으로는 50~60년 역사를 가진 특허였다. 문제는 아열대 지역에선 통했지만 한국처럼 겨울에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선 불가능하다는 게 당시 학계와 산업계의 통념. 그러나 왕회장은 ‘하면 될 것’이라며 나섰다. 그는 이를 ‘감(感)’이라고 표현했다.

10년 만에 외양간 개조한 공장서 개발 ‘성공’

그는 그 길로 에어컨을 하나 사서 경기도 안산 집 근처 외양간을 개조한 비닐하우스 공장에서 실험에 돌입했다. 그가 “99번 실패 후 100번째 성공했다”고 밝혔을 만큼 실패의 연속이었다. 당시 태동 단계에 있던 시화지구에 공장을 짓고 상가를 지어주며 짭짤하게 벌었던 돈과 열정을 온통 개발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10년 만에 성공한 기술이 바로 ‘히트펌프.’

그러나 개발보다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어렵사리 개발한 기술을 전문가들에게 인정받는 건 더 큰 도전이었다.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 교수들을 찾아갔지만 백발백중 ‘퇴짜’였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똑같은 답변. 문을 나서면 뒤에서 ‘미친 X’ 소리가 들려왔다.

왕 회장은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당신 전공이 뭐야? 냉동기계 좀 알아?’라며 쏘아붙일 때마다 울분을 삼켜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상지대 법학과 출신이다. 그야말로 전 재산을 투자해 개발한 기술이 테스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장될 위기였다.

“제가 그때 하던 건축업이 잘 됐거든요. 그 돈으로도 모자라 부모님께 손을 벌렸고 처갓집 돈도 죄다 끌어다 썼습니다. 그랬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정말 그때는 잠도 못 잤습니다. 투자금이요? 못해도 수십억원은 족히 됐을 겁니다.”

이 때 그는 용단을 내렸다. 직접 이론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열역학, 공업화학, 유체공학 등 뜻도 모르던 책을 밤을 새가며 공부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아무리 어려운 책도 100번을 읽으면 보인다)’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해외 세미나에 참석해 발표할 수준이 될 만큼 그는 독학을 통해 이론에도 능통한 개발자로 변신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2000년 7월 설립한 템피아다.

“제가 만약 그때 냉동공조 전문가였다면 ‘안 했을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 뭐,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제 얘기인 것 같습니다. 하하.”

30대의 10년을 다 바친 왕 회장의 ‘작품’이 세상에 출시된 건 2001년 여름. 대구와 전주 대리점에서 30여 대씩 팔리며 ‘테이프’를 끊었던 템피아 히트펌프 냉난방기는 요즘 연간 몇 만 대씩 팔리는 히트상품이 됐다.

실제 템피아 본사 1층에 가면 관련 특허를 비롯, 50여 개의 각종 상패가 전시되어있다. 2002년 특허청 주관의 우수특허 대상, 2003년 대한민국 기술대전 대상, 2004년 벤처기업 등록, 2005년 발명의 날 대통령산업포장 수상, 2006년 벤처기업 우수대상 등이 주요 성과물들이다. 이 가운데 왕 회장을 가장 기쁘게 해준 건 2001년 8월 산업기술시험원(KTL)으로부터의 유망 중소기업 선정이다.

“10년간 연구해 개발한 상품을 세상이 다 몰라줬는데, 창업 후 딱 1년 만에 국가기관이 유망 중소기업으로 뽑아주니 정말 그동안 당했던 치욕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더군요.”

호시우행(虎視牛行)이 신조

현재 시장점유율은 어떨까. 왕 회장은 “M/S(시장점유율)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 “국가적으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해냈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히트펌프는 일반 화석연료 사용 때보다 에너지가 70% 절약됩니다. 그리고 공기라는 청정원료를 쓰니 이산화탄소도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제품입니다. 앞으로 수많은 회사들이 시장에 뛰어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인터뷰 첫 마디에 나왔던 ‘기업가의 책임의식’과 맥이 닿아있는 한마디다. 그는 이를 ‘호시우행(虎視牛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걷는다는 뜻으로 세상이 어떻게 봐도 자신은 본인 스케줄대로 ‘마이 웨이’를 걸어간다는 얘기다. 현재 템피아는 전체 냉난방기 시장에선 몰라도 히트펌프 시스템에선 LG, 삼성도 앞질러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다는 게 왕 회장의 평가다.

템피아의 특징 중 하나는 대리점 유통만 고집한다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왕 회장은 “마케팅은 멀리 내다봐야 한다”고 대답했다. 현재 템피아는 전국에 240여 대리점 망을 두고 있다.

“회사를 알리는 건 사람이 하는 게 제일 빠릅니다. 요즘 인터넷 마케팅도 널리 퍼져있지만 인터넷은 바람과 같아서 후끈 달아올랐다가도 훅 불면 꺼지는 특성이 있거든요.”

특히 그는 두 가지 근거를 댄다. 하나는 (대리점 유통채널을 하면) 고용 창출 효과가 크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브랜드 경영’을 위해서다.

“전국에 240개 대리점이 있는데, 대리점과 별개로 설치 및 A/S점이 전국에 70개 있습니다. 대리점 한 곳당 5명 직원이 있으니 전국에 1500명이 템피아와 함께 하는 셈이죠. 더 중요한 이유는 템피아라는 브랜드가 달린 매장이 전국에 깔려 소비자와 함께 숨을 쉰다는 겁니다.”

그는 브랜드 경영을 얘기하다 기술 개발 외에 정말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다고 얘기를 이어갔다. 대기업의 ‘같이 하자’는 유혹을 이겨낸 일이다. 그는 이를 ‘가진 자들의 손짓’이라고 표현했다.

“제가 전 재산을 다 투자했지 않습니까. 그렇게 개발해 상품화에 성공하니까 문제는 운영 자금이 딱 떨어지더란 말입니다. 그때 추파가 오더군요. 거액에 (특허를) 사겠다는 제안, 동업을 해보자는 제안, OEM으로 납품을 하라는 제안 등이었죠. 그땐 정말 자금 사정이 어려웠거든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택할까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때 포기하지 않았던 게 오늘의 템피아를 만든 셈이죠.”

요즘 템피아는 ‘내수 기업’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수출에도 물꼬를 텄다. 2005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인터내셔널트레이딩사가 보유중인 중동지역 내 180여 매장에서 템피아 제품을 전시 판매하기로 한 MOU를 체결한 것. 그러나 1년6개월이 넘도록 아직까지 템피아의 수출 실적은 제로(0)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

“몸집만 키우려 하면 곧 망한다”

“수출은 협상하고 계약하고 물건이 나가는 순서를 밟습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품질’입니다. 이건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제품엔 하자 발생 요인이 있습니다. 당장의 매출 실적에 눈이 멀어 ‘하자’가 있는 물건을 납품하게 되면 이건 큰일입니다. 제가 기술진들에게 ‘더 테스트해 봐’라고 말해뒀기 때문에 수출이 늦춰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100% ‘품질’에 확신이 들 때까지 수출을 미뤄왔다는 얘기다. “언제쯤 첫 수출 물량이 선적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올 여름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 물량은 1000만달러어치만 수출할 계획이다. 사실 중동과 필리핀 등 동남아로부터 연간 7000만~8000만달러대 물량을 주문받고 있지만 그는 철저히 수출액을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 두바이(UAE) 등에선 ‘빨리 안 주면 소송 걸겠다’며 반 협박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수출 물량을 통제하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장 수출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설치와 관리 능력이 따라줘야 합니다. 템피아의 현재 능력상 올해는 1000만달러선이 커버할 수 있는 적정량입니다. 몸집만 키우다 망한 회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는 수출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지금까지는 100% 내수로 먹고 살았지만 정확히 2년 뒤엔 수출 물량이 내수 물량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요즘 템피아는 TV와 에어컨, 냉장고도 만들고 있다. 냉난방기 전문회사에서 종합 가전 회사로 탈바꿈하는 건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여기에 대해 왕 회장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저는 삼성, LG가 정말 애국자라고 봅니다. 템피아도 LG, 삼성 덕 좀 봤습니다. 과거 우리가 미제(美製), 일제(日製)하면 회사명도 모르고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현재 중동에선 ‘메이드 인 코리아’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사실 저는 사람부터 사겠습니다. 제품은 나중에 보여줬고요. 이제는 신뢰 관계가 탄탄합니다. 템피아의 냉난방기 제품을 보더니 TV 등 가전제품도 만들어 달라고 그들이 주문을 하더라고요. 중동 ‘큰손’을 생각하면 TV, 냉장고 아니라 비행기, 배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흔다섯 살에 공대 2년 재학 중

왕 회장은 요즘 기대에 차있다. 지난해 12월 내놓은 수냉식 냉난방기의 시장 반응이 괜찮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냉난방기가 공랭식이었다. 그는 “지난해 12월 이후 월 수주액만 40억~50억원에 이른다”면서 “가정용까지 출시하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450억원이었던 템피아 매출액을 올해 1000억원으로 높게 잡은 것도 첫 수출 물량과 함께 수냉식 냉난방기의 선전 때문이다.

그는 템피아의 회사 정체성에 대해 “가전 회사가 아니라 에너지 회사”라고 못 박았다. 냉난방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기’를 그리고 이제는 ‘물’을 에너지원으로 만드는 기술력이 포인트라는 게 왕 회장의 설명이다. 템피아란 회사명도 ‘템퍼리처 유토피아(temperature utopia)’에서 따온 말이다.

템피아의 창업자이자 최대 주주인 그는 자신을 ‘템피아의 영업이사’라고 소개한다. 실제 2005년 7월부터 CEO 자리는 서울보증 노조위원장 출신인 김용민 대표에게 넘긴 상태다. 원래 개발과 영업이 주특기라는 왕 회장은 “국내 대리점 관리며 해외 수출 등 영업만 챙긴다”고 말한다.

그는 1년이면 대략 4개월 정도는 외국 생활을 한다. 월급만 받아 살아 그런지 그는 “외국에 나가도 특급 호텔의 커피숍은 다녔어도 특급 호텔서 하룻밤도 묵은 적이 없다”고 들려준다. 한번 외국에 나가면 평균 열흘씩 머무르는데, 현지 체류비용을 100만원 이상 써본 적이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김용민 대표 등 중역들에게도 ‘돈’에 욕심이 있다면 회사를 나가라고 말해뒀습니다. 제가 월급이 350만원이니까 김 대표도 300만원이 채 안 될 겁니다. 그 적은 돈들을 모아 더 큰 일을 해야 합니다.”

사실 템피아가 2003년 10월 현재의 천안시 성거읍에 정착할 때 사놓은 대지 9000평의 땅값도 크게 뛴 상태다. 68억원에 매입한 땅이 현재 200억원을 훌쩍 넘는다. 사내 유보금도 60억~70억원 수준에 이른다. 그는 언제쯤 전세 신세를 면하고 임직원들에게도 좋은 대접을 해줄 것이냐는 질문에 “글쎄요. 몇 년 후엔…”이라며 말을 아꼈다. 세계 냉난방기의 거인이 되겠다는 큰 목표를 위해 “당분간 허리띠를 더 졸라매자”며 독려하고 있는 게 템피아의 현재 모습이다.

“잠잘 시간도 없는데 무슨 골프?”

템피아가 세상에 나오기 전 냉동기계 교수들로부터 면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 그는 요즘 마흔 다섯 살 나이에 공대 2학년 신분이다. 지난해 3월 건국대 경영정보학과에 입학해 올해 산업공학과로 전과했다. 하루 평균 5시간씩 ‘공부’에 투자한다. 지난해 인수한 의료재단 박애종합병원(평택) 이사장이면서, 중견기업 템피아의 ‘영업이사’로 그는 1인3역을 소화중이다. 이 때문에 그는 하루 3시간 이상 자는 날이 많지 않다고 한다.

많은 중견기업 오너들이 그렇듯 그도 ‘워커홀릭(일 중독자)’에 가깝다. 매일 새벽 5시30분이면 눈을 뜨는 그가 잠자리에 들어가는 시간은 새벽 2~3시.

“집에 들어가면 보통 밤 11시30분에서 12시쯤 됩니다. 들어가면 꼭 인터넷을 열어보죠. ‘신문고 제도’를 운영 중인데, 240여 대리점 영업사원들이 매일 이메일로 어려운 점을 제게 날립니다. 보통 하루에 20~30통씩 들어오는데, 일일이 답신하고 나면 새벽 2시가 넘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러닝머신에서 운동 좀 하고 잠자리에 들죠.”

그는 “취미도 없고 특기도 없다”고 말한다. 대신 일하는 게 취미다. 휴일인 일요일엔 전국 매장을 돌아보는 ‘고약한’ 습관도 생겼다. 일요일 운전대를 잡아주는 아내에게는 미안하기만 하다.

성공 비결을 묻자 그는 소신과 인내란 두 단어를 꺼냈다. 지금도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지금 벌이고 있는 사업이 삼성 등) 대기업에서 하는 사업인데, 과연 게임이 되겠느냐”는 냉소적인 말이다.

“냉난방기를 개발할 때 99%는 실패였습니다. 마지막 1%가 성공이었다면 성공인데, 그 열매는 정말 달콤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밀고나가는 ‘소신’이 중요한 것이죠. 그리고 세상이 몰라줄 때 ‘치욕’을 이겨낼 수 있는 ‘끈기’야말로 기업가들에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봅니다.”

그는 “첫째가 제품에 하자가 없는 품질경영, 둘째는 대량 수출 주문을 받아도 책임질 수 있는 양만 생산하는 내실경영, 셋째는 회삿돈을 유용하지 않는 투명경영 등 3대 원칙만 지키면 (어떤 회사건) 롱런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기자는 인터뷰 내내 왕 회장으로부터 ‘(일에)미쳐야 (성공에) 미친다(不狂不及: 불광불급)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