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체제 개혁을 부르짖고 문화 르네상스를 주도한 실학파의 전성기가 18세기라고 한다면, 그 이전 17세기는 실학의 융성을 준비한 개화기였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의 실학자들은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주류 성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학문 및 현실 개혁 이론을 개척했다. 따라서 이들은 이익,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등 18세기 실학운동을 이끈 사상가들의 선배이자 스승 역할을 한 ‘실학의 제 1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토지 개혁만이 부국강병 지름길”

1614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세상에 내놓아 ‘실학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 지봉 이수광(1563 ~1628), 대동법을 주창한 잠곡 김육(1580 ~1658), <동사(東史)>를 저술해 중화주의(中華主義) 역사관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역사의식을 제창한 미수 허목(1595 ~1682), 토지 및 체제 개혁에 대한 광범위한 견해를 담고 있는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저자 유형원(1622 ~1673), 주자학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변록(思辨錄)>과 농촌생활에 바탕을 둔 박물학서인 <색경(穡經)>의 저자 서계 박세당(1629 ~1703) 등은 ‘실학의 제 1 세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이다. 특히 이들 중 유형원은 17세기 조선 재야 지식계의 거물로, 이익과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파와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대를 개척한 대 사상가다.

17세기 조선 재야 지식계의 거물

유형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1622년(광해군 1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을 뒤흔든 양대 전란의 한복판에 자리한 그의 출생은 이미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하고 있었다. 유형원이 태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그의 아버지 유흠은 ‘유몽인(<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의 옥사(獄事)’에 연루돼 감옥에서 자결하고 만다. 두 살 때 고아가 된 유형원은 그 후 외숙부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학문을 익혔다. 이원진은 훗날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남인 실학파의 산실 역할을 한 성호 이익의 당숙이고, 김세렴은 중국 실정에 밝고 일본에도 사신으로 내왕한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의 영향 덕에 유형원은 어려서부터 유학의 경전과 제자백가서는 물론 역사, 지리, 병법, 법률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깊은 식견을 갖출 수 있었다.

유형원은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14세 때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원주→양평→여주 등지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와 양대 전란 이후 불어 닥친 조선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다. 유형원은 평생 진사(進士) 이상의 지위를 누리지 않았다. 진사라는 타이틀조차도 자신의 입신양명을 간절히 바라는 할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못해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해 마지못해 얻었을 뿐이다.

진사가 된 다음에는 출사(出仕)와 입신양명의 뜻을 완전히 접고, 전북 부안에 위치한 우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서적 1만여 권을 쌓아 놓고 당시 조선 사회를 구제할 혁신적인 방법과 체제 개혁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이, 유성룡, 조헌, 이수광, 한백겸, 김육 등 자신보다 이전 시대에 정치 및 사회 개혁을 주창한 대학자들의 견해를 상세하게 살폈다. 그의 나이 32세 때부터 시작된 이 연구는, 1670년 그의 나이 49세 때 <반계수록>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렇듯 유형원은 평생을 초야에 묻힌 채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깊은 학문과 세상을 보는 탁월한 식견에 관한 명성은 당시 중앙 정계의 거물 정치인들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의 영수(領袖)로 영의정까지 지낸 미수 허목은 유형원을 두고, 임금을 보좌해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재상의 재목이라면서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이 같은 인물이 있는 줄 몰랐다”고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유형원이 44세 되던 해(현종 6년)에는 조정의 정승들이 합의해 그를 벼슬자리에 추천한 일이 있었다. 그때 유형원은 “내가 재상들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재상들이 나를 안다고 하겠느냐?”면서 출사를 거절했다. 이처럼 유형원은 비록 몸은 시골 한 구석에 거처하고 있었지만 명성은 이미 조선팔도를 뒤흔든 당대 최고의 재야 지식인이었다.

유형원의 국가 개혁 및 미래 보고서

유형원은 김육(2006년 11월호 참조)과 동시대를 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육이 사망한 시기를 전후해 유형원은 조선 사회의 개혁 프로젝트 및 미래를 전망한 <반계수록>의 저술을 시작하고 있었다. 양대 전란을 치른 17세기 중반 조선 사회는 ‘격동의 시대’ 그 자체였다.

이앙법, 견종법 등 새로운 농법과 농사 기술의 발전은 단위당 토지 수확량을 증가시키고, 버려진 농지나 황무지에 대한 경작과 개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상업적 농업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농촌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농촌 사회의 변화는 광작(廣作)과 대토지 소유 현상을 불러왔는데, 이로 인해 양반 지주 계층은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한 반면 농민 계층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실제 경작자인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쫓겨나 양반 지주 계층의 소유인 토지를 빌려 다시 농사를 짓는 지주-소작제 혹은 지주-전호제는 농민들의 안정된 삶과 생활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군역(軍役)과 부세(賦稅) 또한 악화시키는 폐단을 낳았다. 더욱이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 중 살 곳을 찾지 못해 유랑민이나 도적 떼가 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아 커다란 사회 불안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김육은 ‘대동법’을 제창했다. 조정의 관료였던 만큼 그는 조세수취체제를 개혁하는 실현 가능한 방안을 내놓았던 셈이다.

반면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산 유형원은 보다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모든 사회경제적 위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토지 소유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토지의 소유 문제를 건드리지 않은 어떤 사회개혁안도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형원은 토지 소유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백성의 산업을 영원히 안정시킬 수 없고, 군역과 부세를 공평하게 할 수 없고, 호구와 백성의 숫자를 명확하게 할 수 없고, 군사를 정비할 수 없고, 분쟁과 갈등을 막을 수 없고, 형벌을 줄일 수 없고, 뇌물을 막을 수 없고, 풍속을 결코 다스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형원은 사회경제적 위기의 해결과 더 나아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는 길은 오로지 ‘토지 문제’를 해결하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가 전북 부안군 우반동에 거처한 이후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해 저술한 <반계수록> 역시 ‘토지 개혁’을 다룬 ‘전제(田制)’가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에는 양반 지주 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폐지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총체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유형원의 의지와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모든 문제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토지 개혁을 통해 ‘새로운 조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반계수록>에는 토지제도 개혁(田制: 전제) 이외에도 재정 및 상공업 개혁(田制後錄: 전제후록), 교육 개혁(敎選制: 교선제), 관료제 개혁(職官制: 직관제), 녹봉제 개혁(祿制: 녹제), 국방 개혁(兵制: 병제), 지방체제 개혁(郡縣制: 군현제) 등 국가 개혁 방안 및 미래 사회에 관한 총제적인 전망이 담겨 있다. 이곳에서 유형원은 토지 개혁을 통해 자신의 경작지를 소유한 자영농이 나라의 재정과 국방을 담당하는 부국강병한 조선의 미래를 그려 보였다. 토지 개혁으로 농민을 수탈하고 국가 재정을 좀먹는 양반 지주 계층을 근절시키고 자영농을 육성해 병농(兵農)을 일치시킨다면, 백성의 삶과 나라의 정치는 안정되고 왜란과 호란과 같은 외침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경제사상 01 토지공유제와 균전론

조선 초기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룬 과전법이나 세조 때 시행되어 1557년(명종 12년) 폐지된 직전법은 토지의 국가 소유를 원칙으로 한 공전제(公田制)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6세기 들어 무너지기 시작한 공전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란을 거치면서 양반 지주 계층의 토지 집중 및 독점과 지주-전호(소작) 관계에 기초한 사전(私田)의 확산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유형원은 이와 같은 사회구조적 변동이 낳은 17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을 “부자의 토지는 끝을 모를 정도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다. 부익부 빈익빈으로 말미암아 이익을 독차지한 세력들이 토지를 모조리 소유한 반면 백성들은 처자를 이끌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거나 머슴살이 신세가 되고 만다”고 표현했다.

유형원은 이처럼 양반 지주 계층의 대토지 소유와 백성들의 소작농으로의 전락이 나라 경제와 국방을 뒤흔드는 최대의 위협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고 실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토지 개혁만이 경제와 국방을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유형원의 토지 개혁론은 한 마디로 ‘토지공유제와 균전론’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반계수록> 첫 머리에 토지 개혁에 대한 유형원의 근본 구상이 나타나 있다. 그는 토지를 무제한 사적으로 소유하는 토지겸병(토지 집중 및 대토지 소유)이야말로 정치를 어지럽히고 경제를 파탄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았다.

“토지제도가 허물어지고 사적으로 무제한 토지를 겸병(兼倂)함에 따라 나라의 모든 폐단이 생겨났다. 아무리 훌륭한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토지제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라와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토지는 천하의 근본이다. 근본이 제대로 서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된다. 그러나 근본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정치의 기본 요체를 깨우치지 못하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하는 일의 이로움과 해로움 그리고 얻음과 잃음이 모두 토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반계수록> 서문(序文)

또한 유형원은 “공전(公田)은 공적이고 균등한 반면 사전(私田)은 사적이며 편중된다”고 보았다. 공전은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항상적으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 사전은 양반 지주만 살찌우고 백성들의 삶은 파탄으로 내몬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유형원이 주장한 공전이란 다름 아닌 양반 지주 계층의 토지겸병 폐지와 토지공유제의 실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양반 지주 계층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몰수해 국가에서 소유한 다음 다시 일정 규모의 면적으로 나누어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자는 것이다. 이때 나라에서 몰수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는 구체적인 기준과 방법을 정한 제도가 바로 ‘균전론(均田論)’이다.

유형원은 완전한 토지공유제에 기반을 둔 정전법(井田法)을 근간으로 한 농업경제체제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보았다. 정전법이란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한 다음 일정 규모의 토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 한 다음, 여덟 가구가 고루 나누어 경작해 생계를 유지하고 중앙의 나머지 부분만 공동 경작하여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한 토지제도다.

유형원은 이 제도가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이상을 가장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형원은 조선 사회가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로 유지되는 왕조 체제라는 현실 또한 외면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상적인 토지제도보다는 현실적인 경제 개혁을 통해서만 토지겸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이상적인 제도와 현실적인 고민의 한복판에 선 채, 유형원이 세상에 내던진 토지 개혁 방안이 바로 ‘균전론’이었다.

균전론은 정전법과 마찬가지로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는 토지공유제를 원칙으로 해 실시한다. 그런 다음 토지를 재분배하는데, 이때 유형원이 가장 우선시한 경제 정책은 ‘자영농민의 확산과 육성’이었다. 그는 양민이든 노비든 상관없이 농민은 최소한의 생계유지와 납세 및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토지를 균등하게 지급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최소한의 토지란 1호(戶)당 1경(頃) 곧 40마지기다. 그는 이 정도의 토지 면적을 가져야만 농민 한 가구가 자립해서 농사를 짓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유형원은 4경(頃)당 1명은 병사가 되고 나머지 3명은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주장했다. 유형원이 균전론을 통해 토지 개혁뿐만 아니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균전론은 근본적으로 경작자인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이 토지 개혁론은 사-농-공-상이라는 봉건적 계급 위계와 신분 질서의 울타리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유형원은 왕족에 대해서는 10~12경, 현직 관리에 대해서는 품계에 따라 6~12경,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유생)에 대해서는 2~4경, 상공인에게는 농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 무당과 승려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토지를 주지 않는다.

적지 않은 사회경제사가들은 신분과 계급에 따른 토지의 차등 분배를 두고 유형원 토지 개혁론의 한계를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과거 역사를 지나치게 꿰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시각에서 볼 때 유형원의 경제 개혁론은 개인의 무제한 토지 소유와 지배계층인 양반 지주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기와 모순을 뛰어넘고자 한 혁명적인 방안이었다. 또한 그것은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을 기반으로 해 국가 경제를 복원하고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혁신적인 미래 경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경제사상 02 국가가 통제하는 상공업 활동

유형원과 같은 중농주의 경제학파와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뚜렷한 차이는 세 가지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중상주의 경제학파가 상공업의 발전을 중요시했다면 중농주의 경제학파는 토지 문제(개혁)를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상주의 경제학파가 상업적 농업 경영을 중시했다면 중농주의 경제학파는 토지 분배와 자영농민의 확산 및 육성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중상주의 경제학파가 자유로운 상공업 발전과 해외통상을 주요하게 다룬 반면 중농주의 경제학파는 국가가 통제하는 상공업 활동을 더 중시했다는 사실이다.

유형원은 농업과 마찬가지로 상업과 공업 역시 사회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이 점에서는 조선 사회를 지배한 주류 성리학자들의 상업관, 즉 ‘농본상말(農本商末)’보다는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상공업은 농업을 보완할 뿐이지, 상공업을 생계로 삼는 백성이 많아 농업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더욱이 상인과 수공업자에게도 일정 면적의 토지를 지급해 반드시 농업과 상공업을 겸업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상공업을 농업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산업으로 보지 않았다. 상공업은 단지 농업 경제 시스템을 보조하는 영역일 뿐이다. 특히 유형원은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공업에 대한 국가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백성이 많으면 세금을 무겁해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세금을 가볍게 해 물화유통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백성들이 일정한 규모의 토지를 지급받아 경작하는 농업경제 시스템을 이상적인 형태로 여긴 유형원의 시각에서 볼 때 토지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곳저곳 떠돌며 장사를 하는 상인이나 그들이 모여드는 시장이 자유롭게 개설되는 상황이 탐탁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유형원은 상공업이 상품 소비와 유통을 활발하게 해 생산기술과 생산력을 발전시킨다고 보기보다는 사치와 욕망을 부추겨 농업경제를 지탱하는 근검절약과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향촌 사회의 근검절약과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주범으로 자유롭게 개설되는 장시(場市)를 꼽았다. 이곳으로 각지의 상인은 물론 온갖 무뢰배와 관아의 벼슬아치들까지 모여들어 제도를 어지럽히고 풍속을 파괴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렇듯 상인과 무뢰배들이 아무렇게나 개설하는 장시는 철폐하고, 그 대신 국가에서 통제하는 상설 시장을 각 군현과 역참(驛站)에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상인들을 등록해 세금을 걷는 한편 자금을 빌려주어 상설점포를 개설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17세기 들어 상품 유통과 상품 경제의 발달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사회 흐름이었다. 사회경제 현상과 그 변화 양상에 누구보다 밝았던 유형원 또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외면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이 근검절약과 미풍양속을 해치기도 하지만 제대로 통제하기만 한다면 농업경제체제의 발전에도 이롭다고 여겼던 듯하다. 다시 말해 농업을 보완하는 상공업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형원은 자신의 뒤를 이어 중농주의 경제학파를 계승한 성호 이익보다는 훨씬 더 ‘상업 친화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이익은 상업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농업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공업 활동을 인정하고 또한 자유로운 상공업 발전보다는 시장 개설이나 상공업을 국가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봉건적인 상공업관(商工業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이익 → 정약용 → 동학농민혁명

유형원이 <반계수록>에 남긴 사상은 18세기에 활동한 수많은 실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이익, 홍대용, 정약용은 직접적으로 유형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익은 조선이 개국한 이래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시무(時務)를 알았던 사람은 오직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두 사람뿐이라고 하면서 “율곡의 주장은 대부분 시행할 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왕정(王政)의 시초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홍대용 또한 이익처럼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책 가운데에는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경세유용지학(經世有用之學)이다”고 하면서, 이이와 유형원만이 진실로 ‘경세치용학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실제 유형원이 자신의 개혁 사상을 다듬을 때 가장 깊게 연구한 인물은 다름 아닌 율곡 이이였다. <반계수록>에서 유형원이 가장 많이 인용한 학설과 주장 또한 이이의 것이었다. 다산 정약용 역시 <반계수록>을 <고려사>, <서애집>, <징비록>, <성호사설>, <문헌통고>와 더불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았다. 정약용은 특별히 유형원이 뛰어난 식견과 경륜을 지녔음에도 산림 속에 묻혀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을 크게 한탄했다. 그 심경을 토로한 시(詩)가 <다산 시문집>에 실려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뜻이 진지하기로는

반계 유형원을 보았을 뿐이네

세상을 구할 큰 목표는 균전법(均田法)에 있었고

천만 개의 그물눈이 서로 통했네

정확하고 세밀한 생각으로 틈새를 기워가면서

뼈를 깎아 고치고 다듬고 가늠하려 애를 썼네

임금을 보좌할만한 찬란한 재목이었지만

산림(山林)에 묻힌 채 늙어 죽으니

남긴 글 세상에 가득하지만

백성에게 혜택을 끼친 공적 이루지 못해

비명에다 그 사적 새길 만한데

말년에 모진 비난 한 몸에 받고

자손까지 아울러 고난을 겪네

그럼, 유형원의 경제사상은 어떻게 후대에까지 계승되었을까? 유형원이 균전론을 통한 토지 개혁을 최초로 주창한 이후 이익과 정약용이 뒤를 좇아 각각 한전론(限田論)과 여전론(閭田論)을 주장하며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의 사상을 이어갔다.

이익의 한전론은 유형원의 균전론을 대부분 그대로 따랐다. 그는 일체의 매매 행위를 금지한 일정 면적의 토지 곧 영업전(永業田)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매매할 수 있도록 하되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토지 집중과 대토지 소유의 폐해를 없애자고 주장했다.

반면 정약용은 이익과 달리 유형원의 경제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먼저 그는 호구(戶口) 수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1년마다 이를 조사해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토지의 질과 비옥도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생각은 사실상 실현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자신이 주장한 여전론은 균전론이 지니고 있는 이 같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여전론은 여(閭)라고 하는 구역과 마을 단위를 획정한 후 이 여를 중심으로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공동 경작한 다음 노동량과 경작 기여도에 따라 각자의 분배 몫을 정해 나누는 토지 개혁이었다.

물론 유형원과 이익은 평생을 산림에 묻혀 지낸 재야 지식인이었고 정약용은 인생의 전성기를 유배지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사상과 정책이 구체적으로 입안되거나 실행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유형원이 개창하고 이익과 정약용이 뒤를 좇은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의 경제사상은 지주-전호(소작) 관계에 기초한 봉건사회를 타파하려는 농민들의 열망과 의지 탓에 실학파의 사상 중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19세기의 막바지에 농민의 힘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토지 개혁과 근대화’의 마지막 실험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이 대표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