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 마르코시안의 ‘샌타 바버라’ 표지. 사진 김진영
다이애나 마르코시안의 ‘샌타 바버라’ 표지. 사진 김진영

삶은 뜻하지 않게,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연유로 경로가 바뀌기도 한다.

러시아계 미국인 사진가 다이애나 마르코시안(Diana Markosian) 역시 그러했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주로 가족과 이민이라는 주제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하는 작가 다이애나 마르코시안의 ‘샌타 바버라(Santa Barbara)’는 1990년대 냉전 이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의 가족 서사를 담은 책이다.

당시 35세였던 작가의 어머니 스베틀라나는 7세였던 다이애나와 그의 남동생을 데리고 미국으로 향했다. 작가는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다. “내가 7세일 때, 우리 가족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는 나를 깨웠고 우리는 이제 여행을 갈 거라고 말했다. 그해는 1996년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지 시간이 꽤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우리 가족도 붕괴되고 말았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떠났고, 다음 날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다. 바로 미국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미국 샌타 바버라였다. 너무나 어린 시절,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미국 샌타 바버라로 옮겨진 작가의 미국에서의 새 삶은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시작되었고 새아버지도 생겼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퍼즐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성장했다.

다이애나는 그로부터 20여 년 후 미완성이던 퍼즐 조각들을 발견하게 됐다. 어머니는 다이애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국으로 가기 전 아버지와는 별거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 미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러시아의 에이전시를 통해 미국 지역 신문에 미국 정착을 도와줄 남자를 찾는 광고를 냈었다는 사실, 이 과정을 통해 만난 한 나이 많은 남자가 미국 정착을 도와주었고 이 남자가 새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 등을 말이다.

그렇다면 왜 샌타 바버라였을까. 1980년대에 샌타 바버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샌타 바버라’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는 러시아에서 최초로 방영된 미국 드라마이기도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이 드라마로 인해 이 지역을 알게 되었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 줄 장소로 샌타 바버라를 골랐던 것이다. 모스크바를 떠나 샌타 바버라에서 살게 된 것이 미국 드라마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니.


다이애나는 자신의 가족 서사를 기반으로 13분짜리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사진 김진영
다이애나는 자신의 가족 서사를 기반으로 13분짜리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사진 김진영
다이애나는 20년 전 가족을 연출해냈다. 사진은 새아버지와 어머니, 다이애나와 남동생을 재연한 연기자. 사진 김진영
다이애나는 20년 전 가족을 연출해냈다. 사진은 새아버지와 어머니, 다이애나와 남동생을 재연한 연기자. 사진 김진영

다이애나는 자신의 삶을, 그것도 어린 시절의 뿌연 기억부터 다시 들여다보며 해야 하는 작업을 연출 사진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기로 한다. 가족을 연기하는 데 딱 맞는 배우들을 모두 모으는 데 1년 반이 걸렸고, 어머니 스베틀라나 역할을 찾기 위해 384명이 오디션을 봤다.

어머니 역할에 캐스팅된 배우 아나 임나드제(Ana Imnadze)와 함께 작업하면서 작가는 다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단순히 어머니를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희생을 했는지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을 자신이 찾고 있었다는 것을.

다이애나가 배우에게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고 이런 방식으로 옷을 입어 달라고 했을 때, 배우는 종종 이런 의견을 펼쳤다. “스베틀라나는 절대 그렇게 안 했을 거예요.” 잘 생각해보면 어쩌면 딸인 다이애나보다 어머니에 대해 깊이 탐구한 배우가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는 것을 작가는 인정하게 됐다.

가족 구성원 각각을 깊이 이해하며 연기하는 배우들, 옛날 사진을 참고해 모스크바의 아파트나 LA 공항 등을 섬세하게 재현한 세트, 어깨 패드나 배기 청바지 등 1990년대 느낌을 내는 의상들, 군데군데 삽입된 오래된 필름 카메라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 등. 이 책은 분명 연출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실제 상황을 촬영한 장면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하지만 책에는 이것이 마치 드라마처럼 가공된 장면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요소들도 함께 담겨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세트장에서의 촬영 모습이나, 오디션 중인 배우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또 다이애나는 드라마 ‘샌타 바버라’를 집필한 작가 중 한 명인 린다 마일스(Lynda Myles)에게 자신의 가족 서사를 대본으로 써줄 것을 요청했다. 책은 모스크바를 떠나던 날, LA 공항에 도착한 날,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결혼식 날, 새아버지가 가족을 떠나버린 날 등을 장면별로 대본을 수록해, 전체적인 이야기를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다이애나는 이 대본을 기반으로 13분짜리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어린 시절 삶의 큰 변화 그리고 깊이 이해해 본 적 없었던 어머니의 삶을 작가는 샌타 바버라 작업을 통해 재사유한다. 그리고 비로소 어머니의 용기 있는 결정과 미국인이 되기 위해 감행한 큰 희생이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의 삶을 나아가게 만들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어머니와도 긴밀히 협력해 진행된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미완성이던 퍼즐을 비로소 맞추게 된 셈이다.

어머니가 했던 인생의 큰 선택과 희생을 돌아보며, 어머니를 비로소 더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다이애나. 그것은 어쩌면 평생 딸과 어머니의 관계에서 바라본 모습이 아니라, 한 명의 여성으로서 마주하게 된 어머니의 모습이지 않을까.

작가는 말한다. “이 책의 이미지들은 내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어머니에 대해 알고 어머니를 사랑하기 위해 떠난 여정의 부산물들이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