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방향으로 강진만 생태공원, 다산초당, 월출산 다원. 사진 최갑수
시계 방향으로 강진만 생태공원, 다산초당, 월출산 다원. 사진 최갑수

강진 땅에 들어섰다. 벼가 쑥쑥 자라는 들판이 넓게 펼쳐졌다. 들판이 끝나자 갯벌이 이어졌다. 갯벌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잔잔했다. 바다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순했다. 강진의 들판과 바다 앞에서 마른 오이처럼 오그라들었던 마음은 반듯하게 펴졌고 날카롭게 날이 섰던 정신도 한결 누그러졌다.

다산초당부터 찾았다. 전라남도 강진 하면 다산 정약용이 먼저 떠오른다. 경기 남양주 출신인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강진으로 유배를 와 18년을 살았다. 1801~18년,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유배지에 홀로 남겨진 그를 찾아온 건 외로움이었다. 물도, 바람도, 기후도 낯선 먼 마을. 서울에서 귀양 온 ‘폐족’을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다산은 “7년 동안 유배지에 낙척(落拓⋅어렵거나 불행한 환경에 빠짐)하여 문을 닫아걸고 지내다 보니 노비들조차 나와는 함께 서서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는다”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가 얼마나 외롭고 먹먹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그는 공부에 매달렸고 유배 생활 동안 600여 권의 저서를 쏟아낸다. ‘보이는 것은 하늘 빛깔 뿐이고, 밤새도록 들리는 것이라고는 벌레 울음소리뿐’인 외로움을 안고 다산은 다수의 저서와 ‘목민심서’ 등을 펴냈다. 모두 정약용의 역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개인에게는 불행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지만 이 땅의 학계에는 축복의 시간에 다름 아니었다. 어쩌면 다산의 위대함은 그가 남긴 수백 권의 저서나 그의 학문이 갖춘 위엄 이전에, 유배라는 고립된 환경과 18년이라는 미지의 시간을 버텨낸 그의 의지에서 먼저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산은 강진에 처음 유배 와 4년 동안은 강진읍성 동문 밖 주막집 바깥채 사의재((四宜齋)에 머문다. 사의재는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이 올바른 이가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그는 주막집에서 일하던 표씨 부인과 인연을 맺고 홍림이라는 딸까지 낳게 된다. 그러다 그를 곤궁히 여긴 해남 윤씨 일가가 초당을 지어주어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그것이 다산초당이다. 다산은 거처를 옮기며 ‘이제야 생각할 겨를을 얻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다산초당 가는 길은 기분 좋은 숲길이다. 대숲이 울창하다. 숲에서는 맑은 바람 소리가 흘러나온다. 대숲을 지나면 다산초당이다. 다산이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와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 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사람들은 다산초당을 휘휘 돌아보고 다시 내려가지만,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은 놓치기 아까운 코스다. 600m는 오르막길, 200m는 내리막길. 하지만 올라가는 길도 험하지 않아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도 30~40분이면 백련사에 닿는다.

오솔길의 풍광만으로도 산길을 올라온 값을 하지만, 이 길의 유래를 알면 감흥은 한층 더 깊어진다. 다산은 유배지인 강진에서 당대의 학승 혜장선사와 교류를 나누었다. 혜장선사가 해남 대흥사의 말사인 백련사에 머물 때 다산은 그에게서 다도를 배우고 심취했다.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을 찾아 담론을 벌이고 차를 마시기 위해 오갔던 길이 바로 이 오솔길이다. 아마도 다산에게는 백련사와 이 오솔길이 있어 강진이 척박한 유배지만은 아니었으리라.


우리가 몰랐던 ‘비밀의 정원’

강진의 울창한 여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성전면 월하리에 자리한 백운동원림이다. 조선 중기 선비 이담로가 지은 별서정원이다. 조선 시대 원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백운동원림으로 가는 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길은 어느새 어둑해진다. 울창한 대숲이 바람 소리를 음악처럼 들려준다. 바닥에는 동백나무의 뿌리가 함부로 얽히고설켰다. 세상에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어느새 환해지며 나타나는 정원.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풍경 앞에서 불현듯 마음이 환해진다.

전설처럼 잊혔던 백운동원림을 복원하게 한 것은 다산이 시를 짓고 초의선사가 그림을 그려 만든 ‘백운첩’이다. 1812년 어느 날, 강진에서 유배 생활 중이던 정약용이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 등반을 한 후 이곳으로 와 하룻밤 머물게 된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한 그는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12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시로 썼다. 이를 합첩, 제본해 만든 것이 바로 백운첩이다.

이 시화첩이 발견된 덕분에 하마터면 기억 너머로 사라질 뻔했던 백운동정원이 옛 풍광을 되찾게 된 것이다. 원림 뒤편에 자리한 정선대에 오르면 백운 12경 중 제1경인 월출산 옥판봉과 함께 정원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운동 정원 뒤편은 차(茶) 밭이 펼쳐진다. 월출산 주변은 원래 차의 명산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영암의 월출산을 비롯해 나주, 강진, 무안, 함평 등에는 작설차가 산출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진의 차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곳은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이다. 이한영(1868~1956)은 1890년대부터 이 땅 최초의 차 브랜드인 백운옥판차를 출시한 전설의 차인이다. 백운옥판차는 월출산 아래 백운동 옥판봉에서 난 야생 찻잎으로 만든 차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한영의 고손녀인 ‘이한영 차문화원’의 이현정 원장이 백운옥판차를 다시 만들고 있다.


▒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여행수첩

먹거리 여름철 강진의 별미는 회춘탕이다. 엄나무와 뽕나무, 당귀, 가시오가피, 헛개나무, 황칠나무 등 20여 가지 약재를 진하게 우려낸 국물에 문어와 닭, 전복을 넣고 다시 한 번 푹 끓여낸다. 진한 국물은 혀에 착 감기는 감칠맛과 깊은 맛이 일품이다. 강진 읍내에 자리한 은행나무식당이 유명하다. 12만원짜리 대(大)자를 시키면 어른 넷이서 넉넉하게 먹는다. 땀 흘리며 한 그릇 먹고 나면 이름 그대로 젊어지는 것 같다. 강진 읍내에 복원된 사의재 안에 동문주막이 있다. 이곳에서 다산 선생이 즐겨 먹었다는 아욱국을 맛볼 수 있다. 된장을 풀고 아욱을 푸짐하게 넣고 끓여낸다. 병영면에 가면 ‘돼지불고기거리’가 조성돼 있다. 설성식당이 유명하다. 홍어와 편육 등 반찬 십여 가지가 함께 오른다. 주문하면 상째로 들고 온다. 전라도에서는 한정식 하면 ‘서강진 동순천’이라는 말이 있다. 강진 한정식은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져 나오는 수준을 넘어 접시가 2층, 3층으로 쌓인다. 시민운동장 앞에 있는 청자골종가집이 유명하다.

강진의 바다와 섬 강진만생태공원은 전라남도의 3대강 중 하나인 탐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20여만 평 갈대군락지가 펼쳐진다. 남해안 최고의 생태서식지로 데크로 이뤄진 탐방로를 따라 습지에 사는 다양한 생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강진만은 모두 8개의 섬을 품고 있는데 이 가운데 유일하게 가우도에 사람이 산다. 가우도란 이름은 섬의 생김새가 소(牛)의 멍에에 해당한다고 해 부르게 됐다고 한다. 지난 2011년 대구면 저두 선착장에서 가우도까지 438m의 다리가 놓였고 이듬해에는 섬 반대편 가우마을에서 망호마을까지 이어지는 716m짜리 출렁다리가 놓였다. 두 다리 모두 보행자 전용 다리다. 다리가 놓이면서 섬을 따라 걸을 수 있는 ‘함께해(海)길’이 만들어졌다. 나무데크가 깔린 생태탐방로다. 바다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