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와인 메이커 세실 박. 2, 3 포도밭과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세실 박. 사진 신동와인
1 와인 메이커 세실 박. 2, 3 포도밭과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세실 박. 사진 신동와인

“어? 한국어네?” 

세실 박(Cecil Park)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세실 박은 한국인 최초의 나파 밸리 와인 메이커다. 

마침 방한한 그를 만나기 며칠 전 그가 설립한 이노바투스(Innovatus) 와이너리의 웹사이트에 접속했었다. 와인에 대한 설명은 모두 영어였지만, 그는 당당히 우리말로 인터뷰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16년째 와인을 만들고 있는 그가 영어를 못할 리는 없을 터. 왜 한국어로 인터뷰했는지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한국인이니까요.”

 

파스타와 이노바투스 비오니에. 사진 김상미
파스타와 이노바투스 비오니에. 사진 김상미

라틴어 ‘혁신’ 뜻하는 이노바투스 탄생

세실 박은 93학번이다. 연세대학교 생명공학과를 졸업한 그의 첫 직장은 동서식품이었다.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며 담당한 제품은 프리마. 마케팅까지 넘나드는 일을 하다 보니 그는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런데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MBA를 준비하며 잠시 호텔 매니저로 일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와인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그는 목표를 와인메이커로 바꾸고 2007년 와인 랩(Wine Lab)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곳에서 나파 밸리와 소노마 카운티의 80여 개 포도밭을 운영했고 2012년에는 UC 데이비스에 진학해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공부했다. 세실 박이 이노바투스를 설립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4년이다. 이노바투스란 라틴어로 ‘혁신’이라는 뜻. 나파 밸리를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만들어낸 이민자들의 열정을 기리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세실 박 자신도 도전과 노력으로 나파 밸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혁신을 이끄는 이민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건강한 자연이 주는 맛의 다양한 매력

비가 제법 많이 오던 날 서울 모처에서 세실 박을 만났다. 한국에 수입되고 있는 비오니에(Viognier), 피노 누아(Pinot Noir),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퀴베(Cuvee)를 그와 함께 시음했다. 와인을 하나씩 맛볼 때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와인마다 신선함이 돋보였고 부드러운 질감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나파 밸리 특유의 무겁고 진한 스타일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의 와인 철학이 궁금했다.

“평가와 점수에 연연하기보다 테루아(terroir·포도 재배 환경)에 충실한 와인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건강한 자연이 내어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면 아침에 마셔도 좋고 자기 전에도 마실 수 있는, 언제 마셔도 기분이 좋아지는 와인이 된다고 믿는다.” 자신이 만든 와인처럼 그의 답변은 신선했다.

첫 번째로 맛본 비오니에는 질감이 매끈하고 과일 향이 매혹적인 화이트 와인이었다. 복숭아와 리치 등 감미로운 과일 향이 입안을 한가득 채우더니 여운에서도 길게 이어졌다. 비결을 물으니 완숙된 비오니에를 13℃의 낮은 온도로 발효해 아로마의 섬세함을 최대한 살렸다고 한다. 와인의 향이 워낙 풍성해 풍미가 강한 음식과 잘 맞을 스타일이었다. 시음하며 곁들인 마늘과 조개 파스타와도 궁합이 좋았지만, 비빔밥이나 김치전과 즐겨도 좋을 듯했다. 이어서 맛본 피노 누아에는 딸기와 라즈베리 등 싱싱한 과즙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나파 밸리의 찬란한 햇빛을 한껏 머금은 피노 누아가 곧장 와인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경쾌한 신맛과 향신료의 은근한 매콤함이 입맛을 돋웠다. 잘 익은 피노 누아만 골라 부드럽게 으깨고 숙성시킬 때도 와인에 오크 향이 지나치게 배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는 것이 세실 박의 설명이었다. 마침 주문한 닭 요리가 나와 와인 맛이 한층 살아났다. 음식의 양념과 와인의 과일 향이 맛깔스러운 조화를 이뤘고, 육질과 와인의 질감도 잘 어울렸다.

한편 카베르네 소비뇽은 남다른 개성을 뽐냈다. 갖가지 농익은 베리를 고운 보자기로 감싼 듯 촘촘한 타닌이 달콤한 과일 향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었다.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의 전형적인 묵직함과는 확실히 다른 맛이었다. 보디감이 적당하고 아로마에서는 싱그러움이 넘쳤다. 평소 레드 와인의 떫은맛이 부담스러웠다면 이노바투스 카베르네 소비뇽을 마셔보기 바란다. 깊고 포근한 매력에 바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퀴베는 이노바투스 와인 중 가장 독특하다. 웬만해선 잘 섞지 않는 시라와 피노 누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인한 시라와 섬세한 피노 누아가 서로 어울리게 만드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실 박의 블렌딩 실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크랜베리, 석류, 자두, 블랙베리 등 다채로운 과일 향이 아로마를 풍성하게 장식하고 정향과 후추의 매콤함이 복합미를 더했다. 묵직하고 부드러운 질감도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을 듯했다. 세실 박도 퀴베가 한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이라고 자평했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면 필자도 매콤한 두루치기에 퀴베 한잔할 생각이다.


와인과 뜨거운 연애 중인 세실 박 

세실 박에게 와인은 과연 어떤 존재일지 궁금했다. “내게 와인은 제2의 부모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준 것도 경제와 문화를 가르쳐준 것도 와인이니까. 그렇다고 와인이 마냥 예쁘기만 한 건 아니다. 미울 때도 많다. 와인이 뜻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정말 답답하고 울화통 터진다. 그런데 참 묘하다. 참고 기다리면 와인이 돌아오기도 하고 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좋은 와인이 되기도 한다.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존재인 것 같다.”

애증이 교차하는 걸 보니 세실 박은 분명 와인과 뜨거운 연애 중이다. 성공한 와인 메이커인 그는 와인 컨설턴트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국의 전통 농법을 와인에 도입해 볼 생각이다. 깻묵이나 한약재를 활용하면 더 건강한 포도를 생산할 수 있고 더 맛있는 와인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나파 밸리에서 쌓은 실력으로 한국 와인의 발전에도 기여하고 싶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그는 역시 한국인이었다. 그의 와인이 남다른 것은 뛰어난 재능과 실력에 더해 한국인의 마음이 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와인 이노바투스는 오늘도 나파 밸리에서 또 하나의 큰 획을 긋고 있다.


▒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