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오른쪽·주윤발 분)와 송자호(적룡 분)는 ‘영웅본색’에서 사나이들의 뜨거운 우정을 보여준다. 사진 IMDb
소마(오른쪽·주윤발 분)와 송자호(적룡 분)는 ‘영웅본색’에서 사나이들의 뜨거운 우정을 보여준다. 사진 IMDb

홍콩 영화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비디오 가게마다 주윤발, 장국영, 양조위, 유덕화 등 남자 배우들의 비장한 표정을 앞세운 영화 포스터와 테이프들이 가득했다.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슬로 모션으로 쌍권총을 난사하는 장면들, 범죄 조직과 폭력 세계를 배경으로 도덕적 로망을 그려낸 홍콩 누아르의 본격 시작이 ‘영웅본색’이다.

위조지폐를 제조, 유통하는 암흑가의 보스 송자호에겐 이제 막 경찰이 된 동생 송아걸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고 자랑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둠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신과 달리 동생은 세상의 양지에서 떳떳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아버지가 아걸의 앞날을 위해 조직의 일을 그만두라고 당부하자 자호는 진행하고 있는 일을 끝으로 손을 털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마지막 거래를 위해 대만 출장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곳 조직원의 배신으로 위조지폐 거래 현장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혼자 모든 걸 책임지고 이를 계기로 조직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그는 함께 데려갔던 막내 조직원 아성을 무사히 도주시킨 뒤 경찰에 체포된다.

대만에서 3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홍콩으로 돌아온 자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악의 세계와 한번 손잡았던 사람을 세상은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걸은 그사이 아버지가 암살당한 것도, 자신이 경찰조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형 때문이라며 마음 깊이 원망한다. “나는 경찰이고 형은 깡패야. 우린 가는 길이 달라.” 동생은 매몰차게 형을 밀쳐낸다.

언젠가는 진심을 알아주리라, 보스의 삶을 버리고 택시 기사로 성실하게 일하던 자호는 한없이 충성스럽던 조직의 후배, 소마를 만나고 놀란다. 위조지폐에 불을 붙여 폼나게 담배를 피우던 녀석, 세상을 조롱하듯 성냥개비를 씹으며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소마는 초라한 행색으로 다리를 절며 새로운 보스의 차를 닦아주고, 그가 던져주는 지폐 쪼가리를 주워 연명하고 있었다.

자호가 체포됐다는 사실을 알고 대만의 배신자를 찾아내 처절하게 응징했던 소마였다. 그때 총을 맞고 다리 한쪽을 잃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누굴 원망한 적도 없었다. 다만 보스가 돌아오면 예전의 힘과 자리를 되찾게 되리라, 그날만을 기다리며 굴욕을 견디고 있었다.

자호가 없는 조직을 장악한 것은 그가 대만에서 살려 보낸 아성이었다. 그 사건은 사실, 순진하고 나약하게만 보였던 아성이 보스가 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다. 자호의 아버지에게 킬러를 보낸 것도 그였다. 아성은 자호의 모든 걸 빼앗고도 뻔뻔하게, 그를 다시 조직에 끌어들여 수하로 부리려 한다. 소마와 아걸을 인질 삼아 파렴치한 협박도 불사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신뢰를 지키는 것이 의리다. 믿음을 저버리고 이익을 따르는 자를 세상은 기회주의자 또는 비열한 배신자라 부른다. 타인과의 약속뿐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도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불의한 세계로 돌아갈 것인가, 목숨을 걸고라도 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을 지켜낼 것인가? 세상은 자호를 끊임없이 선택의 갈림길에 세운다.

아성이 자호를 궁지로 몰아가는 동안, 대만 경찰은 복수극을 벌인 소마를 추적, 홍콩 경찰에게 그의 신병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아걸도 형의 손목에 직접 수갑을 채워서라도 형사로서 실력을 인정받겠다며 이를 악문다.

핏줄이 이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사방에서 숨통을 조여오는데도 다시는 악의 세계에 발 담그지 않겠다는 자호를 위해 소마는 죽을 고비를 넘으며 위조지폐 제조의 증거가 담긴 녹화 테이프를 입수한다. 자호가 아걸에게 전해준다면 아성을 무너뜨리는 물증이 될 것이고, 아걸이 경찰에서 명실공히 인정받는 계기도 될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아걸도 형을 용서하리라, 소마는 바란 것이다.

한편, 자호는 자신을 대신해 복수하다 다리를 잃고 인생의 밑바닥으로 더 깊이 추락한 소마에게 깊은 신뢰와 책임을 느낀다. 그는 아걸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소마에게도 새 삶을 줄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 검은 것도 하얗게 바꿀 수 있다’며 끝까지 교활함을 발휘하는 아성 또한 자호를 위험에 빠뜨릴 마지막 그물을 던진다.


홍콩 반환 불안감 반영된 작품

1984년, 영국과 중국은 홍콩반환협정을 체결했다. 그 뒤에 나온 많은 홍콩 영화는 1997년에 실행된 반환 후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담고 있다. 대만 형사로 카메오 출연한  오우삼 감독이 1986년에 개봉한 ‘영웅본색’은 그러한 걱정을 가장 먼저 내면화한 영화다.

폭력과 범죄의 미화란 오명과 악영향을 감수하면서도 칼도, 활도, 총도 사라진 일상 에서 극단적인 사회적 혼란과 불안, 인간관계의 대립을 그리기에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는 깡패조직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또 있을까.

“강호의 도의는 사라진 지 오래,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신의를 지키는 친구는 존중하되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대사를 폭력배의 입을 빌려 말하고 화폐 위조범들이 그 도의를 실행하게 하는 건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그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고 무릎 꿇지 않겠다는 홍콩인의 자긍심, 더 나아가 인간의 자존심을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영웅본색’이 말하는 ‘영웅의 진짜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위인이 아니다. 고난 후 엄청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사람도, 괴물을 무찌른 용감한 기사나 악당을 해치운 무림의 고수도, 나라를 구한 훌륭한 장군도 아니다. 소마는 보통 사람들 안에 잠자고 있는 영웅을 깨우려는 듯 고집스럽게 형을 미워하는 동생에게 소리친다.

“형은 새 삶을 살 용기가 있는데 너는 왜 형을 용서할 용기가 없는 거야?”

한때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늦게라도 새 삶을 살겠다며 역경을 이겨낸 사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주는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실수와 잘못을 후회할 용기, 배신하지 않을 용기, 새로운 내일을 시작할 용기, 끝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 또한 영웅의 마음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