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최는 ‘외국인 학생’ ‘미국 여자’ ‘요주의 인물’ ‘마이 에듀케이션’ ‘신뢰 연습’ 다섯 작품으로 미국 문단을 매혹시켰다. 사진 수전 최
수전 최는 ‘외국인 학생’ ‘미국 여자’ ‘요주의 인물’ ‘마이 에듀케이션’ ‘신뢰 연습’ 다섯 작품으로 미국 문단을 매혹시켰다. 사진 수전 최

“다들 적응에 실패해봤거나, 비참할 만치 만족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구원을 바라며 창작에 매달렸다. 이상하고도 적절한 혼돈과 트라우마가 여름의 끝을 예고했다.” (수전 최의 소설 ‘신뢰 연습’ 중에서)

미국 대통령이 하루에도 몇 개씩 맹렬하게 스릴러 소설을 쏟아냈던 지난 몇 년간, 권위는 해체되고 팩트는 날조되고, 신뢰는 밑바닥의 진흙탕 게임이 되었다. 한마디로 모두가 소설을 쓰게 된 이 마당에, 정통 소설가들은 무엇을 쓸까? 한인 2세 소설가 수전 최의 ‘신뢰 연습’을 읽었다. 수전 최는 2019년 말 이 작품으로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계 아버지와 유대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창은 인디애나주립대 수학 교수였고, 작고한 할아버지 최재서(1908~64)는 셰익스피어 권위자로 영문학자였다.

수전 최의 소설 ‘신뢰 연습’은 1980년대 미국 남부 도시에 있는 공연예술 특목고에서 시작된다. 연기자를 꿈꾸는 사춘기 청소년들이 예술 학교에 입학해 브로드웨이 출신인 카리스마 넘치는 교사 킹슬리의 지도를 받는다. 그가 진행하는 수업이 신뢰 연습이다. 감정과 신체를 완전히 내어 맡기는 신뢰 연습이라는 미명하에, 성적인 열기와 충동성이 가득한 이 사춘기 교실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수전 최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양식을 비틀어서, 종종 사건을 자기중심적으로 윤색해버리는 인간의 독선과 편협을 풍자했다. 그 과정에서 현대 사회의 주요 이슈인 위력에 의한 성관계, 동의와 강간 사이의 복잡함, 교사와 학생의 역학 관계, 여성의 분노 등의 교차 지점을 치밀하고 수려하게 펼쳐낸다.

바느질 자국이 없는 천의무봉의 소설이라기보다, 오히려 바늘땀을 유려하게 드러내고, 겉과 속을 뒤집어 해체하고 재조립한 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옷 같은 소설이다. 이야기의 안과 밖을 이어 붙이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라는 거친 솔기를 대담하게 노출한 이 소설은 현대라는 몸에 꼭 맞는다.

비범한 문장으로 미국 현대 소설의 정점에 서 있는 작가 수전 최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예일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코넬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카페테리아 직원, 경비원, 그림 모델 등을 거쳐 문학성 강한 잡지 ‘뉴요커’에서 팩트체커로 일했다. 예일대에서 문학 창작을 가르치며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최창)를 모델로 쓴 데뷔작인 ‘외국인 학생(1998년)’으로 아시안아메리칸 문학상을 받았고, 언론 재벌 허스트의 딸 납치 사건을 소재로 소설 ‘미국 여자’와 ‘요주의 인물’로는 퓰리처상과 펜포크너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뉴욕타임스가 성적 합의에 대해 고찰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한 수전 최의 ‘신뢰 연습’. 사진 왼쪽주머니
뉴욕타임스가 성적 합의에 대해 고찰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한 수전 최의 ‘신뢰 연습’. 사진 왼쪽주머니

출간하는 소설마다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유려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는 비결이 궁금하다.
“굳이 한 가지 말하자면 나는 나를 위해 쓴다.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게 중요하다. 독자들과 비평가들, 출판인들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한 채.”

스스로 열정을 느끼는 이야기, 시간을 쏟는 이야기를 쓰는 게 왜 중요한가.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이들 또한 그 이야기에 시간을 들일 만하다고 여길 가능성이 크다. 모순되게 들리겠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게 진리다. 독자나 비평가 눈치 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쓰는 이야기가 독자와 연결되는 최고의 방법이다.”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던 소설 ‘미국 여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자신의 문장을 스크린에서 만나본 소감은 어땠나.
“세미 첼라스 감독이 그 책을 영화 ‘아메리칸 우먼’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매우 흡인력이 있었고 나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빨아들이듯 음미했다. 소설가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새롭게 경험되고, 집필했던 과정이 동시에 기억났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최근 한국에 출간된 전미도서상 수상작 ‘신뢰 연습’은 매우 신비롭고 대담한 구조를 띤 소설이다. 동시대의 문제의식을 사춘기 예술 고등학교라는 흥분된 환경에 담아 비선형적인 바느질로 마무리했다. 계획에 있던 실험인가.
“전혀 계획에 없었다. 구조는 스스로 진화했다. 원래 쓰려고 했던 책도 아니다. 나는 전혀 다른 책, 사실은 내 할아버지(영문학자 최재서)에게 영감받은 책을 집필 중이었다. 그 책을 쓰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고 압박감이 심해서 쉼표 같은 느낌으로 쓴 책이 ‘신뢰 연습’이다. 누가 읽을 거라고 가정하지 않았기에 자유롭게 썼고, 바로 그 자유 덕에 이 소설의 비전통적인 구조가 생겨났다.”

총 3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신뢰 연습’은 연극 학교를 배경으로 성적 합의와 서사의 신뢰 문제를 다룬다. 각 장의 주인공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미묘하게 꼬이고 연결되어 있고, 수전 최는 화자의 교체를 통해 몇 차례 우아하게 독자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누가 신뢰할 수 있는 화자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신뢰 연습은 눈을 가린 채로 뒤로 자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받아주는 등 연극 전공 학생들의 훈련법이다. 팀워크 강화를 돕는 회사 워크숍에서도 한다. 그런데 쓰면서 결국 책 자체의 유기적 메커니즘, 즉 이야기와 독자 사이의 신뢰를 다루는 일, 등장인물이 팩트를 대하는 방식 등 여러 층위로 자유자재로 확장됐다.”

1980년대 미국 십대 청소년의 모습이 성적으로 관계적으로 굉장한 밀도를 지니고 있어서 폭발 직전의 씨앗 같았다. 십대에 완전히 빙의된 듯하다.
“십대는 인생 초기 자기의 모습이다. 아동기를 떠나서 남은 생애 동안 살아갈 모습이 되어가는, 과도기에 놓인 나 자신이다. 내 십대 시절과 초기의 관계들의 강렬함을 본능적으로 기억해냈다. 쓰는 동안 마치 내가 ‘십대’라는 다른 종의 인간이라도 된 듯 완전히 몰입했다.”

소설에서 캐런은 킹슬리 선생의 신뢰 연습이 ‘일종의 포르노’였다고 회상했다. “킹슬리 선생과 하는 작업은 대부분 해방이라는 이름의 통제였다”라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뢰 관계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교사가 소설 속에서는 일종의 포식자로 드러난다. 그렇게 설정한 이유는.
“교사와 학생 간 관계는 문화적으로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 흥미롭다. 오랫동안 학생이기도 했고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아버지 또한 교수였고 학자 집안이다. 그 관계의 본질 자체가 매우 복잡해서 계속 문학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당신이 소설에서 다루는 주제 자체가 지금 이 세계의 예민한 이슈다. 교사와 학생의 역학 관계, 성적 동의, 여성의 목소리 등등. 특히 미국과 한국은 최근까지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열기로 뜨거웠다. 여성 작가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나.
“성차별 같은 특정한 억압의 구조는 우리 문화에 교묘하고 지배적인 방식으로 녹아들어 있다. 우발적인 사건으로 그런 차별이 들춰질수록 우리의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늘 어떤 상황에 내재한 신비에 관해 파고든다는 것이다. 쓰면서 그 미스터리에 대해 어떤 통찰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하면서.”

요즘 한국 문단은 정세랑, 김숨 등 여성 작가들의 약진이 눈부시다. 여전히 독자들은 논픽션(비소설)과 에세이를 선호하지만. 미국 출판계는 어떤가.
“미국에서도 논픽션이 소설보다 많이 팔리는 추세다. 그러나 미국은 소설 분야도 아주 잘해나가고 있다. 소설이 힘을 내는 건 확실히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책들이 증가하는 것과 관련 있다.”

혹시 한국계, 유대계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느낀 적이 있나.
“내가 경계인인지는 모르겠다. 내 정체성에 양면성이 있고, 나는 그 양쪽의 유대 관계를 이해하는 데 평생의 시간을 쓰고 있다. 정체성에 얽힌 이야기가 내 일생의 과업이다.”

예일대에서 문학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에게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가르치나.
“독서! 좋은 글을 쓰려면 쓰는 것 이상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학생들이 폭넓게, 주의 깊게, 호기심을 가지고 읽는다면, 글 쓰는 것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우게 될 거다. 이건 진실이다!”

글을 쓸 때 특별히 조심하는 부분이 있다면.
“특정 단어를 너무 자주 쓰는 걸 발견할 때마다 멈추려고 노력한다.”

‘뉴요커’ 에서 팩트체커로 일한 경력이 소설 창작에 도움을 주었나.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기자는 아니었지만 기자들과 일하면서 기사(이야기) 하나를 조사하는 그들의 성실하고 정밀한 과정에 경의를 갖게 되었다. 실화든 소설이든 하나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을 갖는 것인지 체감했다. 모든 이야기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상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뉴요커’를 통해 기사로 소개될 각각의 이야기, 그 안의 사실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을 배운 경험에 감사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세계는 그런 팩트체크조차 신뢰도를 의심받고 있다. 당신이 느끼기에 현재 미국 사회의 신뢰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미국 역사를 통틀어 신뢰 부족 상태가 가장 심각했던 특정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미디어, 정부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 결핍 등등. 현재 미국 사회의 신뢰 부족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국가의 대처도 신뢰도에 도전을 받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대통령은 물론 지역 보건국 수장조차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는 것을 신뢰하지 않고, 소셜미디어(SNS)의 지인들의 말만(그들이 어디서 정보를 얻든) 선택적으로 믿는다. 전체적으로 신뢰의 수준이 이토록 낮은 상태에서 산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당신이 가장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이 세계의 흐름은.
“당장 사라져야 할 끔찍한 부조리는 인종 차별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로 준비 중인 차기작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오, 이런. 그 책에 대해서는 제발 몇 년 후에 물어봐 달라.”

마지막으로 많은 창작자가 느끼는 글을 쓸 때의 불안을 당신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나.
“글은 쓰지 않을 때 불안하다. 안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 눈덩이처럼 커진다. 일단 앉아서 쓰면 불안은 사라진다. 구체적인 글쓰기에 몰두하게 되니까. 글감이 플롯이 좋은지 아닌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나중 문제다. 일단 어떻게든 완성해내는 게 중요하다.”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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