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카이 포도밭의 전경. 사진 그로프 데겐펠트
토카이 포도밭의 전경. 사진 그로프 데겐펠트

동유럽 와인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20세기 후반 동유럽 나라들이 소비에트 연방에 복속되자 그들의 와인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공산주의 정권은 와인의 질보다 양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민주화가 진행되자 와인 산업도 전환점을 맞이했다. 서유럽 자본가들이 동유럽 와인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와인 산지 가운데 그들이 가장 먼저 돈을 싸 들고 찾아간 곳은 헝가리의 토카이(Tokaj) 지역이었다. 토카이 와인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들이 그토록 빠른 행보를 보인 것일까? 진하고 향긋한 토카이의 세계로 떠나보자.

토카이 와인은 헝가리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카이 지역은 헝가리 북동부에 있다. 기록상으로 토카이는 13세기 문헌에 처음 등장하지만, 이전부터 푸르민트(furmint)라는 청포도를 비롯해 다양한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왔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다. 말린 포도로 만든 달콤한 토카이 와인이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토카이를 “왕을 위한 와인이자, 와인의 왕”이라고 칭송했다.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로부터 토카이 와인을 선물로 받고 기뻐하며 “이 와인을 만든 땅에 축복이, 이 와인을 보낸 여인에게 축복이, 이 와인을 마시는 내게 축복이 있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토카이 애호가였다. 헝가리 왕 프란츠 요제프는 매년 여왕의 생일에 토카이를 12병씩 선물했는데, 여왕이 생전에 받은 토카이 와인 수가 무려 972병에 이를 정도였다.

토카이 와인은 많은 예술 작품에도 등장한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서는 백작 부인으로 변장한 여주인공이 자신이 헝가리 출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헝가리 춤곡을 부르는데 가사 중에 “잔을 들어 토카이를 채우고 건배”라는 말이 나온다. 괴테의 작품 ‘파우스트’에는 술집에 모인 사람 중 하나가 달콤한 술을 원하자 악마 메피스토가 식탁에 구멍을 뚫어 토카이 와인이 솟아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이렇게 많은 유명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토카이 와인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토카이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지대로 다뉴브강의 지류들이 지역 곳곳을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가을이 되면 아침마다 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포도밭을 뒤덮고 오후에는 안개가 걷히면서 맑고 건조한 날씨가 지속된다. 이런 환경은 귀부균이 발생하기에 딱 맞는 조건이다. ‘포도를 귀하게 부패시킨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곰팡이는 학명으로는 보트리티스 시네리아(Botrytis Cinerea), 영어로는 노블 롯(Noble Rot)이라고 부르며, 껍질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포도가 빨리 마르도록 도와준다.

헝가리에서는 귀부균에 감염돼 마른 포도를 아수(aszú)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런 포도로 만든 스위트 와인 레이블에는 토카이 아수(Tokaji Aszu)라고 적혀 있다. 아수 포도는 수확하지 않고 반드시 나무에 달린 채로 말린다. 수확도 송이째 하지 않고 충분히 마른 포도알만 알알이 따서 모은다. 토카이에서 언제부터 아수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셉시(Szepsi)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1630년쯤 오스만튀르크가 헝가리를 침략하자 셉시는 포도 수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수확 시기가 지난 포도는 귀부균에 감염돼 말라버렸지만, 셉시는 그런 포도로 예상 밖의 놀라운 결과를 맞이했다. 영롱한 금빛을 자랑하는 달콤한 와인이 탄생한 것이다! 16세기 문헌에 이미 아수 포도에 대한 기록이 있으므로 셉시가 맨 처음 아수 포도를 발견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의 전설은 토카이 아수 와인의 시작을 짐작케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토카이가 숙성되고 있는 지하 셀러. 사진 패트리셔스
토카이가 숙성되고 있는 지하 셀러. 사진 패트리셔스
아수 포도를 알알이 수확하는 모습. 사진 디즈노코
아수 포도를 알알이 수확하는 모습. 사진 디즈노코

마른 포도즙으로 만든 달콤한 와인

그런데 말라비틀어진 포도로 어떻게 와인을 만들 수 있을까? 마른 포도는 수분이 너무 적어 즙을 짜기가 무척 어려울 텐데 말이다. 그래서 토카이에서는 아수 포도를 12~60시간 동안 포도즙에 담가 촉촉하게 적신 뒤 건져내 즙을 짠다. 이렇게 짜낸 즙을 발효하고 약 3년간 지하 셀러에서 숙성을 거치면 달콤하고 향긋한 토카이 와인이 만들어진다.

토카이 아수 와인은 당도에 따라 ‘5 푸토뇨스(puttonyos)’와 ‘6 푸토뇨스’로 나뉜다. 푸토뇨스는 ‘푸토니(puttony)’라고 부르는 포도 수확용 통(용량 25㎏)의 복수형 명사다. 5 푸토뇨스는 아수 포도 다섯 통, 6 푸토뇨스는 아수 포도 여섯 통으로 와인을 만들었다는 뜻이므로 숫자가 높을수록 당도가 더 높다. 5 푸토뇨스 와인은 1L당 당분이 120g, 6 푸토뇨스는 150g이나 된다.

그럼 맛은 어떨까? 사과, 라임, 레몬, 복숭아, 살구, 모과, 파인애플 등 갖가지 과일 향이 꿀, 견과, 바닐라 등 다채로운 풍미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단맛이 강하지만 주 품종인 푸르민트 특유의 강한 신맛 때문에 당도와 산도의 밸런스가 좋아 끈적임이 없고 와인이 경쾌하다.

토카이 아수는 30~40년 이상의 긴 숙성 잠재력을 자랑한다. 어릴 때 마셔도 좋지만 병숙성이 진행되면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한다. 숙성될수록 와인색이 금빛에서 호박색으로 바뀌고 복합미도 증대된다. 과일 향이 더욱 달콤해지고 견과 향이 더 풍부해지며 향긋했던 꿀 향은 진하고 묵직해진다. 바이올린처럼 경쾌했던 맛이 첼로처럼 중후해지는 느낌이다. 결혼이나 생년 빈티지를 사두고 묵혔다가 기념이 되는 해에 열기 딱 좋은 와인이다.

토카이 아수는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6~8℃로 차게 식혀 달콤한 디저트와 즐겨도 좋고 짭짤하거나 매콤한 음식에 곁들여도 좋다. 서양에서는 블루치즈, 푸아그라, 치킨 카레, 페퍼콘 스테이크 등을 토카이 아수와 최고의 궁합으로 꼽는다. 한식 중에는 달콤하게 절인 정과나 조청을 곁들인 떡 구이도 좋고 짭짤한 육포도 잘 어울린다.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드라이 토카이 와인도 좋은 선택이다. 드라이 와인은 말리지 않은 싱싱한 포도로 만들기 때문에 레이블에 포도 이름인 푸르민트가 적혀 있다. 토카이 푸르민트는 사과, 배, 레몬 등 과일 향이 상큼하고 은은한 꽃 향이 매력적이다. 화이트 와인이므로 채소나 해산물과 즐겨도 좋지만, 보디감이 탄탄하기 때문에 닭고기나 돼지고기와 즐겨도 궁합이 잘 맞는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며 와인의 왕 토카이로 축배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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