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음악계를 대표하는 두 가지 이슈는 방탄소년단(BTS)과 이날치다. BTS는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대망의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했고 ‘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 역시 한국어 가사임에도 같은 성적을 기록했다. 2021년 그래미 후보에도 올랐다.

지구 반대편에는 국악 기반의 팝밴드 이날치가 있었다. 누군가 그들을 ‘조선 팝’이라 명명했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수식어다. 하지만 간달프와 사루만만 있는 ‘반지의 제왕’이 심심할 게 분명하듯, 이들을 제외하고도 2020년을 채운 많은 음악이 존재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사실상 공연 산업이 멈췄음에도, 즉 가장 중요한 활동 영역이 사라졌음에도, 뮤지션들은 음악을 발표했다. 그중 당신이 놓쳤을 가능성이 큰 노래들을 소개한다. 더 빛날 수 있었던 음악의 작은 별들이다. 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음악들이다. 집에서 듣는다면 더더욱 좋을 음악들이다.


정미조-석별

트로트가 레거시 미디어를 장악하다시피 한 작금의 분위기에서 ‘어른의 음악=트로트’라는 공식을 깬 음악인이 있다. 바로 정미조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찾아온 정미조의 새 앨범에 담긴 ‘석별’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이별의 클리셰를 깬다. 작별이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인생의 깊은 지점에 도달해서야 알 수 있을 법한 명제를 젊은 목소리로 들었다면 허세라 느꼈을 것이다. 이런 노래를, 이런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인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정밀아-어른

정밀아는 한국 음악계의 청록파 문인 같은 인물이다. 어쿠스틱 기타와 건반을 위주로 한 단출한 편곡 위에서 그녀가 만드는 멜로디, 쓰는 가사는 유미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청록파 문인들이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다뤘다면, 정밀아의 자연은 곧 우리의 일상이다. 세 번째 앨범 ‘청파 소나타’는 음울했던 2020년 서울을 담채화로 그리는 앨범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귓가를 보듬는 ‘어른’은 사람의 목소리야말로 어떤 악기로도 대체할 수 없는 뻔한 명제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홀로 있어야 할 연말을 위한 노래다.


잔나비-가을밤에 든 생각

2집 ‘전설’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잔나비가 ‘소곡집’이라는 숨 고르기 앨범을 냈다. 그동안 잔나비의 주요 곡들이 풍성한 편곡과 드라마틱한 스케일을 담고 있었던 반면, 이 앨범은 말 그대로 소품 위주로 구성됐다. 스케일을 걷어낸 자리에는 디테일이 남았다. 감성의 골조가 드러난다. 앨범의 첫 곡인 ‘가을밤에 든 생각’은 이들의 정규 1집에 담겨 있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과 대조를 이루는 곡이다. 단풍이 낙엽이 되어 땅으로 돌아간, 늦가을 어느 밤의 사색 같은 곡이다.


이랑-환란의 세대

이랑은 문제적 아티스트다. 트위터로 대표되는 1990~2000년대생의 어떤 냉소를 대변한다. 많은 관념과 권위를 거부한다. 단순히 염세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이랑이 만들어내는 멜로디와 표현법에 있다. 정규 3집 발표를 앞두고 내놓은 싱글 ‘환란의 세대’는 분노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 어떤 젊은이들의 속내를 담고 있다. 염세적 위로이자 차가운 공감의 노래다.


딕펑스-평행선

송가인과 임영웅으로 뒤덮인 트로트 범벅 TV가 지겹듯, 유행을 넘어 범람하는 시티팝도 마찬가지다. 취향의 배지같이 돼버렸다. 혼탁해진 시티팝 물결에서 옥은 있다. 이 혼탁한 와중에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딕펑스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노래를 만들었다. 일반적인 시티팝의 공식을 따르되 그 본질,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 멜로디와 하모니가 빛난다.


김사월-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상처 주는 키를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어

김해원과 함께한 앨범 ‘비밀’로 등장한 이래, 김사월은 새로운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아이콘이 됐다. 단숨에 고막으로 빨려 들어가는 음색과 멜로디, 문학작품을 읽는 듯한 가사 그리고 고유의 캐릭터를 모두 갖췄다. 김사월의 세 번째 앨범 ‘헤븐’은 지금까지의 행보를 확장하는 작품이다. 이전까지 김사월의 세계가 1인칭에 가까웠다면, 이 앨범에서는 다층적이다. 화자가 ‘나’일지라도 여러 인물로 분리된다. 대중음악의 전형적인 구성에서 벗어나, 점층적이되 일필휘지 같은 스타일로 마음을 찌르는 이 긴 제목의 노래 백미는 끝까지 들어봐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예술로서의 음악이 주는, 음계에 실린 이야기로서의 예술이 주는 쾌감을 선사한다. 김사월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2010년대 후반 한국 포크의 모습은 조금 달랐을 것이다. 포크에서 출발한, 이 빼어난 아이덴티티의 소유자는 석 장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는다. 다만 무르익어갈 뿐이다.


김제형-실패담

신인 싱어송라이터 김제형은 자신의 첫 앨범에서 일기 같은 독백을 들려준다. 앨범은 전체적으로 1980~90년대 ‘가요톱10’ 10위권 스타일의 음악을 담고 있다. 그중 이 노래는 발군의 포크다. 편한 언어로 그려내는 일상의 속마음이 있다. 일기와 편지의 중간 단계의 솔직함이 있다. 청춘의 미숙함에서 기인하는 차분한 성찰이 있다. 이 노래를 꽤 많이 음미했다. 포크의 본질이 담겨있다.


배영경-여행기록

배영경의 ‘여행기록’은 발로 만들어 시간으로 숙성한 앨범이다. 배영경의 특이점이라면, 설렘보다는 쓸쓸함으로 여행을 담아냈다는 데 있다. 정교하고 섬세한 연주와 적정주의적 편곡이 조화를 이룬 이 앨범에서 그는 그때 그 시절, 심야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었던 선율을 들려준다. 한때 이병우, 김광민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작품.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