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투어가 주관하는 인터내셔널시리즈 코리아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의 롯데스카이힐 제주 CC. 사진 아시안투어
아시안투어가 주관하는 인터내셔널시리즈 코리아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의 롯데스카이힐 제주 CC. 사진 아시안투어
김비오(가운데)가 아시안투어 선수들과 함께 제주 흑돼지 구이 문화 체험 행사를 하고 있다. 사진 아시안투어
김비오(가운데)가 아시안투어 선수들과 함께 제주 흑돼지 구이 문화 체험 행사를 하고 있다. 사진 아시안투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꼭 맞는 건 아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골프의 아시안투어가 보여주고 있다. 

8월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간 제주 서귀포시의 롯데스카이힐 제주 CC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시리즈 코리아’는 아시안투어가 주관하는 대회다. 태국(3월)과 잉글랜드(6월), 싱가포르(8월)에 이어 인터내셔널 시리즈 4차 대회였다. 태국에서는 재미교포 김시환, 잉글랜드에서는 짐바브웨의 스콧 빈센트, 싱가포르에서는 태국의 니티통 티퐁이 우승했다.

인터내셔널시리즈 코리아는 총상금 150만달러(약 20억원), 우승 상금 27만달러(약 3억6000만원) 규모로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의 총상금 5억~15억원, 우승 상금 1억~3억원 규모를 훌쩍 뛰어넘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아시안투어가 이런 규모의 대회를 시리즈로 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회 운영도 미국프로골프(PGA)투어나 DP월드투어(옛 유러피언투어)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철저히 선수 중심으로 운영됐다. 인터내셔널시리즈 기간 대회장인 롯데스카이힐 제주는 대회 코스 18홀 이외에 대중제 골프 코스 18홀이 있었지만, 일반 손님을 받지 않았고 드라이빙 레인지, 연습 그린, 쇼트 게임 연습 시설을 충분히 지원했다. 국내 대회에선 선수들을 위한 드라이빙 레인지 시설이 없거나 36홀 이상 골프장에서는 대회 기간에도 내장객을 받아 선수와 주말 골퍼가 뒤섞이는 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회 운영에 충분한 자금을 투입하고 골프장 측도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회 하루 전날 연습 라운드 때 폭우로 선수들이 긴 시간 기다려야 했는데 플레이어스 라운지를 마련했고 라운지 안에 게임기, 안마기, 이발소 등을 설치했다. 이번 대회에서 프로 데뷔 이후 첫 우승을 차지한 옥태훈은 “골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가 좋다”며 “앞으로도 코리안투어와 일정이 겹치지 않는다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대회에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 2등을 차지하며 아시안투어 상금 1위에 오른 김비오는 “아시안투어 인터내셔널시리즈에 세 번 출전했는데 전체적인 대회 분위기가 굉장히 깔끔하고 웅장하다. 무엇보다 선수들을 배려해주는 대회 운영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아시아 국가를 이동하며 치러야 하고 대형 후원사가 없던 아시안투어는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다. 대회를 제대로 치르지 못해 두 시즌을 통합해 2020~ 2022시즌 상금왕을 뽑았다. 한국의 골프 천재 김주형(20)이 당시 상금왕이었다. 그 이전에도 아시안투어의 지원 요청을 받은 대한골프협회(KGA)가 2018년 “한국 골프의 초창기 한국 선수들이 뛸 수 있는 좋은 무대를 제공했던 아시안투어와 함께 대한골프협회가 주관하는 3개의 오픈 대회인 한국오픈, 신한동해오픈, 매경오픈을 아시안투어와 공동 주관하겠다”고 했다. 한국이 내민 보답의 손길이었다. 

그런데 아시안투어가 귀한 몸이 되는 상전벽해가 일어났다. 세계 골프의 중심을 이루는 미국프로골프(PGA)의 아성에 올해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자금을 대는 LIV 골프가 엄청난 자금력을 앞세워 도전하면서 힘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LIV 골프는 PGA투어와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처음엔 DP월드투어(옛 유러피언투어)를 연합군으로 삼고자 공을 들였으나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방향을 틀어 아시안투어에 접근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고사 위기에 빠졌던 아시안투어에 LIV 골프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3억달러(약 4077억원)를 지원해 아시안투어 인터내셔널시리즈 10개 대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인터내셔널 시리즈는 LIV 골프로 가는 징검다리 기능을 한다. 2024년부터 인터내셔널 시리즈 1위는 LIV 골프로 직행하고 상위권 선수들에게도 합류 기회를 준다는 방침이다. 호주 골프의 전설인 그레그 노먼 LIV 골프 인베스트먼트 최고경영자(CEO)는 “LIV 골프의 후원으로 아시안투어가 선수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골프를 성장시키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조민탄 아시안투어 커미셔너 겸 최고경영자(CEO)는 “아시안투어로서는 LIV 골프가 인터내셔널시리즈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주고 배경이 돼준다”며 “내년에는 10~12개 대회를 열어 아시아 선수들이 기량을 펼칠 무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인터내셔널시리즈가 PGA투어 진출에 제약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OWGR(오피셜 월드 골프 랭킹)이 3라운드 54홀 컷 탈락 없이 열리는 LIV 골프에 세계 랭킹 포인트를 주지 않기로 하면서 인터내셔널 시리즈는 LIV 골프 선수들의 세계 랭킹을 끌어올리는 역할도 하게 된다. 

제주 대회에 패트릭 리드(미국)를 비롯해 LIV 소속 정상급 선수들이 일부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싱가포르 대회 때 코로나19 감염이 잇따르면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시안투어는 LIV 골프의 하위 투어로 비치는 것을 경계했다. 조민탄 아시안투어 CEO는 “LIV 골프가 인터내셔널시리즈를 출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아시안투어의 후원사는 아니다”라며 “앞으로 인터내셔널시리즈 후원사들을 계속해서 찾아낼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LIV 골프 인비테이셔널 시리즈와 인터내셔널시리즈는 다르다. 앞으로 LIV 골프는 국제 매니지먼트 회사인 IMG같이 홍보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조민탄 아시안투어 커미셔너 겸 최고경영자(CEO). 사진 아시안투어
조민탄 아시안투어 커미셔너 겸 최고경영자(CEO). 사진 아시안투어

한국 대회가 끝나던 8월 21일 아시안투어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시리즈 개최지로 모로코와 이집트를 선정했다. 

‘인터내셔널시리즈 모로코’는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흘간 모로코 라바트의 로열 골프 다르 에사람에서 열리고, 한 주 뒤인 11월 10일부터 13일까지 나흘간은 이집트 카이로의 마디나티 골프클럽에서 ‘인터내셔널시리즈 이집트’가 개최된다. 12월 마무리될 예정인 올 시즌 아시안투어는 20개 대회가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조민탄 아시안투어 CEO는 “모로코와 이집트 개최로 인해 선수들에게 새로운 곳에서 경쟁할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모로코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유러피언투어 대회가 열리곤 했는데 아시안투어의 영토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저변을 확대하려는 LIV 골프의 계획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기회가 생긴 한국 선수들은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지만 코리안투어는 선수 유출에 대해 우려도 하고 있다. 

인터내셔널시리즈 코리아에서 프로 첫 우승을 차지한 옥태훈. 사진 아시안투어
인터내셔널시리즈 코리아에서 프로 첫 우승을 차지한 옥태훈. 사진 아시안투어

8월 11~1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인터내셔널시리즈 싱가포르’에는 김비오를 비롯해 국내 정상급 선수 10명이 출전했다. 같은 기간 열렸던 코리안투어 대회에 그만큼 스타 선수들이 빠진 셈이다. 이번 대회 기간에는 코리안투어 대회가 없자 한국 선수 50명이 나섰는데 그 정도로 인터내셔널시리즈 대회를 뛰고 싶어하는 선수들이 많다는 방증이다.

대회 수와 상금 규모가 작아 선수들 생계유지도 어렵던 코리안투어는 올해 대회 수를 22개까지 늘리며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스타 선수 기근에 빠질까 고민이다. PGA투어와 일본프로골프투어(JGTO)로 진출하려는 선수들 외에도 대회 상금과 수준이 몰라보게 달라진 아시안투어를 함께 뛰려는 선수들도 늘어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