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전설 바이런 넬슨. 사진 골프 다이제스트
골프의 전설 바이런 넬슨. 사진 골프 다이제스트

‘모던 스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골프의 전설 바이런 넬슨(Byron Nelson·1912~2006)과 13년간 연평균 수익률 29.2%를 기록한 전설의 펀드매니저 피터 린치(Peter Lynch·78)는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즘 말로 불꽃처럼 일하고 조기 은퇴의 기쁨을 누린 ‘파이어족’이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시대를 앞질러 업(業)의 본질을 꿰뚫은 데서 출발한다. “백스윙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다운스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스윙의 정확성으로 이름 높았던 넬슨은 골프 스윙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런 명언을 남겼다. 

긴장하면 서두르게 되고 백스윙을 마치기도 전에 다운스윙이 시작되면 리듬과 템포, 타이밍이 무너지게 된다. 주말 골퍼는 물론이고 프로 골퍼도 실제 경기에서 백스윙을 충분히 하려고 노력한다. 

미국골프협회(USGA)가 볼 테스트를 위해 사용하는 스윙 머신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을까 고심하다가 ‘아이언 바이런(Iron Byron)’이라 할 정도로 넬슨은 탁월한 샷 능력을 지닌 골퍼였다. 넬슨의 전성기 시절 스윙 스타일을 본떠 ‘아이언 바이런’이 스윙하게 하였으니 넬슨은 인공지능(AI) 스윙 로봇의 모델이었다. 

레슨계의 대부로 꼽히는 임진한 프로는 “그는 뛰어난 골퍼이기 이전에 그린의 신사였고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바이런 넬슨 클래식)를 만들어 후배들에게 기회를 준 훌륭한 선배였다”며 “전성기 때 홀연 은퇴해 ‘박수 칠 때 떠나라’는 그 어려운 말을 실천한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넬슨은 궁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있는 글렌가드C.C. 캐디로 일하던 시절, 골프장 주인은 캐디의 플레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 몰래 어둠 속에서도 목표물이 보이도록 자신의 하얀 손수건을 홀에 꽂고 연습했다. 1932년 PGA투어에 데뷔한 그는 1945년 믿기 어려운 기적의 승리 행진을 벌였다. 30개 대회에 출전해 18번 우승하고 7번 준우승했다. 나머지도 모두 톱10이었다. 그중 자신이 참가한 11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했다. 이 두 기록은 지금까지 PGA투어 한 시즌 최다승 기록과 연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아널드 파머는 “한 해 11연승은 앞으로 아무도 깨지 못할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이런 그에게 ‘미스터 골프’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으니 가능한 일 아니었느냐고. 그에게는 1912년생 동갑인 샘 스니드와 벤 호건이란 강력한 맞수가 있었다. ‘미국 골프의 3총사’라 불렸던 이들이다. 샘 스니드 82승(메이저 7승), 벤 호건 64승(메이저 9승), 바이런 넬슨 52승(5승) 등 천하를 삼분했다.

스니드는 어마어마한 장타로 타이거 우즈와 나란히 지금도 PGA투어 통산 최다승 보유자로 남아있고, 호건은 목숨을 잃을 뻔한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1년 만에 복귀해, 한 해 메이저 3연승의 대기록을 세운 ‘불굴의 골퍼’였다. 1945년 넬슨의 라운드당 평균 타수는 68.33타였다. 2000년 타이거 우즈가 67.79타를 기록할 때까지 55년간 깨지지 않았다. 

넬슨은 경기 운용 능력이 탁월해 앞서는 경기를 잘 놓치지 않았다. “진짜 굿샷이란 최대의 위기에서 가장 필요할 때의 좋은 샷을 말한다”고 했다. 넬슨은 1924년 미국골프협회가 스틸 샤프트를 공인한 이후 팔과 어깨가 하나로 움직이는 백스윙(one-piece takeaway)을 개발해 클럽페이스가 스윙 내내 임팩트 때 스퀘어 상태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도록 했다. 히코리 샤프트를 사용하던 시절처럼 손과 손목을 많이 쓰는 스윙으로는 훅이 나기 쉬운 문제점을 개선한 것이다. 그가 ‘모던 스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다. 넬슨은 여전히 전성기였던 34세 때 은퇴를 선언했다. 골프 대회에서 번 돈으로 평생의 꿈이던 목장을 고향 텍사스에 마련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갔다. 

 

투자의 귀재 피터 린치. 사진 피델리티자산운용
투자의 귀재 피터 린치. 사진 피델리티자산운용

1994년 린치는 ‘미국 주식 시장에서 돈 버는 법’이란 주제를 놓고 강연한다. 그는 돈을 벌려면 먼저 두 번에 한 번꼴로 하락해온 주식 시장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역사는 시장이 하락하며 무섭게 무너질 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도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들어 93년 동안 주식 시장이 –10% 이상 하락한 것이 무려 50번이었다. 그중 –25% 이상도 15번이나 됐다. 주식 시장은 2년에 한 번꼴로 –10% 이상 하락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식 시장의 이런 속성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예 주식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하락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할 일은 이런 주식 시장의 변동성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린치는 보스턴대학에서 수학과 교수였던 아버지가 7세 때 암 판정을 받고 10세 때 세상을 떠나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11세부터 골프장 캐디로 일하기 시작했다. 골프장 손님들이 하는 주식 이야기를 들으며 투자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보스턴대학 재학 중에도 틈틈이 캐디 일을 계속하던 그는 당시 피델리티 사장이었던 조지 설리번의 캐디를 한 것이 인연이 돼 피델리티에서 여름방학 인턴을 했다. 그는 보스턴대학에서는 역사, 심리·철학을 전공했고,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서 MBA를 했다.

그는 피델리티에 애널리스트로 입사해 1977년 마젤란 펀드를 맡게 된다. 린치는 1977~90년 13년간 마젤란 펀드를 운용하면서 단 한 해도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지 않았다. 1977년 2200만달러(약 300억원)에 불과했던 ‘마젤란 펀드’를 13년간 운용해 연평균 수익률 29.2%를 기록, 1990년 무렵 140억달러(약 19조1300억원)의 세계 최대 뮤추얼 펀드로 키워냈다. 13년간 그의 펀드에 돈을 맡겼다면, 27배로 불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린치의 투자 비법 1장 1절은 “자신이 잘 아는 것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잘 알고 이해하는 기업이나 산업에 투자하는 식으로 자신의 강점을 활용한다면 전문가들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린치는 ‘일상생활에서 찾은 10배 수익주’인 ‘텐배거(Tenbagger)’를 투자 전략으로 삼았다. 텐배거는 린치가 만든 용어로 야구 용어는 아니지만, ‘10루타’를 뜻하며 꿈의 수익률을 말한다. 

그는 화려하게 포장되고 수식어만 화려한 낯선 기업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이나 상품을 만드는 기업이 투자 대상으로 더욱 확실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어떤 바보라도 이 사업을 경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기업”을 최고의 투자 대상으로 꼽았다. 

그는 기업 분석을 꼼꼼히 했다. 그는 주식을 놀이하듯 하는 사람에게 이런 지적을 했다. “사람들이 부동산에서 돈을 벌고 주식에서 돈을 잃는 것은 당연하다. 집을 고르는 데는 몇 달을 투자하지만, 주식을 고르는 데는 10분도 쓰지 않는다.”

워런 버핏, 존 템플턴, 필립 피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투자의 전설로 떠오른 린치는 마흔여섯 나이에 돌연 은퇴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나이였다. 

그는 “2000개 기업의 종목 코드는 외우고 있으면서 딸의 생일은 기억하지 못했고, 아내는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죽기 전에 ‘회사에서 더 열심히 일할 걸’이라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