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란 언제나 다른 문명과 만나 부딪치고 소멸하고 뒤섞이고 살아남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낸다. 영화 ‘아포칼립토’ 중 마야 제국의 축제 장면. 사진 IMDB
문명이란 언제나 다른 문명과 만나 부딪치고 소멸하고 뒤섞이고 살아남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낸다. 영화 ‘아포칼립토’ 중 마야 제국의 축제 장면. 사진 IMDB

세계 4대 문명은 어쩌다 유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을까? 세계를 지배했던 거대 제국들은 왜 멸망해버린 것일까? 당대 최고 권력과 첨단 기술이 쌓아 올린 문명은 왜 계속해서 앞서가지 못하고 몰락하거나 새로운 문명에 흡수되어 희미한 흔적만 남겨놓게 된 것일까?

추장의 아들이자 부족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인공 표범 발은 사냥에서 돌아오다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 자신들의 숲이 파괴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다는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숲을 떠난다는 걸 생각해본 적 없는 표범 발은 혼란스럽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던 숲에서 나와 내 아들이 살아가는 것,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냥하는 법을 전수하고 어머니는 딸에게 어머니가 되는 길을 가르쳐주며, 별이 반짝이는 밤이면 아이들이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풍경, 사냥하고 먹고 자고, 춤추고 사랑하며 아이를 낳아 세대를 이어 가는 일, 그렇게 똑같이 반복되는 평화가 삶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그들의 숲에도 불온한 바람이 불어온다. 큰 늑대란 이름의 전사가 이끄는 침략자들이 몰려와 부족을 도륙하고 여자들을 강간한다. 저항하고 몸부림쳐도 피할 수 없는 아비규환. 표범 발은 만삭인 아내와 어린 아들을 마른 우물 안에 숨긴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려워 말라”는 말을 남기고 처형당한다. 마을은 불타고 아이들은 버려진다. 표범 발과 살아남은 청년들은 굴비처럼 엮여 포획된 짐승처럼 끌려간다.

그들이 먼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마야 제국의 번화한 도시. 귀족과 천민, 풍요와 빈곤이 극단적으로 갈려 죄악과 타락의 악취를 풍기는 곳이다. 여자들은 노예로 팔리고 젊고 건강한 남자들은 피라미드로 끌려간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은 잘린 인간의 머리가 피라미드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올 때마다 환호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죽창에 꽂힌 머리들, 생선 토막처럼 쌓인 시체 더미들.

표범 발은 제단으로 끌려간다. 피라미드 위에는 왕과 왕비, 그들의 아이가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으로 앉아 있다. 그제야 자신들을 죽이지 않고 애써 끌고 온 이유를 깨닫는다. 가뭄과 질병, 기아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백성의 원한을 하늘로 돌리기 위해 인신 공양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제물로 바칠 포로들이 차례차례 희생되고 표범 발도 꼼짝없이 도마 위의 생선처럼 눕혀진다. 제사장의 칼이 그의 심장을 산 채로 꺼낼 순간이다.

일식이 시작된다. 차츰 어두워지는 세상 그리고 다시 해가 비춘다. 인간의 피를 배불리 마신 태양신이 흡족해서 빛을 토해냈다고 믿는 어리석은 군중은 왕과 제사장에게 존경과 갈채를 보낸다. 표범 발과 일행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야만의 전사들은 그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 사냥터에 풀어준 뒤 달아나게 하고는 돌과 창을 던지고 화살을 쏘아 죽이며 즐거워한다. 

온 힘을 다해, 온 지혜를 짜내 표범 발은 도망친다. 큰 늑대와 그 무리가 집요하게 추적한다. 표범 발은 권력에 희생되어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들의 산과 피의 바다를 빠져나간다. 야생의 짐승이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숲도 통과한다. 표범 발은 달린다. 창을 맞은 옆구리가 쑤시고 아프지만, 고통을 느낄 여유는 없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이를 악물고 달리는 내내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출산을 앞둔 아내, 어린 아들이 좁은 우물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난 표범 발이다. 여긴 내 숲이다. 내 아들과 그 아들들이 사냥할 터전이다!” 마침내 고향 숲에 들어섰을 때 표범 발은 큰 늑대를 향해 외친다. 천명한다고 자연이 내 것이 될 수 있는 게 아님을 표범 발은 아직 모른다. 오직 가족을 구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날 뿐이다. “나는 두렵지 않아.” 표범 발은 아버지가 남긴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무서움을 떨친다. 

큰 늑대와 마지막 결전을 치른 표범 발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커다란 배들이 바다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저 괴물 같은 게 무엇일까, 공포가 엄습한다. 표범 발은 마지막 힘을 다해 숨이 차게 달린다. 굵은 비가 쏟아진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마을은 불에 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비로소 그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때 만났던 무리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표범 발은 차가운 빗줄기를 맞으며 가족을 찾아 물이 가득 차오르고 있는 우물을 내려다본다. 


소멸하는 문명 다룬 멜 깁슨의 대작

영화 ‘아포칼립토’는 ‘브레이브 하트’에서 “프리덤!”을 외치며 죽어가던 자유의 투사로 오래 기억되는 배우 멜 깁슨이 2006년 제작·감독한 대작이다. “거대 문명은 내부에서 붕괴하기 전에는 외부 세력에 정복되지 않는다”는 역사학자 윌 듀랜트의 명언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스페인 함대가 도착하기 전, 마야 제국은 그들 스스로 자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담아낸다.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아포칼립토란 말은 종말이나 사악한 침입자란 뜻도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감독이 전한 바 있다. 시공간의 배경이 원시 문명인 만큼 대사는 짧고 간결하다. 나머지 여백은 모두 전투와 살육과 자연이 채우지만, 숨 돌릴 틈은 없다. 침략을 옹호하는 영화가 아니냐는 일부 세간의 평은 너무 피상적인 의견일 듯싶다. 문명이란 언제나 다른 문명과 만나 부딪치고 소멸하고 뒤섞이고 살아남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법이다. 

자연은 평화롭지 않고 생명은 평등하지 않다. 상냥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다. 힘을 과시하기 위해, 더 아름다운 짝을 차지하기 위해, 새끼를 더 잘 먹이고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늘 영역을 두고 다툰다. 약하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정체돼 있으면 멸종한다. 살아남기 위해 야만의 시대에는 두 발로 달리고 칼로 찔러 적을 죽였다. 현대 문명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멀리서 총으로 미사일로, 머리와 자본으로 싸운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었지만 내면은 원시적 본능이 꿈틀거리는 전사인 것이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생명의 욕망 때문이다. 화려하게 꽃피웠던 문명과 크게 번영했던 제국이 파멸의 길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 때문이고,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 덕분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현대 문명도 언젠가는 전혀 다른 문명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이다. 아니, 연극 무대처럼 막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어쩌면 바로 지금, 우리도 표범 발처럼 인류 문명의 전환점을 살아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문명의 종결자일까, 창시자일까? 생각해보면 아찔해지기도 한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