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이 어쿠스틱 기타 한 대로 낸 솔로 앨범 ‘문’을 최근 발매했다. 1983년 ‘어머니와 고등어’가 담겨있던 ‘기타가 있는 수필’ 이후 37년 만이다. 사진 이파리엔터테이니움
김창완이 어쿠스틱 기타 한 대로 낸 솔로 앨범 ‘문’을 최근 발매했다. 1983년 ‘어머니와 고등어’가 담겨있던 ‘기타가 있는 수필’ 이후 37년 만이다. 사진 이파리엔터테이니움

2008년 김창완 밴드를 결성한 이래, 김창완은 쉬지 않았다.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고 공연을 했다. 과거 산울림 시절보다 더 바삐 움직였다. 당시 그와 인터뷰했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아무리 오래 노래한 가수라도 그 사람이 불러서 노래가 된 게 아니야. 음악이 그 사람을 노래하게 하고, 그 사람을 춤추게 하는 거지. 음악의 힘을 믿고, 음악에 종사할 때 세대를 뛰어넘는 음악이 나와. 꽃 키우는 사람과 베 짜는 사람, 음악 하는 사람은 따로 행복을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 행복한 사람들이야. 그럼 행복을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열심히 베를 짜도, 꽃만 키워도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니까. 음악도 마찬가지야.”

음악 하는 김창완은 행복했고 팬들도 그랬다. 2014년에 아이유가 산울림의 ‘너의 의미’를 리메이크하며 산울림과 김창완은 새로운 세대에게도 재발견됐다. 그의 노래를 즐겨 듣고 따라 부르는 세대의 폭이 넓어졌다. 세 형제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1970년대, 다른 직업을 가진 동생들 대신 홀로 밴드의 이름을 지켜왔던 1980년대, 산울림이 재평가되던 1990년대에 이어 그의 음악은 순조롭게 2010년대에 안착했다.

그 후로도 여전히 아침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볼 수 있었으며 어디선가 김창완 밴드의 무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노래는 멈췄다. 2016년 3월 조용히 ‘시간’이라는 곡을 내놓은 후 그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노래에서 김창완은 기타 한 대에 고상지의 반도네온 연주를 얹어 말과 노래를 들려준다. 말과 음계의 경계를 허무는 잠언이자 수필이었다. 유행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가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의 어느 순간마다 책갈피처럼 등장할만한 노래였다. 그의 새로운 음악을 여느 때 보다 기다린 건 ‘시간’이 남긴 여운 때문이었다. 4년이 흘렀다. 돌아왔다. 김창완 밴드가 아니라 김창완으로. 1995년 발표한 ‘포스트스크립트’ 이후 15년 만이다. 어쿠스틱 기타 한 대로 낸 솔로 앨범으로는 1983년 ‘어머니와 고등어’가 담겨 있던 ‘기타가 있는 수필’ 이후 37년 만이다.


김창완의 기도 같은 앨범

바로 ‘문’이라는 제목의 앨범이다. ‘시간의 문을 열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앨범을 들었다. 연주곡인 ‘엄마, 사랑해요’로 시작, 총 11곡이 담긴 음반을 들으니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2010년대 초반, 몇 년 동안 김창완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정 게스트였다. 매주 서너 곡을 소개하는 코너였다. 생방송으로 진행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녹음이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멘트 위주로 녹음하고 노래는 도입부만 듣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2012년 초였다.

그날 준비한 노래들도 인트로만 들으려니 생각했다. 첫 곡을 틀고 몇 초 후, 피디는 으레 그렇듯 “넘길까요?”라고 그에게 물었다. 여느 때였으면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그날 김창완은 계속 듣자고 말했다. 레너드 코헨의 새 앨범에 담긴 ‘아멘(Amen)’이라는 곡이었다. 2004년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에서, 일흔여덟 살 코헨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특유의 저음으로 읊조리듯 부르는 노래는 말하자면 붉은색만 남긴 채 눈 부신 빛을 잃은 저물녘 태양과 같았다. 7분 36초에 달하는 긴 곡이지만 김창완은 말없이 끝까지 코헨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노래가 끝난 후 그가 무슨 코멘트를 남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의 표정이 선명하다. 진지했고 엄숙하기까지 했다. 함께 방송하면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출연이 끝날 때까지, 그런 표정은 다시 보지 못했다.


숙성된 진솔함의 세계

10분 남짓 동안의 짧은 일화가 떠오른 이유는 ‘문’에 담긴 김창완의 목소리와 이야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1970년대 청년 문화의 상징으로 이 땅에 뿌리 내린 포크가 쉰 살을 먹은 후 도달한 풍경이다. 헛되이 낭비한 세월의 모습이 아닌, 숙성된 진솔함의 소리와 철학이다. 2016년 발표한 ‘시간’이 앨범의 주제다. 그때 “시간은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지만 언젠간 풀려버릴 태엽이지 / 시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지만 찬란한 한순간의 별빛이지”라고 노래하던 김창완은 이 문장으로부터 하나의 앨범을 만들었다. 시간의 상대성과 절대성을 넘나들며 여러 이야기를 풀어낸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테넷(2020)’처럼 과거와 현재·미래의 벽이 허물어진다. 소년과 청년·노년이 한곳에 머문다. ‘시간’에서 제시됐던 이 주제는 ‘노인의 벤치’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2010년대 포크의 명반, 김사월과 김해원의 ‘비밀’을 연상케 하는 서늘한 기타 선율 위로 김창완은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시간은 모든 것에 무관심했지만 추억을 부스러기로 남겼지”라는 지친 노인의 저음에는 깊은 주름이 깔려 있다. 품격도 근엄도 없는, 그저 주름이. 어릴 적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그녀를 나이 들어 조우했지만, 노인의 로맨스 따위는 없다. 어릴 때는 마음에 품은 그녀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지금은 그녀의 주름을 응시할 용기가 없어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하나의 시간대에서 청년과 노인은 같은 자아로 머문다. 이 회한은 다시 녹음한 ‘시간’으로 이어지며 잠언처럼 피어난다. 젊었을 때도, 나이 들어서도 생기지 않는 용기와 한결같은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다. 솔직한 겸허다. ‘노인의 벤치’ 뮤직비디오는 예순여섯 김창완의 민낯을 담는다. 조악한 조명 앞에 선 그는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고 노래한다.


한국 대중음악계가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둥근 안경과 웃는 표정은 없다. 삶의 부질없음에 지친 듯한 남자의 주름과 수염, 퀭한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1977년 데뷔 이래 늘 세상의 시선과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김창완은 ‘시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냥 날 기억해줘 / 내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 꾸미고 싶지 않아 / 시간이 만든 대로 있던 모습 그대로.” ‘노인의 벤치’에 존재하는 김창완의 마음 한쪽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실제 모습과 가장 유사한 캐릭터로 ‘푸른 거탑’에서 연기한 냉혈한 우용길 원장을 꼽은 바 있다. ‘노인의 벤치’ 그리고 ‘시간’의 김창완은 이를 넘어 ‘앤티크’에서 맡았던, 유괴범 노인의 캐릭터를 연상케 한다. 그의 연기와 음악을 알았던 이들을 모두 놀라게 했던, 가장 쓸쓸한 악인이었다.

김창완의 시간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역시 ‘시간’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듯, ‘글씨 나무’ ‘옥수수 두 개에 이천원’ 같은 동요풍의 노래가 있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보고 싶어’ ‘이제야 보이네’ 같은 노래도 있다. 이 두 곡의 노래에서 그는 각각 천진난만하게 그리고 울먹이다 지친 듯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여러 과정의 감정이 한 앨범에 존재하는 것이다. 콘셉트 아닌 콘셉트 앨범이다.

음악이란 인생을 담는 것이라는 말이 맞다면, ‘문’은 이 명제를 비로소 증명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2012년의 코헨이 그러했듯, 2020년의 김창완은 동쪽에서 솟아 서산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의 일대기를 그렸다. 옅어지는 노을을 불렀다. 이전의 한국 포크, 아니 한국 대중음악이 도달하지 못한 세계가 여기 있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