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 전경.
스페인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 전경.

와인숍에서는 대체로 와인을 생산지별로 구분해 진열한다. 그중에 스페인 와인 코너를 보면 레이블에 ‘리오하(Rioja)’라는 글자가 유독 눈에 많이 띈다.

리오하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인 산지다. 스페인 북부 로그로뇨(Logroño)를 중심으로 포도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곳이다. 리오하 와인의 풍부한 향미와 부드러운 질감에 빠져 와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리오하 와인은 내전을 계기로 고급화의 길로 들어섰다.

리오하 지역은 포도를 기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온화한 기후, 적당한 강우량, 따뜻한 햇볕 속에서 자란 포도는 그 품질이 세계적이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리오하 와인은 스페인 밖에서 명함 한 장 제대로 내밀지 못했다. 오히려 리오하를 방문한 외국인이 와인의 쿰쿰하고 역한 냄새 때문에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문제는 와인을 담는 용기에 있었다. 리오하에서는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 대신 동물 가죽을 뒤집어 만든 자루나 주머니를 이용했는데, 제대로 가공되지 않은 가죽에 와인을 담다 보니 와인에 고약한 냄새가 뱄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리오하 와인의 고급화가 시작됐다. 1833년 스페인 왕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자 세 살배기 외동딸 이사벨이 여왕으로 즉위했다. 나이가 어려 어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대신 통치했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스페인에서는 살리카법전에 따라 여성이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말년에 어렵사리 자식을 얻은 페르난도 7세는 딸이 왕좌를 이을 수 있도록 죽기 전에 살리카법전을 폐지했지만, 그의 동생인 몰리나의 백작 카를로스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카를로스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와 귀족 세력이 이사벨을 지지하는 의회와 정당 세력과 부딪치며 ‘카를로스 전쟁’이 발발했다. 7년간 이어진 이 내전 초기에 카를로스파가 우세하자 이사벨을 지지했던 귀족들이 국외로 망명을 했는데, 그중에 무리에타 후작(Marques de Murrieta)과 리스칼 후작(Marques de Riscal)이 있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에스파르테로 장군의 부관이던 무리에타 후작은 영국에서 나고 자란 덕에 수준 높은 와인을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다. 1844년 카를로스 전쟁이 의회와 정당의 승리로 끝나고 이사벨 여왕이 친정을 시작하자 에스파르테로 장군은 고향인 리오하로 복귀했다. 이때 장군과 함께 이주한 무리에타 후작은 리오하 와인을 맛보고 충격에 빠졌다. “와인에서 역한 냄새가 난다. 포도 품질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쾌한 맛이 나는 것은 양조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회고록에 남길 정도였다. 제대로 된 와인을 만들겠다는 뜻을 품고 무리에타는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4년간 머물며 와인의 오크통 숙성에 대해 공부했고, 리오하로 돌아와 1852년 자신의 와이너리인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를 설립했다.

한편 리스칼 후작은 프랑스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내전이 끝나자 그는 보르도에서 고향인 리오하로 돌아오면서 오크통을 가지고 왔다. 1849년 그는 당시의 최첨단 기술을 적용해 보르도 스타일 와이너리를 설립했고, 1860년 오크통 숙성 첫 와인을 출시했다.

리오하는 운이 좋았다. 1800년대 중반 프랑스의 와인 산지들은 모두 병충해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프랑스 와인을 팔던 와인 상인들이 각지로 대안을 찾아 헤맬 때 이들 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무리에타와 리스칼 후작의 리오하 와인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리오하는 단숨에 고급 와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고 이후 지금까지 스페인 와인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리오하 와인병 뒷면에 등급별로 붙는 인증 마크. 왼쪽부터 리오하 호벤, 리오하 크리안자, 리오하 레제르바, 리오하 그란 레제르바 인증마크. 사진 라 리오하 알타
리오하 와인병 뒷면에 등급별로 붙는 인증 마크. 왼쪽부터 리오하 호벤, 리오하 크리안자, 리오하 레제르바, 리오하 그란 레제르바 인증마크. 사진 라 리오하 알타

숙성 등급별로 즐기는 리오하 와인

리오하 와인 생산량의 90%는 레드 와인이다. 리오하 레드는 템프라니요라는 포도로 만드는데, 과일 향이 풍부하고 신맛과 타닌(떫은맛을 내는 화합물)이 적당해 누구나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와인이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크통 숙성 덕분이었다. 동물 가죽 대신 오크통에서 와인을 숙성한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따라서 리오하 와인은 숙성 기간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최장기간 숙성된 와인은 그란 레제르바(Gran Reserva)라는 등급을 받는다. 이 등급을 레이블에 표기하려면 최소 5년간(오크통 숙성 최소 2년 포함)의 숙성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 와인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뛰어난 복합미다. 질감이 매끄럽고 마른 과일 향이 우아하며 가죽·담배·오크·버섯 등 다양한 향미의 어울림이 탁월하다. 풍미를 최대한 해치지 않고 그란 레제르바를 즐기려면 수육이나 족발처럼 향이 강하지 않은 음식이나 오래 숙성한 치즈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레제르바는 최소 3년(오크통 숙성 최소 1년 포함)의 숙성을 거친 뒤 출시하는 와인이다. 그란 레제르바보다 복합미는 덜하지만 과일 향이 더 달콤하고 보디감이 묵직하며 구조감이 탄탄하다. 레제르바는 두툼한 스테이크처럼 지방질이 많은 육류와 궁합이 잘 맞는다. 크리안자(Crianza)는 숙성 기간이 최소 2년(오크통 숙성 최소 1년 포함)이다. 과일 향이 신선해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리며 피자나 파스타와도 잘 어울린다.

오크통 숙성을 하지 않은 와인은 호벤(Joven)이라 부르는데, 레이블에 별다른 등급 표기 없이 리오하만 적혀 있는 와인이 바로 호벤이다. 맛이 가볍고 상큼하며 가격도 저렴해 데일리 와인으로 즐기기에 좋다. 치킨이나 중국요리처럼 배달 음식과 부담 없이 즐길 와인을 찾는다면 호벤이 제격이다.

가을이 되면 리오하 와인이 유독 맛있게 느껴진다. 같은 땅에서 같은 포도로 만들어도 숙성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내는 리오하 와인이 알록달록 익어 가는 가을 단풍과 닮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가을밤, 육전을 안주 삼아 붉은 리오하 한잔 기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