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거워지면 잠부터 온다. 깨어 있자고 마음먹고 정신을 붙들어 매어 봐도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쏟아지는 잠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회사에서 일하다 사고를 쳤다거나 함께 작업하는 작가로부터 모욕감을 느꼈을 때, 스스로 실망하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자괴감에 빠졌을 때.

수년 동안 반복되는 현상을 보며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다. 잠은 마음의 상처가 아물도록 몸이 스스로 처방하는 회복제라는 것이다. 잠은 건강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상처 회복제다. 의식이 멈춰 있는 동안에는 걱정과 불안, 나쁜 상상과 절망감도 잠깐 멈춘다. 나쁜 생각에 중독돼 있던 의식이 활동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몸에는 긍정적인 신호인데, 그사이에 기억의 삭제도 일어나는 모양이다. 자신에게 너무 해로운 기억은 희미하게 만들어서 시간이 갈수록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런 날이 며칠 반복된다.

세상에는 아무 변화가 없어도 그사이 나에게는 많은 것이 변했다. 잠을 잔다는 건 무방비 상태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지만, 자신을 자기 생각의 피해자가 되도록 몰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무방비 상태야말로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방법이다. 마음이 무거워지면 잠부터 와야 한다. 마음에 이상이 생기면 일단 자자. 생각을 줄이고 빨리 자자.

인생의 끝에 죽음이 있듯 하루의 끝에 잠이 있다. 죽음이 평등한 것처럼 잠도 그렇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어리석은 자든, 지혜로운 자든 모두 고단한 하루의 끝에 잠을 선물 받는다. 정말 그렇다. 잠은 선물이다. 잠드는 순간의 기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고 그런 걸 하나하나 기억에 담아두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단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잠잘 수 없게 하는 형태의 고문이라든지 자고 싶어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되는 불면증 환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없다. 몸이 스스로 처방하는 최소한의 회복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의식을 충분히 쉬게 하지 못한 탓에 그들의 마음은 한참 전에 소진되었을 것이다. 아리아나 허핑턴도 ‘수면혁명’에서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노력 부족이 아니라 수면 부족 때문이라고.

그러나 오랫동안 잠은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됐다.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잠은 유예된 저주의 형태로 등장한다.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해 화가 난 말레피센트가 공주에게 내리는 저주는 열여섯 살 생일에 물레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죽게 될 거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공주를 돌보는 요정이 말레피센트의 저주를 방해하는데, 죽는 대신 깊은 잠에 빠질 것이고 진실한 사랑의 입맞춤이 있다면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저주의 내용을 한껏 완화한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여자가 잠에 빠진 상태에서 진실한 사랑을 운운하는 남자의 키스를 받아 잠에서 깨어나는 기이함에 대한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 작품은 죽음과 잠을 비슷한 것으로 놓으면서도 잠을 소멸로서의 죽음과만 등치시킨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다. 이 이야기에서 잠은 깨어나기 위해 존재한다. 잠은 깨어나는 순간만을 기다린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회복

“이런 생각은 불 끄고 누워서 하는 거”라며 자신에게 이제 빨리 자라고 말하는 화자는 잠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불 끄고 누워서 생각을 이어 나가면, 이내 생각은 멈추고 잠으로 빠져든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불 끄고 누워서 생각하겠다고 말하는 건 의식 너머에서 잠깐 쉬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는 주인공은 애정 결핍, 불안한 엄마, 소외된 마음으로 괴로움 잘 날 없는 중학생 소년이다. 소년에게는 언어장애가 있다. 언어장애는 말이라는 의식의 통행권을 발급받지 못해 다른 사람은 쉽게 드나드는 곳을 진입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소년은 엄마 손에 이끌려 언어 교정원에 다닌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말하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용기도 얻는다. 훗날 소년의 말더듬증이 얼마나 호전됐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소설 쓰기를 통해 문학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문학을 통해 진짜 자기 언어를 찾아가지만 그러한 해피엔딩으로 이 작품의 엔딩을 다 말한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정용준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엔딩은 말로 대표되는 ‘의식’의 세계에서 잠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로 자신을 넘겨줌으로써 의식의 세계에 매달려 있지 않게 된 한 소년이 자신을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소설을 성장소설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성장소설이다.

빨리 자자는 말 뒤에는 내일에 대한 내용이 생략돼 있다. 그래야 내일 일찍 일어나지.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생각은 그만하고 얼른 잠자리에 들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상처로부터 자신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처럼 잠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움직임이나 여행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완벽한 멈춤을 통해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을 때 상처 위에 새살이 돋고 얼룩은 무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잠 못 드는 우리 모두, 얼른 자자. 빨리 자자. 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정용준

198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조선대 러시아어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했다. 2009년 문예지 ‘현대문학’ 신인 추천에 단편소설 ‘굿나잇, 오블로’가 당선되면서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소설 ‘떠떠떠, 떠’로 2011년 제2회 젊은작가상 본상을 받았고, 단편소설 ‘가나’로 2011년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이달의 소설에 선정됐다. 2011년 제2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3년 제4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6년 제7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제5회 소나기마을문학상, 제16회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등단 이래 지속적으로 언어라는 화두를 중심 주제로 삼아 작품 활동을 펼쳤으며 악, 원죄 등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탐구해 왔다. 최근작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그가 쓴 작품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글이다. 작가는 그 이유를 묻는 독자에게 아마도 어린 소년이 주인공이기 때문 아닐까, 라고 대답했다. 소년에게는 무한한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