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과 취향을 한 껏 살린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건 근사한 일이다. 성공이란 어쩌면 그런 공간을 갖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나만의 근사한 공간을 가진 명사들의 ‘특별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

 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가을이 내리고, 그곳에 비가 내리면 어떤 분위기가 날까.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알 리 없는 그 느낌을, 비슷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한상인 교수(외국어대)의 집, 개성농장이다.

 “개성이 고향인 할아버지와 부모님께서 선산과 농장용으로 구입해 놓은 곳입니다. 저는 프랑스로 유학 가서 30년 가까이 파리에 살다가 2001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돌아왔어요. 돌아와 묵을 거처가 마땅치 않자 오라버니가 6개월 만에 지은 집이에요.”

 농장 입구 오른편에 얌전하게 들어앉은 한 교수의 거처가 있다. 37평 남짓한 집은 2층 높이로, 정면과 측면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5~6평 남짓한 건물 앞마당에는 시멘트를 발라 놓았다. 자칫 건조하고 삭막해 보일 듯하지만, 군데군데 박힌 대리석 조각과 어울려 흡사 근사한 설치미술 작품 같다. 더욱이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 빗방울이 튕기는 철제 탁자와 의자가 놓인 풍경을 보는 느낌은 더없이 색다르고 은근하기만 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이국적인 흥취가 더욱 강하게 풍겨온다. 파리에서 30년 동안 살면서 한 교수는 오래된 물건을 하나둘 모았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물건들을 귀국하면서 가지고 들어와 이 집 곳곳에 자리를 잡게 했다. 눈이 띄는 그림 한 점, 집안 여기저기 놓여 있는 촛대 하나까지 모두 한 교수가 프랑스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너른 농장터에 고작 37평짜리 집을 지었을까?

 “집을 지을 당시만 해도 이곳이 그린벨트에 묶여 있었어요. 지금 집이 들어선 자리는 가축을 기르던 축사자리예요. 딱 그만큼밖에 더 짓지 못하게 되어 있었죠. 집을 지으려면 사전에 신고를 해야 하기도 했고요. 사실, 이 집은 신고도 하지 않고 지었어요. 무허가 주택이 된 셈이죠. 집을 짓고 나서 그린벨트가 해제돼 그나마 다행이었어요.(웃음)”

 한상인 교수는 1950~1960년대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 유명했던 ‘개성상회’ 고(故) 한창수 회장의 딸이다. 남한의 대표적인 개성상인 중 한 명으로 꼽히던 한창수 회장은 풍류를 좋아하던 경영인이자, 처신이 깨끗하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평생 ‘미범생(美凡生)’(평범한 삶이 아름답다)이라는 소신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한 회장은,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어려운 시절 도움을 준 보답으로 당신 딸에게 주요 직책을 주겠다’는 제안까지도 깨끗이 거절했던 인물이다. 아버지의 소탈하고 깨끗한 처신과 풍류는 고스란히 딸인 한상인 교수에게 이어졌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37평에 ‘불과한’ 한상인 교수의 집은 지난 5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과 그가 이끄는 실내악단 ‘골든앙상블’의 연주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후원의 밤 행사에 초대된 50~60명 남짓한 손님들이 한적한 서울 교외 농장의 작은 집에 모여 앉아 세계적인 실내악단의 연주를 듣는 ‘호사’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올 여름에는 한 교수의 농장 이야기를 들은 서울교향악단 지휘자 정명훈씨가 전화를 걸어 개성농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교수가 와인 애호가를 넘어 전문가 수준으로, 집 지하에 와인 저장고까지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정명훈씨가 일면식도 없던 한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가족과 함께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 한 교수는 농장 밭에 있는 싱싱한 야채로 샐러드를 만들고, 와인 저장고에 있던 부르고뉴산 와인을 함께 마시기도 했다.

 “프랑스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가벼운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며 인생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살롱문화가 발달했어요. 한국에서는 잘못 인식된 살롱문화가 제 집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면 하는 게 제 소망이에요. 아버지로부터 이런 정신적인 부분만 물려받았지, 물질적인 것은 물려받지 못해서 생각 속에만 있지만요.(웃음)”

 한 교수가 내놓은 향 짙은 커피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비 내리는 농장 풍경에 잠시 눈길을 돌렸다. 가늘게 내리는 가을비 속에 마치 도열한 군인들처럼 줄도 반듯하게 횡대로 심어진 대파와 고추가 눈에 띈다. 한 교수의 어머니가 심어 놓았다는 40년 이상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우직하게 섰고, 대파와 고추가 가지런히 심겨진 밭이 내다보이는 비 내리는 날의 농장 풍광에서는 한 교수의 부친이 평생 지키고 살았던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이 소리 없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