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서른을 넘기며 이렇게 스스로 최면을 걸어 왔고, 그 효과 또한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들이 더 이상 내 나이를 궁금해 하지 않았기에 나 또한 숫자 이하도 이상도 아닌 그런 것으로 생각하며 잘 살아 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 전 생일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허기가 지기 시작한 마음이 쉽게 추슬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독 늦게 찾아든 봄을 탓하기도 하고, 괜히 바쁜 일상을 핑계 삼기도 했지만 상태는 딱히 호전되지 않고 있다.

 멜랑콜리, 아마 지금 나의 좋지 않은 마음 상태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2500년 전 히포크라테스 이론이 참이라면 지금 내게 과잉인 것은 ‘흑담즙’일 것이다. “인간의 몸은 혈액, 담즙, 정액, 흑담즙의 네 가지 체액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 흑담즙이 많아지면 우울증이 걸린다.” 히포크라테스의 사성론(四性論)은 멜랑콜리를 우울증의 일종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해한 판화…‘수수께끼 해독의 즐거움’

 과잉이 결핍을 초래한다고 했던가. 여기 나와 같이 ‘흑담즙’의 과잉으로 심리적 결핍에 직면해 있는 한 여인이 있다. 날개 달린 여인이다. 여인은 지금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뭔가에 골몰하는 중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 ‘멜랑콜리’의 원인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여인의 주변이 심상치 않다. 사방에 흐트러진 물건 때문이다. 마음이 어수선하니 주변을 정리할 겨를이 없었을 테고, 머리가 복잡하니 그것을 해결해 줄 뭔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달콤한 케이크나 감미로운 음악이나 수다를 떨 친구가 아니라니 의아하다. 다면체, 천칭, 모래시계, 저울, 컴퍼스, 정사각형 모양의 숫자판, 막대 모양의 자. 여인의 머리맡에서 발치까지 흩어져 있는 것은 기하학 수업이나 공사 현장에서 접하는 것들이다. 

 이 여인 또한 기능성자기공명장치(fMRI)와 심변박이도(HRV) 등 첨단 장비를 이용, 사랑의 유효 기간이 ‘딱 900일’임을 밝혀낸 어느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수학적인 방법으로 멜랑콜리의 원인을 분석이라도 할 요량인 것일까. 아니면 그림 오른쪽 상단의 마방진 판에서처럼 ‘16+3+2+13, 5+10+11+8, 9+6+7+12, 4+15+14+1’와 같이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34인 논리적 놀이를 통해 멜랑콜리 상태를 잠시 벗어나려는 속내일까.

 16세기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뒤러(Albert Durer 1471~1528)의 ‘멜랑콜리아Ⅰ’는 그의 작품 중 난해하기로 소문난 판화다. 우선 이 그림에서 날개 달린 여인은 멜랑콜리한 천재, 즉 뒤러 자신이자 근대 예술가의 자화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여인은 모두 아홉 계급으로 나뉘는 천사들 중 지식이 뛰어난 두번째 계급에 속하는 케루빔과 함께다. 거기에 여인의 옆에 누운 개와 ‘멜랑콜리아Ⅰ’을 들고 있는 박쥐 형상이 익살스럽게 조응한다.

 여기서 혹자는 제목 뒤에 ‘Ⅰ’을 단순한 숫자로 보기도 하고 혹자는 이것을 ‘꺼져라’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IRE’의 줄임말로 이해하기도 한다. 만약 두 가지 견해 중 후자의 것이 맞는다면 ‘멜랑콜리야 꺼져라’라는 문장으로 그림의 해석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이 그림을 둘러싼 분분한 의견 중 하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여인 주변에 놓인 측량 도구들은 무엇일까. 이번에는 우리 예측이 맞았다. 여인은 예측대로 측량의 과학인 기하학을 통해 멜랑콜리의 원인과 멜랑콜리의 상태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뒤러는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을 동시에 가진 것으로 멜랑콜리를 이해했고, 이러한 멜랑콜리와 예술 사이에는 불가사의한 함수가 존재함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 멜랑콜리는 ‘너무 늦은 호소다, 도와 달라는’이란 에밀 뒤르켕의 말처럼 전도유망한 여배우를 자살로 몰아갈 수도, 뒤러의 ‘멜랑콜리아Ⅰ’처럼 위대한 예술의 영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바랄 뿐이다. 어느 봄날 손님처럼 찾아온 멜랑콜리가 내게도 부질없는 감정의 소모로 끝나지 않기를 말이다.

 ‘세계 문명, 살아있는 신화-대영박물관 한국전’ 2005년 7월10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