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을 알면 알수록 여러 면에서 사람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테루아와 세파주, 즉 훌륭한 와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포도밭을 둘러싼 환경이냐 포도 품종이냐 하는 문제는 와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또 이 두 가지는 와인의 시작이자 끝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포괄적인 주제다.

 프랑스어로 테루아(Terroir)는 토양, 토지, 산지 등을 말하는 개념으로 영어로는 ‘soil’에 해당하는 말이다. 와인에서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 테루아는 포도나무를 둘러싼 모든 자연환경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테루아란 개념을 이처럼 폭넓고 깊이 있게 만든 것은 프랑스인들로, 그들은 보르도(Bordeaux)에서는 300년 이상, 부르고뉴(Bourgogne)에서는 무려 1000년 이상 와인을 만들어 오며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자연과 호흡하며 이 개념을 체득해 냈다.

 우리나라 사람은 프랑스인처럼 와인 양조를 위해 깊이 있게 포도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지만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의외로 테루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이른바 ‘명당’과 운명철학적 ‘궁합’의 결합이 그 열쇠다. 테루아의 요체는 바로 명당자리에다 가장 적합한 포도나무를 심는 것을 말한다.

 좋은 와인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포도가 잘 익을 수 있는 태양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생육에 필요한 만큼 적절한 물이 있어야 하고, 와인에 복잡미묘함(Complexity)을 부여할 수 있는 낮과 밤의 일교차, 와인의 특색을 결정하게 하는 독특한 토질적 특색 등을 갖춰야 한다.

 가령 두꺼운 껍질을 지닌 만생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의 경우, 완숙에 이르기 위해서는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 자갈이 풍부한 토양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낮에 태양열로 충분히 덥혀진 자갈이 해가 진 뒤에도 열을 방사하여 포도의 완숙을 돕는다. 또 자갈 토양은 물 빠짐이 좋아 비가 내려도 금방 배수가 되므로 더운 토양을 좋아하는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종에는  안성맞춤이다.

 이처럼 테루아는 반드시 포도 품종의 특징과 결부하여 이해해야 한다. 한 포도 품종에 좋은 테루아라고 하여 다른 포도 품종에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테루아와 포도 품종 간의 멋진 결합으로 우리는 세계의 유명 와인 산지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와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와인 산지는 각각의 테루아를 갖고, 그에 적합한 다른 품종으로 그들만의 문화를 키워 왔기 때문이다.

 세파주(Cepage)는 포도나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포도 품종이란 의미로도 많이 사용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포도 품종은 테루아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밭에 어떤 포도 품종을 심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은 긴 농사 경험 속에서 검증된 지식과 과학적 고찰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프랑스의 왕이 마시는 와인을 만들어 온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레드와인 양조를 위해 적포도종인 피노 누아(Pinot Noir)를 재배해 왔다. 한때 부르고뉴에서도 피노 누아 이외에 가메(Gamay)라는 또 다른 적포도종을 심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는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그러자 1395년 이 지역의 군주가 칙령을 내려 부르고뉴의 땅에서는 가메 품종을 아예 재배하지 못하게 했다. 반면 이렇게 퇴출된 가메는 부르고뉴의 아래 동네인 보졸레(Beaujolais)에서는 연하고 예쁜 빛에 가벼운 과일향이 가득한 매우 사랑스러운 와인으로 만들어져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석회질이 많은 부르고뉴의 토양은 가메 종에게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군주의 칙령이란 인위적이고 강력한 조치가 없었다면 오늘날 부르고뉴와 보졸레 와인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와인을 아는 사람들이 ‘부르고뉴는 최고급, 보졸레는 소박’이라고 바로 연결지을 수 있는 이 고리의 이음새가 분명 헐거워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게으르고 실험 정신이 부족한 농부들이 성과가 좋지 않은 가메를 계속 고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포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현대에 와서는 최적의 포도 품종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를 경험과 역사적 검증에만 맡기지 않는다. 그 지역의 모든 기상 자료와 지질ㆍ지형학적 특징을 면밀히 분석한다. 시추공을 깊이 내려 토양 샘플을 채취하여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아직도 어느 한쪽에서는 구습을 답습하여 방만하게 포도를 재배하는 경작자들이 있다. 이들은 현상에 대한 새로운 고찰과 개선을 위한 변화를 도입하는 데 매우 느리고 보수적인 집단이다. 최근 30년간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에서 급속한 혁신을 가져온 신세계의 와이너리들이 이룩한 업적은 괄목할 만한데, 이는 테크놀로지의 뒷받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실험과 도전 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탈리아 법이 허락하지 않는 보르도 품종으로 만들어져 법규상으로는 누추한 옷을 입고 태어났으나,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신화가 된 이탈리아의 수퍼 토스카나(Super Toscana), 특급 와인과 곧잘 견주어지는 프랑스 최고의 뱅 드 페이(Vin de Pays)인 마스 도마스 가삭 (Mas Daumas Gassac), 칠레의 콜차구아(Colchagua)의 언덕에 시라(Syrah)를 심겠다고 했을 때 남들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당당히 이름을 폴리(Folly 어리석음)라 짓고 장군과 같이 당당한 위용을 세계 와인계에 뽐내면서 칠레산 컬트 와인으로 등극한 몬테스의 폴리. 이처럼 구습과 남들의 시선에 얽매지 않은 창의적인 시도로 세계적 와인을 빚어 낸 성공 스토리는 세계 각처의 와인 산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면모를 곱씹어 보노라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지와 비전이 강한 사람은 어제와 오늘의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을 볼 줄 알며, 성실한 사람은 내일의 발전을 위한 오늘의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포도나무는 말이 없지만 어떤 테루아에서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자 부단히 애쓴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의 노력과 최적의 환경을 알아봐 주는 혜안의 소유자를 만나야 비로소 최고의 와인으로서 결실을 맺게 된다.

 테루아인가, 세파주인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놓고 애써 다툴 필요는 없다. 그거야말로 눈 초롱초롱하게 뜨고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엄마가 더 좋아, 아니면 아빠가 더 좋아 하고 묻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