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은 대단히 많다. 와인에 대한 단편적이거나 때론 그릇된 정보와 제한된 경험의 틀 속에서 생겨나는 오해와 편견 중에는 와인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것들도 많다. 필자가 이번에 짚어보고자 하는 것은 복잡한 양조 과정상의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원재료인 포도를 어떻게 조달하고 양조에 활용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블렌딩(Blending)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블렌딩은 몇 개의 포도 품종을 섞어 조화로운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블렌딩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고 맞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와인에 있어 블렌딩은 어떤 의미인가.

 와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소비자라면 보르도(Bordeaux) 와인이 적게는 두 가지에서 많게는 다섯 가지의 포도 품종을 혼합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각 포도 품종간의 장점을 두루 취함으로써 만들어진 와인은 넓은 맛과 향의 스펙트럼을 갖고 뛰어난 복합미와 조화미를 갖게 된다. 400년 정도의 와인 생산 역사를 지닌 보르도가 오늘날 세계 와인계의 정상에 위치한 것은 바로 탁월한 블렌딩의 미학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블렌딩의 진수를 보여주는 다른 와인 산지로 프랑스 론(Rhone) 남부의 샤또뇌프 뒤 빠프(Chateauneuf du Pape) 지역을 들 수 있는데, 이 지역 와인법규상 무려 13가지에 달하는 포도 품종을 사용하여 와인을 양조할 수 있다. 또한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는 3개의 포도 품종을 사용하여 세상에서 가장 짜릿하고 섬세한 발포성 와인을 만들며, 이탈리아에서도 베네토(Veneto) 지역의 전통적 명주인 아마로네(Amarone)를 양조할 때 3개의 품종을 사용하여 복합적인 향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와인을 만든다.

 블렌딩의 기술을 예술의 경지로 꽃피운 곳은 전통의 와인 산지인 프랑스 보르도이며, 지금도 세계적 명주들이 이 지역에 위치한 샤또(와인성)들로부터 이품종간의 절묘한 결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와인에 있어 행해지는 블렌딩에 대해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블렌딩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이면은 없을까?

 품종간 블렌딩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일 품종 와인이 연출하지 못하는 다채로움을 주기 위해서다. 또한 매년 품질의 기복이 적은 와인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매 빈티지마다 특색이 다르고, 모든 포도 품종의 작황과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커버하려는 것이다.

 해마다 품질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와인 생산자들은 빈티지간 블렌딩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샹파뉴 지역에서 만드는 빈티지 미표기(Non-vintage Champagne) 샴페인이다. 샹파뉴(샴페인의 프랑스어 발음)는 프랑스에서 가장 추운 와인 산지로 해마다 기후의 기복이 큰 지역이어서, 이 지역의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가장 기본급인 빈티지 미표기 샴페인을 만들 때 주가 되는 빈티지의 와인에 그로부터 몇 년 전 때로는 매우 오래 전의 빈티지로부터 만들어진 와인을 섞음으로써 품질과 맛의 일관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다.

 또한 빈티지가 표기된 일반적 와인에서도 표시된 빈티지 이전 빈티지의 와인이 블렌딩된 경우가 많은데, 그 지역의 법규가 허락하는 선에서 소량으로 과거 빈티지 와인을 혼합함으로써 역시 품질의 균일성을 기할 수 있게 된다. 미국 와인에서도 이러한 예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앞서 품종과 빈티지가 블렌딩의 대상이 된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A라는 와이너리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100% 사용하고, 1997 빈티지로부터 얻은 포도만을 사용하여 만든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1997’이란 와인은 블렌딩 없이 만들어진 것일까?

 여기에 대한 정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인데, 이 문제의 정답을 결정하는 열쇠는 ‘포도밭의 선택’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를 나파 밸리에 위치한 어느 한 포도밭에서 조달했을 수도 있고(이 경우를 단일 포도밭 와인이라고 한다), 여러 포도밭에서 분산 조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블렌딩에 있어서 자주 간과되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바로 밭과 밭 간의 블렌딩이다. 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어느 포도밭에서 재배되느냐, 즉 테루아(Terroir)적 특성에 따라 그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같은 포도 품종이라해도 햇볕을 흠뻑 받고 자랐다면 완숙하며 폭발적인 힘을 가지게 되고, 서늘한 기후에서 자랐다면 차분하고 우아하며 보다 섬세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 각기 특성이 다른 밭들에서 재배된 포도를 고루 사용함으로써 와인 메이커들은 자신이 의도하는 성격을 와인에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 미국 나파 밸리를 여행하다 여러 명의 와인 메이커들을 만나 단일 포도밭 와인(Single vineyard wine)이 만들기 쉬운지, 아니면 여러 포도밭으로부터 만든 와인이 만들기 쉬운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필자는 단일 포도밭 와인이 훨씬 간단히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질문을 던진 것인데, 의외로 대답은 단일 포도밭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한결같이 “단일 포도밭 와인은 그 밭의 개성을 정확히 읽어 와인으로 구현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 포도밭이 가지는 단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커버하는 것이 어렵고, 특히 힘든 빈티지에는 더욱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와인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밭과 밭을 섞는 것은 신세계의 대형 생산자들이 대량으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고, 단일 포도밭 와인은 주로 구세계의 소규모 생산자들에 의해 시작, 발전되어온 방식이다. 또 구세계 생산자들이 블렌딩의 노하우를 도도히 지켜가는 동안 신세계의 생산자들은 보다 직설적인 단일 품종 와인에서 큰 성과를 올려왔다.

 구세계의 와인이 속이 깊고 말수가 적어 시간이 지나야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신세계의 와인은 보다 직설적이고 화통하고 말이 잘 통해서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사람과도 같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최상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와인 메이커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의 범위 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한다.

 와인을 만드는 데 있어서의 다양한 선택은 소비자에게도 선택의 다양성을 준다. 블렌딩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문제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밭에서 잉태되고 자라난 포도가 양조자의 손길을 거쳐 병에 담기고, 라벨이라는 옷을 입으면 상품으로서의 와인이 존재하게 된다. 와인은 기쁨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한 잔의 와인을 통해 기쁨을 찾을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