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빼앗긴 잠자는 공주 눈을 내리뜬 성모 텅 빈 눈의 순결한 비너스…
 적으로 여자의 눈은 많은 칭송을 받아 왔다. 크고 아름다운 여자의 눈, 별처럼 반짝이거나 호수처럼 깊어 풍덩 뛰어들고 싶은 여자의 눈은 짙은 속눈썹 아래 더욱 강조되면서 뭇 남성문학가들과 화가들을 사로잡아왔다. 그런데 이 오랜 칭송의 역사 그 어디에서도 여자의 눈은 애초의 기능과 관련되지 못했다. 그뿐인가. 이 별이 아무 데서나 반짝이거나 그 호수가 아무 데서나 일렁이는 것 역시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남자의 눈이 당당하게 직시하는 모습에서 매력을 발휘한다고 간주된 반면, 여자의 눈은 공손하고 다소곳하게 내리뜬 모습에서 미덕을 갖게 된다고 강조되었다.

 서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존경을 받았으며 여자 이상의 여자로 간주된 존재, 그리고 단일 존재로서는 아마도 가장 많은 그림에 등장했을 여성, 바로 성모의 눈이 그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혹은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나 멍하니 있을 때나 대체로 눈을 내리뜨고 있는 모습이다. 라파엘로의  ‘대공의 성모’나 벨리니의  ‘성모와 성인들’을 보면 아기예수를 안고 있음에도 이후의 비극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슬픔의 분위기를 풍기는 성모는 눈을 반 이상 감은 상태이다. 이처럼 내리뜬 성모의 눈은 그녀에게 (아마도 비극적인) 품위를 더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왜 여자의 품위는 눈을 내리떠야 할까. 품위 있는 남성들로 간주되는 왕족들, 귀족들의 초상화를 보면 당당하게 앞을 바라보는 모습 속에서도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말이다. 품위 있는 눈에도 성차가 적용된다는 사실은 좀 씁쓸하다. 게다가 내리뜬 눈으로 대체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결국 여자의 눈은 바라보는 눈으로서의 기능보다 보이는 눈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눈을 빼앗긴 잠자는 공주들, 눈을 내리뜬 성모들, 텅 빈 눈의 순결한 비너스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들의 아름다움이 표준으로 제시되기 시작하면서 물레바늘도 필요 없게 되었다.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눈 감는 법을 배웠으니까. 그뿐이겠는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 그리고 가장 먼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볼 것이 남자의 눈이라는 사실까지 온 몸으로 익혔다. 눈은 영혼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눈은 육체의 거울이다. 적어도 여자들에게는 그렇다. 아주 오랫동안 영혼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여자의 눈이 무언가 ‘영혼’ 비슷한 것을 비춰 보였다면 그것은 남자들의 것, 즉 남성적 환상·시각·요구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다.

 벨리니의  ‘몸단장하는 여인’, 루벤스의  ‘화장하는 비너스’, 벨라스케스의  ‘화장하는 비너스’ 등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혹은 화장하는) 여자들’을 다룬 그림들도 꽤 많다. 대개 그 여자들은 젊고 아름답다. 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어쩌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여자들의 눈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닌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내가 나를 본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남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가꾼다는 이야기도 된다. 아니 남의 시선은 배제하고 나의 눈만으로 바라본다고 할지라도,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의 분리는 막을 수 없다. 이때 바라보는 나의 눈은 남의 눈인 것이다.

 남의 눈에 의한 대상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완벽한 나르키소스가 되어 자아도취에 빠지는 방법이다. 여자 나르키소스의 진면목은 로제티의  ‘릴리트’에서 볼 수 있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 릴리트의 눈을 보라.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 속에 푹 빠져있다. 그런 몰입 속에서는 보는 나와 보이는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굳이 거울을 들지 않더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것을 거울로 만들고 결국 자기 주위로 거울 벽을 쌓는 극단적인 자기애의 단계에 이른다.

 그런데 이 거울 벽은 기껏 뜨고 있는 눈을 위협하는 또다른 함정에 불과하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뜬다 해도, 시선을 어느 방향으로 둔다 해도, 바라보는 것이 자기밖에 없다면 그것은 눈을 감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아도취의 절정에서 뛰어든 거울감옥은 또 다른 종류의 실명이라 볼 수 있다.

 도대체 눈을 뜨고 있는 것과 감고 있는 것이 뭐 그렇게 문제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 답은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그리고 마네의  ‘올랭피아’를 함께 놓고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세 그림 모두 육감적인 나체를 드러내며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신·여인을 다룬 것으로, 특히 앞의 두 그림은 인물의 자세와 몸매가 아주 흡사하다.

 그런데도 두 그림의 분위기는 물론이고 그려진 여성에게서 받는 느낌은 무척이나 다르다. 그림의 배경과 여자의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르조네의 비너스는 자연 속에 누워 있으며 눈을 감고 있다.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실내로 들어와 누워 있을 뿐 아니라 눈을 반짝 뜨고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조르조네의 비너스가 관능적이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여신이라면,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끈적이지는 않지만 몹시 유혹적인 ‘땅의 비너스’, 욕망을 드러내고 보는 이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줄 아는 ‘여자’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올랭피아’의 여자 역시 앞의 두 비너스와 비슷한 자세로 기대고 있으며, 왼손을 음부 근처에 두고 있는 것까지 똑같다. 그러나 그녀는 한결 세속적이고, 구체적이고, 강하다. 앞의 그림들에서 볼 수 없었던 머리의 꽃이나 슬리퍼, 목걸이, 팔찌 같은 장신구의 영향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사실 이 장신구들은 그 여자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녀가 상대의 욕망을 파악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남성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거의 냉소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드러내 보이는 힘은 그녀의 시선에서 찾아야 한다. (이 세 그림만 놓고 볼 때 여성의 지위가 낮아질수록 눈의 크기가 커지고 있다는 흥미로운 발견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세 그림 모두 누드이고 시기적으로  ‘올랭피아’가 가장 늦게 그려진 그림이다.  ‘올랭피아’의 여인은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의도도, 유혹하고자 하는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르조네나 티치아노의 그림이 아니라 마네의 그림이 당대에 커다란 물의를 빚으며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문제는 여자가 옷을 벗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바라보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도 교태를 부리며 살짝 훔쳐보는 것이 아니다. 그 눈은 ‘나는 네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보시기에 지극히 불편한’ 여자의 눈은 마치 삼손의 눈이 그랬듯 ‘상징적이고 강제적인 실명’의 시련을 거칠 수밖에 없다. 뭉크의  ‘마돈나’, 모딜리아니의  ‘눈동자 없는 여인들’, 그리고 롭스의  ‘포르노크라테스 혹은 돼지를 몰고 가는 여인’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의 눈은 아예 퀭한 구멍처럼 뚫리든지, 눈동자를 잃든지, 혹은 눈이 가려진 채 벌거벗고 (그나마 돼지를 끌고 가는 것도 아니라) 돼지에게 이끌려간다. 돼지가 상징하는 것은 무지와 맹목적인 욕망 등등일 것이다. 아기천사들이 악동처럼 기뻐하며 주변을 날아다니고 ‘악마에게 사로잡힌 여성’은 말 그대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다. 그림 안에서도 이럴 진데, 마네의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세인들에게 그토록 비난을 받은 까닭이 부분적으로 벌거벗은 여자들의 ‘눈·시선’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그럴 법하게 다가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