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눈이었다. 늦잠으로 인해 ‘매우 빠르게’로 시작된 나의 아침은 ‘가능한 한 빠르게’로 템포를 바꾸어야 했다.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 주고 간신히 화랑에 도착해 숨을 고르는 순간 내 눈에 달력이 들어온다. 오늘 날짜에 선명하게 그려진 붉은 동그라미. 대체 저것은 또 무엇일까. ‘피는 꽃 지는 마음-김지하 달마’전(展) 오픈. 달력을 당겨 보니 이렇게 써 있다. 화랑에서 일한 지 햇수로 8년, 전시 개막일을 깜빡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에 망연자실했다.

 ‘어제가 공휴일이기 때문이었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확히 알고 있었잖아. 게다가 오늘은 갑작스럽게 눈도 내렸고’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좀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어.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니’라는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나에 대한 위로와 질책 사이를 긴박하게 오가면서 결국 나는 묻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했던가. 나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뭔가가 필요했고 마침내 그것을 찾았다. 내가 찾은 신뢰할 만한 의료진, 효능 있는 진통제는 ‘나는 누구일까’를 화두로 작업하는 바이런 킴의 전시 소식이었다.

 바이런 킴은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라는 주제는 그에게 자연스럽고 또 절실한 문제였다. ‘나는 누구일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그 해법은 간단한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이런 킴의 경우는 그러했다. 어려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의외로 단순한 방법을 택했다.

 그가 적용한 간단한 수식은 크기가 25cm 남짓인 단색 패널들이다. ‘제유법’, 너무 단순해서 당황스럽기까지 한 이 작품의 제목이다. 제유법은 사물의 한 부분이 전체를 가리키거나, 사물 전체가 부분을 가리키는 수사법의 일종이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에 출품, 반향을 일으켰던 ‘제유법’시리즈는 규격화된 단색 패널 조각들이 전체를 이루는 구조다. 이 패널들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패널의 색이다. 이 색들은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브루클린에서 작업하는 바이런 킴이 실제로 만났던 다양한 인종의 피부색이었다. 그는 각기 다른 색면 부분을 잇대면서 계속 자문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하지만 이 질문에 그가 답하는 방법은 ‘제유법’에서처럼 늘 직접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번에는 화면 전체가 차분한 녹색을 머금는다. 노골적이지 않은 녹색 화면은 충일한 침잠을 청한다. 예일대에서 시를 전공했고 한때 시인을 꿈꾸었던 탓일까.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 작업인 ‘고려청자유약’은 한 편의 시와 같다. 그것도 여운의 꼬리가 길어 무척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 말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정치적 현실을 서정적 시구로 걸러낸 시인 윤동주처럼 피부색과 유년의 기억, 그리고 정치적 사건을 넘어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초월을 이루고자 하는 바이런 킴. 2004년 버클리를 시작으로 서울, 샌디에이고, 노스캐롤라이나, 시애틀을 거쳐 올해 애리조나를 마지막 일정으로 하는 이번 대규모 순회전에서 그의 작업들은 그 앞에 선 관객들에게 쉼 없이 물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2005. 3. 11~5. 8 로댕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