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적인 유럽의 와인 생산은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와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실제 생산량도 많고, 최고급 와인이 많이 나오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1병에 1000달러를 호가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블루칩’ 와인의 고향이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갈색이 돌도록 오래 보존한 독일의 아이스바인이나 희귀해서 수집 대상이 되는 올드 빈티지의 헝가리안 토카이가 얼굴을 내밀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호사적 취미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싸구려 테이블와인이나 심지어 다른 싸구려 와인을 만들 때 블렌딩하기 위해 쓰던 유럽 남부 지역 와인들이 무서운 기세로 미래 와인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남부 랑그독-루씨옹 지역의 와인들. 지역 사람들이 주로 하우스와인으로 소비하고, 도시로 팔려 나가는 경우에도 아주 싼 값의 테이블와인 대우를 받던 이 지역 와인들이 비로소 제값을 받게 된 것.

 프랑스의 와인 법규는 AOC 제도를 근간으로 지역별 와인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등급상 AOC를 받지 못하던 이 지역의 와인들이 오히려 그 제도의 허점에 대항하는 와인으로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프랑스의 AOC 제도는 사실 와인의 가격과 거의 일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AOC 정도의 등급도 받지 못한 뱅 드 따블 와인(Vin de Table;테이블와인, 싸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은 그저 물값과 비슷한 수준의 가격으로 팔려 나갔다. 그런데 각성한 이 지역의 생산자들과 투자자들이 뱅 드 따블의 상표로 고가 와인을 조금씩 시장에 내놓고 있다. 오랜 프랑스 와인 가격과 AOC의 일치라는 전통이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통 로쉴드’ 같은 최고급 와인과 ‘무통카데’라는 대량 생산 와인으로 유명한 바론 필립 로쉴드사가 이 지역에 투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랑그독-루씨옹만 그런 게 아니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와인도 그런 변혁의 세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 와인은 주정이 강화돼 달고 진한 테이블와인, 혹은 값싼 화이트와인이 대부분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유명 와인 메이커인 프레스코발디, 안티노리사들이 이 지역에 이미 투자를 하거나 투자를 계획중이다. 유럽 남부 와인을 주목하라는 얘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입에서도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칠리아 와인의 독특한 풍미는 테루아 때문

 시칠리아의 기후는 매우 혹독하다. 강수량이 지나치게 적고, 토양은 척박하다. 좋은 와인은 원래 적은 강수량과 척박한 토양에서 빚어지지만 시칠리아는 그 정도가 심하다. 시칠리아의 포도밭에 가면 아주 작은 포도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포도송이 숫자도 매우 적다. 바로 거친 시칠리아의 기후와 토양 조건에 맞춰 포도나무를 관리하기 때문이다. 비가 적으니 당연히 포도송이 숫자가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대신 포도는 아주 달고 단단하다. 보통 시칠리아의 레드와인이 14도 내외, 심지어 15도에 육박하는 알코올 도수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높은 알코올 도수에 훌륭한 와인 생산 기술이 접목되면서 시칠리아 와인이 고급화 시대를 맞게 됐다. 돈나푸가타, 타스카 달메리타, 스파다포라, 쿠수마노 같은 생산회사들이 이를 주도하고 있다. 주로 지역 토착 품종인 네로다볼라를 심지만 뛰어난 품질을 내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르도네 같은 국제 품종도 잘 자란다. 특히 이런 국제 품종은 기본 품성은 원래의 개성을 반영하면서도 시칠리아라는 독특한 테루아(토양 환경)에 걸맞는 독보적인 맛과 향을 내서 시칠리아 와인의 전성 시대를 이끌고 있다.

 유럽 남부 와인의 전통적 강자인 스페인 와인의 약진도 이런 경향에 맞아떨어진다. 한국에 수입되는 스페인 와인 중 ‘상그레 델 토로’란 제품이 있다. ‘투우의 피’란 뜻이다. 스페인의 상징 같은 투우의 피라니! 너무도 잘 지은 이름이란 생각이 들어 잊혀지지 않는 와인이다. 이처럼 스페인 와인은 정열과 힘이 느껴진다. 와인을 설명할 때 ‘테루아’란 말을 꼭 거론한다. 테루아는 직역하면 ‘땅’이란 뜻이지만 와인에선 토양과 기후, 만드는 사람들의 기질, 재배와 양조 방법까지 아우른다.

 그런데 나라별 와인을 마시다 보면 그 와인의 느낌과 테루아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보르도의 힘찬 맛과 향, 부르고뉴의 우아한 전통미, 프로방스의 토속적인 건강함 따위가 떠오른다. 이탈리아도 그렇다. 시칠리아 와인에선 짙고 강렬한 풍미의 남방 계열의 낙천성이 생각나는 것이다.

 스페인 와인은 대체로 두 가지 이미지를 던져준다. 하나는 시칠리아 와인처럼 낮은 위도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갖는 짙은 풍미다. 또 하나는 오랜 전통에서 비롯하는 정제된 맛과 우아함이다. 스페인은 열정적인 힘의 와인만 있을 것 같은데 고전미는 조금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다르게 얘기하면, 보르도 와인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이는 역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유럽 와인 역사에서 필록세라를 빼놓을 수 없다. 포도뿌리혹벌레로 번역되는 이 질병은 19세기 중반 유럽의 주요 포도밭을 거덜내 버렸다. 프랑스의 와인 생산업자들은 이 질병에 감염되지 않은 스페인과 칠레로 건너가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스페인과 칠레에서 프랑스 스타일의 와인이 많이 생산되는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스페인은 낮은 위도 때문에 대체로 일조량이 풍부하고 기온이 높다. 이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높고, 품질이 뛰어나다. 생산량은 세계 1위를 번갈아 차지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35% 내외로 세계 3위권이다. 그중 리오하 지역의 와인을 최고로 친다. 이 지역 와인은 보르도 스타일이 많이 생산된다.

 스페인의 와인 등급 제도는 이탈리아와 비슷하다. 프랑스가 언뜻 단순해 보이는 AOC 등급에서도 세부적인 생산 지역마다 등급을 따로 매기는 방식으로 매우 복잡한 데 비해 이탈리아는 DOC 등급만 정하고 그 안에서 따로 세부 등급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와인숍에 들르게 되면, 시칠리아와 스페인 와인을 골라 남부 유럽의 힘찬 맛과 향을 느껴 보시라. 한국에도 충분한 양이 소개되고 있어 구입에 어려움은 없다. 다만 프랑스 남부 랑그독-루씨옹 지역의 고급 와인은 찾기 힘들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Plus 이 달의 …

 바바 스트라디바리오 97  & 아르베스트 97

 Bava, Stradivario 97 & Arbest 97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 생산 지역인 피에몬테에서도 매우 독특한 와인 생산과 경영 철학으로 유명한 바바사의 두 가지 바르베라 와인이 국내에서 출시돼 눈길을 끌고 있다. 바르베라 품종은 피에몬테 고유 품종으로 건조하고 신맛이 강하며, 중간 정도의 바디를 가진 개성 넘치는 품종이다. 캘리포니아 일부 지역에서 이탈리아계 이민들이 재배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탈리아 안에서도 피에몬테에서만 생산된다. 식사에 늘 곁들이는 저렴한 가격의 제품부터 100달러가 넘는 고급 제품을 아우른다.

 스트라디바리오는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의 현악기 명장 스트라디바리의 이름(제작한 현악기도 똑같이 스트라디바리오로 불린다)을 따서 명명된 바르베라 100% 와인. 바롤로 지역에서도 유명한 몬페라토 인근에서 수확한 포도로 담그며 97년 빈티지는 매우 훌륭하다고 알려져 있다.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적절하면서도 개운한 산도가 ‘라운드’한 맛이 특징이다. 프루티 디 보스코(피에몬테의 산딸기)의 자극적이면서도 시원한 맛과 오크 숙성의 원숙미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그윽하게 조화된다. 바르베라 와인으로는 최고봉에 놓아야 할 와인. 짙은 풍미의 쇠고기 등심 스테이크, 석쇠로 구운 양갈비 등과 훌륭한 매치를 보여준다.

 아르베스트(출시명 알베스트)는 몬페라토 사투리로 ‘경사지’란 뜻을 갖고 있다. 경사는 좋은 와이너리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 좋은 테루아와 바르베라의 요염한 개성, 바바사의 세련된 양조법이 잘 맞물린 뛰어난 상업 와인이다. 스트라디바리오보다 세련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라구 소스(토마토와 고기류로 만든 진한 소스)의 파스타, 소스가 가벼운 모든 육류 요리와 잘 어울리겠다. 문의 아간코리아 (02)2203-0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