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인들의 위기 탈출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국가가 거의 해체될 듯한 위기 상황도 슬기롭게(?) 극복해 왔기 때문이다. 아스테카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정복되어 국가가 해체되면서 식민지로 전락, 무려 300년이란 긴 세월을 억압받으면서 살아 왔다. 이 기간 동안 새로운 혼혈 종족인 메스티소가 출현하게 되고, 이에 따른 혼합 문화가 형성된다. 과거의 흔적은 희미해졌고, 더군다나 언어마저 정복자의 산물인 스페인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3세기에 걸친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 독립한 신생국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라 이름을 아스테카의 원래 국명이었던 멕시코로 정한다. 끊어졌다 다시 이어진 멕시코는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끊기듯 이어지며 ‘단절의 전통’을 만들어 간다. 독립 후 19세기에는 프랑스의 간섭으로 왕정이 수립돼 한 나라에 2개의 정부가 있었는가 하면, 20세기 벽두에는 온 국토를 화약 냄새로 뒤덮은 멕시코혁명이 발발했다. 1980년대에는 외채 위기로 국가가 거의 거덜나기도 했다.

 이러한 부침 속에서 멕시코인들은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능란한 처세술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게 됐다. 미래를 위해 한신이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간 것처럼 몸을 낮출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어떠한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내일을 꿈꾸는 낙천적인 국민성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낙천성은 인고의 세월 속에서 축적된 슬픔이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따라서 멕시코인의 웃음은 슬픔의 그림자를 지녔고, 슬픔 역시 기쁨의 색조를 띠고 있다. 조크마저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멕시코인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예수가 멕시코인이지 않았을까 하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살펴보자.

- 진짜 도둑은 용서받은 반면에 예수는 처형됐다.

- 죽었을 때 손바닥만한 천 조각만 걸치고 있었다.

- 가족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 무슨 영문인지 이미 없었다.

- 가난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들은 매일매일 늘어났다.

- 세금을 내지 않았다.

- 창녀들과 잘 지냈다.

- 친구들과 함께 한 마지막 만찬 식비를 지불하지 않았다.

- 물만 있는 모임에서 신비롭게도 더 많은 술을 나타나게 했다.

- 항상 이유가 있었다.

- 돈이 단 한푼도 없었다.    

- 경찰에 의해 납치됐다. 



 멕시코 자신을 비하하고 있지만 그곳에는 건강한 자긍심이 드러난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삶의 강한 추진력이 될 수 있다. 다시 서 있기 위해 잠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멕시코인들이 잘 쓰는 말 중에 ‘니 모도(ni modo)’가 있다. 직역을 하자면 ‘이도저도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어쩔 수 없다’는 정도가 되겠다. 멕시코에서 이 말을 처음 접하면 곧잘 책임 회피나 무기력함의 표현으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니 모도’는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가장 인간적인 말이다. 우주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신의 섭리에 피조물인 인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신 앞에 선 겸손한 생명체의 모습, 그것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의 투쟁심과 영웅심을 저버릴 수 있을까.

 스페인군의 출현을 보고받은 아스테카제국의 목테수마 황제의 입에서도 나우아틀어로 분명히 ‘니 모도’가 읊조려졌을 것이리라. 동쪽 바다에 출현한 정체불명의 인간들을 돌아온 신 ‘켓살코아틀’로 착각하며 숙명론에 시달렸던 황제의 어리석음보다, 어쩌면 신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따랐던 순박한 삶의 모습에 측은지심까지 느껴지는 것은 어떤 일인가. 삶에 매달려 억척을 떨고 있는 우리에게 멕시코인들의 ‘니 모도’는 한 걸음 물러서고 돌아갈 줄 아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