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의 황량한 풍경 사이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던 오아시스는 불모지의 생명줄이었다. 중국의 신장과 간쑤성의 도시들은 대규모 캐러밴(caravan)들이 다니던 길 주변 오아시스에 세워졌다. 우루무치와 둔황, 투르판, 캬슈카르 등이 모두 그 당시 번성했던 오아시스도시들이다. 대륙을 연결했던 길, 실크로드는 마치 징검다리처럼 이들 오아시스도시들로 이어진다.

 크로드의 첫 기착지는 우루무치다. 몽골어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의 우루무치는 텐산산맥(天山天脈)으로 둘러싸인 고원으로, 해발 900m에 위치한 신강성 위구르족(몽골리아 투르크계 부족) 자치구의 수도다.

 우루무치와 둔황, 투루판 등은 2000년 전부터 번성했던 오아시스도시들이다. 그 중 우루무치는 텐산산맥 북쪽에 있는 중가리아 분지의 남단에 위치한 도시로, 산기슭 남쪽에는 광대한 사막 타크라마칸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1월과 7월의 기온차가 40~50도나 되는 대륙성기후로 연간 강수량은 150~200mm밖에 되지 않는 메마른 지역이다. 또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해가 지기 시작하는 백야(白夜)로 유명하다. 이곳은 베이징의 표준시간을 적용받는데, 10시40분이 넘어서야 해가 지기 시작한다. 낮에는 한가롭던 거리가 일몰 뒤에야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부산하다.  사람들 사이사이로 우루무치 거리를 활보하는 짙은 적색 택시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야시장 곳곳에는 저민 양고기꼬치를 구워 파느라 짙은 연기가 여기저기 피어올라 마치 불이라도 난 것 같다.

 우루무치는 실크로드를 잇는 도시들 가운데 가장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의 1980년대를 연상케 하지만, 어엿한 시가지를 형성하고 관광객들을 위해 다양한 관광상품까지 마련해 놓고 있다.

 일찍부터 텐산을 경계로 북방민족들이 끊임없이 남하해 정착해 이뤄진 우루무치의 역사는 기원전 5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무제가 서역과 교역로를 트기 위해 흉노를 제압하고 이 지역을 장악한 후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면서 한족의 병사들과 개척민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13세기 들어 칭기즈칸이 이곳을 정복했으나, 1884년에 청의 건륭제가 신장으로 명명하고 중국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중앙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현지의 군벌세력이 주로 지배해 오다가, 1949년 인민해방군이 신장성의 수도인 우루무치에 진주하면서 실질적으로 중국 영토에 포함됐다. 그리고 7년 후인 1955년 10월1일 자치구가 됐다.

 과거 실크로드의 거점인 오아시스마을의 하나였던 우루무치는, 현재 고층빌딩과 화려한 가로등이 대로에 늘어서 있는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1963년 완공된 총 1892km의 란저우와 우루무치 구간의 철도건설은 우루무치의 현대화에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이 철도를 따라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로 국제열차가 오가고, 우루무치는 지금도 변함없이 동서교역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실크로드 여행에서 우루무치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둔황 시이다. 둔황은 당허강 하류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도시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이자 동서교역의 거점이었다. 그 옛날 번창했다는 둔황이란 도시는 사라졌지만,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막고굴’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 막고굴은 둔황 동남쪽에 위치한 명사산 동쪽 기슭에 세워져 있다. 일반적인 사찰과는 또 다른 형태로 수많은 불상과 불교 관련 벽화 등이 남아 있는 가치 높은 유적이다.

 막고굴은 서기 366년 한 승려가 산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그곳을 성지로 정한 뒤 굴을 파기 시작해 형성된 곳이다. 삼위산과 명사산이 좁은 골짜기를 만들고 있는데, 거기에 작은 오아시스들이 푸른 띠처럼 놓여 있고, 그 절벽 사이로 1600m 길이의 막고굴이 위치해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벽화다. 총 1045폭의 벽화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당나라 때 유행한 서방정토변으로, 극락을 나타낸 아름다운 회화다.  막고굴 벽화 앞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할 말을 잃게 마련이다. 거대한 모래성 안에 형형색색으로 그려진 벽화는 세계의 어떤 언어나 문화유산도 하잘 것 없이 느껴지게 만들 정도다. 그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맑고 순화된 영혼의 집이자 미래를 향한 지고지순한 꿈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막고굴은 올해까지만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내년부터는 문화재로 보호할 예정이다. 대신 방대한 막고굴을 그대로 복원한 박물관을 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