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라벨(label)은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다. 와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은 그저 ‘2000’이나 ‘1999’가 빈티지이며, ‘13%’니 하는 알코올 도수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암호일 것이다. 덧붙여 국제 기준에 따라 ‘Product of France’ 같은 가장 초보적인 원산지 표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다. 그래서 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벨 읽기가 가장 우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와인 라벨은 그저 오래 들여다본다고, 많이 마셔서 라벨을 ‘외운’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강 카테고리를 나눠도 전 세계 수천 종의 와인 라벨을 어떻게 다 외울 수 있을까. 각 나라별 라벨 표기에 관한 기초적인 상식과 법칙을 모르면 그나마 외운 라벨조차도 별 쓸모가 없어진다.

 여기서는 나라별 라벨 읽기 같은 조금은 복잡하고 곤란한 작업은 포기하고, 와인 생산업자가 소비자를 현혹하기 위해 새기는 문구를 정면으로 돌파해 보자.

 무지한 소비자를 속이기 위해 생산업자가 가장 많이 쓰는 ‘수법’은 법으로 규정된 표기 사항 외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랜드, 리저브, 베스트’ 같은 낱말이다. 그랜드(Grand, Gran)를 공식적으로 쓰는 나라의 와인은 프랑스와 스페인밖에 없다. 프랑스 와인 품계 가운데 최고의 자리에 놓여 있는 그랑 크뤼(Grand Cru)와 스페인 와인 중에 5년 이상 숙성시켰다는 표시로 쓰는 그랑 레제르바(Gran Reserva)다. 이들 나라에서 이런 표시는 반드시 필요 요건을 충족시켰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므로, 좋은 와인의 대명사로 봐도 된다. 뒤집어 보면, 이들 나라의 와인 가운데 이런 낱말을 불법으로 썼다가는 법적 처벌을 받게 되므로 사실상 소비자를 현혹시킬 가능성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경우는 별도의 규제가 없는 한 자유롭게 라벨에 표기할 수 있다.

 리저브(Reserve, Reserva, Riserva)의 경우는 그랜드의 경우보다 더 난삽하게 쓰인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와인 가운데 이런 낱말을 발견했다면, 일단 믿을 수 있다. 법으로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일단 이 용어가 들어가면 2년 이상의 숙성 기간을 보장한다. 스페인은 앞서의 예와 같이 3년에서 5년 이상의 숙성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라면 골치가 아프다. 칠레 와인은 보통 2년 이상 된 와인이 이런 말을 붙이는데 사실상 우리의 상식과는 배치된다. 레제르바, 그랑 레제르바 같은 말이 불과 2년 전 와인인 2002 빈티지에서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2년밖에 안 된 와인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고급 와인과 혼동하게 만든다. 프랑스 와인에도 종종 이런 말을 볼 수 있는데, 역시 고급 와인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생산업자의 수식이다. 국내에 수입되는 와인의 경우, 수입업자의 요청에 따라, 특히 칠레 자국의 규정과는 다른 말을 쓰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또 프리미엄(Premium)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이 낱말은 프랑스 와인과 칠레 와인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는 품계상 매우 높은 프리뫼르 크뤼에만 이 말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일단 고급 와인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법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신세계 와인에서는 교묘한 상술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와인의 맛을 좋게 하고, 오래 숙성시키기 위해 쓰는 오크통 숙성에 관한 표기도 피곤한 존재다.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별도로 이런 말을 라벨에 쓰지 않는다(병의 뒷면에 부착하는 보조 라벨에 명시하는 경우는 있다). 법적 규정에 오크통 숙성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세계의 경우 비교적 자유로운 라벨 표기의 허점(?)을 이용하여 ‘Oak Aged’ 같은 말을 쓴다. 일단 오크통에 단 하루를 넣었다고 한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비자의 주의 깊은 분별이 요구된다. 오크통도 천차만별이고, 숙성 기간도 그렇다. 한두 번 이상 사용해서 효험(?)이 떨어진 오크통에 두어 달 숙성시킨 것을 이렇게 표시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대개 싼 와인인데 오크향이 강하다면 대부분 해당된다) 오크 조각을 불에 그슬려 강한 향을 내도록 한 뒤 스테인리스 통 속에서 성숙시킨 와인에 첨가하고서는 이런 표기를 붙인다. 법적으로 허용된 작업이라면 무엇이 문제이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표시가 질 낮은 와인을 고급스럽게 포장하여 소비자를 기만하는 방법으로 쓰이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오스트레일리아나 칠레, 상당수 프랑스산 대중 와인에 보이는 절묘한 ‘라벨 치장’ 중 또 하나는 동그란 메달을 라벨 구석에 별도 부착하는 방법이다. 대개 어떤 와인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표식이다. 상 받은 와인을 자랑한다는 데 웬 딴지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와인일수록 “이 와인은 고급 와인이 아닙니다” 하고 광고하는 것과 같다. 좋게 보면 지명도가 떨어지는 와인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Plus 이 달의 …Wine Bar



더 소설
 

 ‘더 소설’은 에코와 베르베르의 소설을 번역 출판해서 잘 알려진 ‘열린책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품위 있는 와인 바 겸 레스토랑이다. 운영자 조영선씨는 ‘열린책들’의 대표 홍지웅씨의 부인이며, 오래된 적산 가옥을 헐고 지은 멋진 건물에 이 출판사와 더 소설이 함께 들어서 있다. 1층은 오픈 주방이 있어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와인과 식사를 할 수 있고, 2층은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뛰어난 조망으로 유명한 갤러리 바다.

 최근 와인 바의 경향은 식사 메뉴가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치즈류 같은 간단한 메뉴를 제공하던 기존 바들이 새로 요리사를 고용해서 10가지 내외의 단품 메뉴와 세트 메뉴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 더 소설은 처음부터 식사가 강화된 레스토랑 스타일의 바로 문을 열었다. 음식 수준은 어지간한 레스토랑보다 낫다. 적절히 퓨전을 가미해서 거부감 없이 서양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와인 리스트는 썩 좋다. 500종이니, 600종이니 하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리스트가 아니어서 더 반갑다. 사실, 돈만 있으면 1000종 이상의 와인 리스트를 갖추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인 요즘 와인 시장에서 가짓수 많다고 자랑하는 바를 보면 어이없기도 하다. 소위 ‘엄선’이라는 말이 와인 바에 절실하게 느껴지는 중급 이상의 와인 애호가에게 호평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지역별로 꼭 필요한 와인이 대부분 들어 있고, 가격도 요즘 말로 ‘리즈너블’하다.

 주차가 가능하며, 밤 12시까지 영업한다. 광화문을 마주 보고 사직터널 방면으로 좌회전, 다시 청와대 효자동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문의 02-738-0351



Wine 샤토 플뢰르 밀롱 

 연재 첫 번째에 소개한 와인이 프랑스 크뤼 부르주아급인데, 이번 와인도 같은 등급이다. 요즘 이 등급의 와인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고, 이에 걸맞게 수입되는 종류도 많아져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하지만 200종이 넘는 크뤼 부르주아 가운데 30여 종밖에 수입되지 않는다). 크뤼 부르주아급은 ‘그랑 크뤼 못지않은 품질에 가격은 좋은’이라는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와인도 그런 인식에 딱 맞는다. 포이약 테루아답게 강한 힘이 느껴지며, 병을 열었을 때는 비교적 달콤한 과일향이 우아하게 뿜어져 나와 고혹적이다. 30분 정도 놓아두면 은근한 뒷심을 발휘하면서 단단한 구조와 깔끔한 뒷맛을 보여준다.

 테이스팅한 사람마다 의견이 엇갈리는데, 어떤 이는 단맛과 부드러운 향이 여성적이라는 견해를 보였고, 다른 이는 강건한 힘이 있어서 남성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적당한 가격에 비해 복잡한 성격을 가졌음을 말해 준다.

 흰색 바탕에 생산자의 문장과 와인 이름이 화려한 금박으로 새겨져 있는데,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아 이 와인이 가지고 있는 품위를 드러내는 것도 반갑다.

문의 퐁 드 카브(02-536-9574), 소비자가 7만원

박찬일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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